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5화
다음 목적지를 정한 뒤 잠을 청하려 했는데 차진솔은 차진혁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차진혁도 굳이 차진솔을 쫓아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고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에는 차진솔이 어떻게 각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게, 음, 음, 말하자면 좀 긴데."
"뭘 이렇게 자꾸 뜸을 들여? 그냥 말해."
"그냥 엄마 아빠 따라서 봉은사에 종종 갔거든."
"봉은사?"
"있어, 그런 데가. 아무튼 우연히, 진짜 우연히 거기 가서 향 피우다가 각성했어."
"너 업적도 달성했던데?"
"아? 그거 별거 아냐."
차진솔이 달성한 업적은 '천일의 기도'.
천 일 동안 기도를 했다는 뜻이었다.
어떤 기도를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절대 안 들킴 #들키면 자살함 #오빠를 위한 기도 #그런 건 절대 안 했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감정이 밀려들어서 중계자의 시선을 아예 비활성화시켜 버렸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오빠랑은 1도 관련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나랑 관련 있냐고 물어본 적 없는데?"
"아무튼."
차진솔의 얼굴이 조금 더 빨개졌다.
차진혁은 차진솔과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던전 플레이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고, 차진솔은 의외로 쉽게 수락했다.
"알았어, 어차피 회사에서도 며칠 쉬라고 했으니까 오빠 말대로 할게. 같이 플레이 해보지 뭐."
"……."
"왜?"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싫다고 하는데?"
"그냥,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오빠는 아니잖아, 내가."
"알면 앞으로 좀 잘하시든가."
차진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2시.
"그래도."
"응? 왜 말을 하다 말아?"
"돌아온 건 잘했어."
"뭐?"
"잘 돌아왔다고."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차진혁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됐어. 아무것도 아냐. 발 닦고 잠이나 자."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나는 내일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목적지는 연희동 사러가 마트.'
그곳에는 사러가 던전이 활성화된 상태다.
제대로 된 공략만 알고 있으면 누구나 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획득 한계는 대략 300번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한 던전에서 낮은 난이도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특성.'
이렇게 얻기가 쉽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등급이 낮은 특성이라는 얘기다.
말이 거창해서 '초인'과 '초재생'이지, 사실 그리 선호되는 특성은 아니었다.
'흡수할 수 있는 직업이 많기는 한데…….'
범용성은 좋았다.
거의 대부분의 직업군이 저 두 개를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극초반부에는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특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쓰레기로 평가됐지.'
저 두 개의 특성이 다른 특성들과 상성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었다.
저 두 특성을 얻으면 다른 특성을 얻을 생각을 접어야 한다.
'혈사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장되다시피 한 특성인데.'
흡혈 능력을 지닌 혈사제가 저 두 특성을 얻으면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물론, 혈사제 외에도 흡혈이 가능한 직업군들이 존재했는데 그 직업군들은 저 두 특성과 상성이 나빴다.
이를테면 '흡혈귀'의 경우, '초인'을 얻는 순간 본체의 능력치가 대폭 하락하는 페널티를 가진다.
그러니까 초재생과 초인은 오로지 혈사제를 위한 특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슬슬 졸려왔다.
'집이 좋기는 좋네.'
회귀 전에는 이렇게 편하게 자본 적이 없었다.
회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말 회귀한 것이 맞을까.
꿈을 꾼 건 아니었을까.
정말로 5만 시간을 채우면 선제 각성 스트리머로 각성할 수는 있는 걸까.
내가 모르는 사이 조건이 바뀌었으면 어떡하지.
매일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개운하다.'
시간은 아침 7시.
꽤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이미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나와 함께 밖으로 나온 차진솔이 내게 잔소리했다.
"그런 차림새로 회사를 간다고? 거짓말을 좀 깔끔하게 할 수 없어?"
"내 차림새가 왜?"
그냥 평범한 면바지에 평범한 면 티셔츠를 입었다.
"정장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갖춰 입어라 좀. 엄마 아빠가 의심하겠어."
생각해 보니 이 시기에는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출근룩이라는 건 많이 바뀌게 된다.
특히 나처럼 일선에서 뛰는 플레이어의 경우, 복장은 무조건 자유 복장이었다.
어떤 애들은 갑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어떤 애들은 로브를 입고 다닌다.
심지어는 와이번 같은 탈것을 타고 날아다니며 투명망토를 두르기도 한다.
공식석상인 인터뷰에서도 그런데 출근 정도야 뭐 아무거나 입어도 되지.
'어쨌든 현실감각이 좀 뒤떨어지는 느낌이기는 하네.'
과거, 이 시기의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았다.
미친 망아지처럼 몸을 불살라가며 던전을 돌고 싸워댔던 기억밖에 없다.
랭킹 1위를 달성하면서 진짜 미친놈처럼 플레이에만 매진했다.
그 시기를 지나서는, 또 국가 소속 공무원으로서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밖에 없고.
회귀 이후에는 7년이나 골방에 갇혀 있었으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돈 없어."
"하아. 돈 잘 번다며? 하루 만에 500 벌었다며?"
"근데 옷 살 돈은 없어."
"허우대가 아깝지도 않냐?"
"그건 칭찬이냐 욕이냐?"
"칭찬욕."
우리는 택시를 타고 연희동으로 이동했다.
* * *
연희동.
사러가 마트 입구를 향해 걷자 알림이 들려왔다.
['사러가 마트 던전'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사러가 마트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와 던전이다.
차진솔은 무척 긴장한 모양새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나대지 마라, 심장아.'
여기 난이도 별로 안 높다.
그러니까 시시할 거다.
재미없을 거다.
나는 던전을 앞두고 설레하는 내 본능을 상당히 잘 억눌렀다.
이제 조금 더 내 감정을 잘 컨트롤하게 된 것 같다.
차진솔이 내게 물었다.
"오빠 얼굴이 왜 이렇게 상기되어 있어?"
"뭔 말이야?"
"첫사랑이랑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 같아서. 왜 설레하는 거 같지?"
내가 얼마나 본능을 잘 누르고 있는데.
보는 눈이 참 없는 거 같다.
약간 시간이 흐르자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목재현이었다.
"형!"
원래도 그리 어려운 난이도의 던전이 아니지만 목재현이 함께라면 더욱 쉬울 것이었다.
"여기는 내 동생, 차진솔. 쟤는 나랑 튜토리얼 필드를 같이 깬 애야. 목재현."
둘도 인사를 나눴다.
목재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렇게 예쁘신 동생분이 있는 줄 몰랐어요."
목소리는 왜 저렇게 작아지냐?
"저는 목재현이라고 해요."
둘이 악수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차진솔이에요. 몇 살이에요?"
"저, 저는 열다섯 살이요! 누, 누나는요?"
"저는 스물다섯이요."
"그, 그럼 말 편하게 하세요, 누나."
차진솔과 인사를 나누는 목재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첫 만남에 저렇게 대놓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차진솔이 예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은근슬쩍 힐끗힐끗 차진솔을 훔쳐봤고, 차진솔은 저런 게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나랑 상관없기는 한데.'
첫눈에 반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긴 한데, 묘하게 거슬렸다.
* * *
['사러가 마트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진짜 사러가 마트가 아닌, 플레이어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
그러나 배경 자체는 사러가 마트와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들어가자마자 전투 상황이 눈에 보였다는 것 정도.
커다란 주먹을 가진 원숭이 형태의 마물이 한 여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쾅!
상당히 커다란 소리가 났다.
주먹에 얻어맞은 여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우끼끼끼!
여자를 쓰러뜨린 원숭이, '주먹 원숭이'는 신이 난 듯 가슴을 두드리며 폴짝폴짝 뛰었다.
차진혁이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두개골이 함몰된 것 같습니다."
호흡을 체크해 봤다.
"이미 죽어 있네요. 저희를 제외하고 살아 있는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군요. 목재현, 수목산성 펼쳐서 안전지대부터 확보하자."
"알겠어요."
수목산성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나무 넝쿨이 자라나 차진혁 일행을 덮었다.
수목산성 안쪽은 상당히 안락한 공간이 되었다.
"안쪽에서 바깥쪽 보이게 할 수 없어?"
"네?"
"일 방향 반투명설정 말이야."
"그, 그건……."
"그걸 못해?"
차진혁은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다.
무려 '목왕'을 얻었는데도 실력 향상이 더딘 느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목재현의 성장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으나, 남다른 기준을 가진 차진혁이 보기에는 대단히 갑갑했다.
"휴. 아직 못하나 보네."
"……네. 그, 일방 뭐라구요?"
"일 방향 반투명설정. 안에서는 밖 볼 수 있고,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설정."
"지, 지금은 못하지만 노력해 볼게요."
내가 대영웅을 흡수한 목왕이었으면 적어도 여기서는 무쌍일 텐데.
수목산성과 목창을 융합해서 공방일체의 스킬로 사용하며 원숭이들 썰고 다녔을 텐데.
그랬으면 훨씬 재미는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차진혁은 이내 '아니오'라는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원숭이들이 너무 약해서 재미없었을 거야.'
원래 재미있으려면 목숨이 간당간당해야 하는 거니까.
차진혁의 기준에 여긴 너무 평화로웠다.
차진혁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넝쿨 사이의 틈으로 바깥을 살펴보았다.
"나 혼자 나갈 수 있는 작은 입구를 만드는 건 가능해?"
"오, 네, 그건 가능해요!"
서울역에서는 불가능했으나, 이제는 가능해졌다.
이 또한 차진혁 때문에 가능했던 성장이었으나 정작 차진혁은 감흥 없었다.
명색이 목왕이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으니까.
차진솔이 말했다.
"오빠, 혼자 나가려고?"
"어."
"어쩔 건데?"
"보니까 혼자 싸울 만한 것 같아."
'주먹 원숭이'의 레벨은 평균 23 내외.
차진혁 혼자 상대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싸울 수 있는 수준.
차진혁은 단도를 들고서 수목산성을 벗어났다.
차진혁을 발견한 주먹 원숭이가 차진혁을 향해 다가왔다.
'온다.'
차진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가까워진 주먹 원숭이가 일순간 차진혁에게 달려들었다.
저레벨 마물이라서 공격 경로가 굉장히 단순했고, 타이밍을 읽기가 아주 쉬웠다.
'중계결계.'
"이름은 주먹 원숭이.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주먹을 쓰는 원숭이류의 마물인 것 같습니다. 중계결계 믿고, 레벨빨 믿고 공격을 한 번 받아보겠습니다."
쾅!
소리가 났지만 원숭이의 주먹은 차진혁의 중계결계를 통과하지 못했다.
한 마리가 더 달려들었다.
차진혁의 정수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중계결계를 적당한 타이밍에 잘 써주기만 해도, 거의 타격은 없군요."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혹시라도 중계결계에 큰 데미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얘네들의 공격 패턴이 다채롭고 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면 중계결계를 이렇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텐데. 운이 무척 좋네요."
차진혁이 말을 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 과일 매대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흉포해지는 경향을 가진 거 같습니다. 마치 과일을 지키려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걸까요?"
바로 그쪽을 향해 걸었다.
'이 정도 천천히 시간 끌고 개연성 부여했으면 됐겠지?'
차진혁의 기준에서는 나름대로 시간을 끌면서 헤매는 척을 한 것이었다.
'이 정도 진행이면 적당히 스무스하고 자연스럽겠어.'
그러나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공략집을 달달 외운 뒤 정석 루트를 급속도로 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차진혁은 자신이 그렇게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개가 너무 느린 것 같아 답답할 뿐이었다.
'예전이 좀 그립네.'
검왕이었을 때에는 일단 마물들부터 싹 다 죽이고 봤을 텐데.
히든피스를 찾는 건 어려웠겠지만 속은 훨씬 시원했을 거다.
그는 이제 검왕이 아니고 스트리머인데, 자꾸만 검왕의 방식이 그리워진다.
'이 답답함을 잘 다스리자. 이것도 훈련이다.'
그는 이성으로 본능을 잘 억눌렀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