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6화
전체적으로 참 쉬웠다.
나는 과일 매대 앞에 서서 순조로이 방송을 진행했다.
"아무래도 얘네들에게는 과일이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로 맛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중계상점을 열어보겠습니다. 이것보다 훨씬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알고 있거든요."
중계상점을 열어 과일 카테고리를 찾았다.
이놈의 중계상점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렇지 물건 자체는 확실했다.
[프리링 바나나 : 50,000 다이아]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바나나.
한 송이에 5만 원.
맛없으면 죽여야 될 가격이다.
[프리링 바나나를 구입하였습니다.]
나는 바나나를 들고서 살랑거렸다.
주먹 원숭이들은 공격을 멈추고 코를 벌렁거렸다.
"줄까?"
나는 내 바로 앞에 있는 녀석에게 바나나 하나를 뚝 분질러서 내주었다.
우끼?
녀석이 바나나를 맛보았다.
우끼이이!
원숭이가 눈을 아주 크게 떴다.
전율을 느낀 것 같았다.
우끼끼끼!
원숭이들은 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소란을 피웠다.
바나나를 먹은 원숭이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대다가 남은 바나나를 다른 녀석에게 넘겼다.
"더 줄까?"
나는 다른 주먹 원숭이에게도 프리링 바나나를 주었다.
한 송이에 붙은 바나나는 대략 10개쯤 되었다.
[프리링 바나나를 구입하였습니다.]
[프리링 바나나를 구입하였습니다.]
나름대로 뼈아픈 지출이 이어졌다.
저번에는 소시지 하나에 3만 다이아였는데.
이제는 바나나 한 송이에 5만 다이아라니, 가격 참 충격이다.
주먹 원숭이들은 굉장히 매너가 있어서 한 줄로 서서 내가 바나나를 나눠주길 기다렸다.
"던전의 특성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마물과 친해질 수 있네요?"
던전의 마물들과 필드의 마물들은 다르다.
던전에는 어떠한 스토리나 퀘스트가 있기 마련이고, 특별한 조건들을 만족하면 마물들과 친밀도를 쌓는 것도 가능하다.
그에 반해 필드의 마물들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적개심만을 가진다.
테이머 계열의 플레이어들을 제외하고서, 필드의 마물과 친밀도를 쌓은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었다.
[주먹 원숭이들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2층 필드가 개방됩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은 검은색 공간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먹 원숭이들의 호감을 사게 되면서, 그 공간에 계단이 생성되었다.
"오! 운이 좋네요."
나는 계단 쪽을 향해 걸었다.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 * *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죠셉은 알림을 들었다.
[지구 서버, 한국 맵에 입장합니다.]
각성한 플레이어들이 외국의 영공에 진입하면 듣는, 무척 평이한 알림이었다.
그런데 죠셉에게는 더 많은 알림이 이어졌다.
[업적, '신문명 속도전'을 달성하였습니다.]
'이게 뭐야?'
──────────
[신문명 속도전]
신문명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업적입니다.
달성 조건 :
1) 특성, 얼리어답터(Early Adopter)
2) 한국 채널↔미국 채널↔노르웨이 채널↔카타르 채널↔중국 채널
──────────
'얼리어답터를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저 서버들을 이동하면 달성되는 업적이군.'
[시스템 스트리밍 플랫폼(SSF)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SSF는 기존 서버의 문물과 결합되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지구 서버의 스트리머만 노출됩니다.]
[결합 플랫폼 : 엘튜브]
죠셉은 떨떠름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플랫폼 엘튜브를 열었다.
엘튜브에 몇몇 이상한 영상들이 보였다.
영상 섬네일 오른쪽 위에 'SSF'라는 마크가 붙어 있었다.
또 몇몇 영상들에는 빨간색으로 (실시간) 이라고 써 있었다.
'이게 에건 폴이 말하던 그 시스템 스트리밍?'
하나를 눌러 들어가 보았다.
시청자 숫자는 대략 200여 명.
'이게 뭐야?'
그는 꽤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글자들이 틀림없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외계어들을 해석할 수 있었다.
'내가 저 글자들을 어떻게 알지?'
그렇다고 저 글자들을 사용하여 직접 글을 쓰라고 한다면 쓸 수 없다.
그러나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의 혼란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알림이 계속 이어졌다.
[TIP: 시스템 스트리밍 플랫폼(SSF)의 자동 언어 해석 기능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한참이나 엘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던 죠셉은 결국 알게 되었다.
SSF 마크가 붙은 영상들은 기존 엘튜브에서 활동하는 스트리머들이 아니라, 시스템 스트리머들이었다.
그 영상들이 엘튜브에 업로드되고 있는 것이었다.
'폴의 영상들도 있어.'
지구인이 아닌 다른 차원(서버)의 시청자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시청자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한 영상을 발견했다.
'뭐야 이건?'
시청자 수가 거의 1만 명에 달했다.
정말 이상하기는 했다.
온갖 자극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다른 것들과 달리, 제목이 굉장히 단순했다.
[사러가 던전 진행합니다.]
섬네일로 사용된 이미지도 그냥 검은색 화면이었다.
척 봐도 눈에 끌리는 이미지를 사용한 다른 스트리머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얘가 틀림없다.'
에건 폴이 말하는, '시청자들이 지구에서 최고로 꼽는 스트리머'의 방송이 확실했다.
일단 들어가 봤다.
영상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인칭 모드'라는 것을 설정하자 그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영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완전히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저 화면 너머로 영상을 살펴볼 때보다는 훨씬 박진감이 넘쳤다.
'헉!'
주먹 원숭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영상이었지.'
SSF의 영상은 신세계였다.
'특수한 방어막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이때까지는 이 능력이, 선제각성 스트리머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중계결계'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놀랍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고 있었다.
죠셉의 직업은 '스카우터'였고, 상대의 잠재력과 능력을 파악하는 눈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이, 이딴 식으로 방송을 진행한단 말이야?'
너무 위험했다.
위험한 만큼 박진감이 넘치기도 했다.
주먹이 날아들었다.
'피, 피했다!'
진행은 여전히 1인칭 시점.
눈앞으로 주먹이 지나갔다.
맞으면 안면 뼈가 함몰될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된다고?'
마치 주먹 원숭이의 공격 궤적과 타이밍을 모조리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스트리머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김철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네들의 공격 패턴이 다채롭고 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면 중계결계를 이렇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텐데. 운이 무척 좋네요."
거짓말!
죠셉은 외칠 뻔했다.
어떻게 이게 운으로 된단 말인가.
이건 철저한 노력과 수련으로 다져진 감각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게 중계결계라고?'
처음에는 아주 특수한 방어막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에건 폴도 가지고 있는 그 '중계결계'였다.
같은 능력을 가졌는데 너무 달랐다.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같은 칼을 쥐더라도 누가 드느냐에따라 완전히 다른 것처럼, 중계결계도 그랬다.
'진행이 너무 자연스럽고 깔끔해서……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
마치 공략을 알고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철수(차진혁)는 기묘하리만치 손쉽게 플레이를 진행했고 2층으로 가는 길을 열어 버렸다.
차진혁은 동료 두 명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는데, 2층에서 '큰주먹 원숭이'를 만났다.
다른 주먹 원숭이들보다 덩치가 2배는 커다란 녀석이었다.
고릴라 혹은 헐크라고 해도 믿을 정도여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꿀꺽, 침을 삼켰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
'영상으로 보는데도 이 정도라니.'
그러면 직접 마주하고 있는 저자는?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위압감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레벨은 29. 허리에는 큰주먹 벨트를 두르고 있네요. 상당한 호승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목소리였다.
기묘한 방송이었다.
* * *
[큰주먹 원숭이 필드에 진입하였습니다.]
내 주위로 사각형의 링이 생성되었다.
주먹링 형태였는데, 이곳은 사러가 던전의 숨겨진 보스 몬스터, '큰주먹 원숭이'의 필드였다.
큰주먹 원숭이는 일반 주먹 원숭이들과 달리 커다란 글러브를 끼고 있었는데, 내 손에도 글러브가 생성되었다.
'오, 큰주먹 원숭이다!'
땡!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내 눈에 타이머가 보이기 시작했다.
[1R/3R, 3:00]
마치 복싱링에 올라온 것 같았다.
3분 3라운드.
큰주먹 원숭이가 가드를 바짝 올리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얘한테 맞으면 아프려나?'
조금 기대가 되기는 했는데 일단 방송은 이어갔다.
"링으로 필드 구성이 된 걸 보면, 이 필드가 제게 원하는 것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싸워보겠습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
김정현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권왕이라 불렸던 김정현과 정말 많은 대련을 치러왔다.
김정현에 비하면 빈틈투성이였다.
'하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저레벨 구간 마물들은 진짜 너무 약한 거 같다.
크게 실망했다.
퍽! 퍽!
큰주먹 원숭이와 꽤 많은 주먹 공방이 오갔다.
땡!
휴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1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큰주먹 원숭이는 제자리로 돌아가서 숨을 조절했다.
참고로 큰주먹 원숭이는 근육이 엄청나게 많은 대신, 체력이 빨리 빠지는 스타일이다.
저 근육에서 나오는 파워는 내 중계결계를 뚫지 못했고.
상성 상 내가 훨씬 유리했다.
"이때 가서 공격하면 진짜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일단 복싱룰을 따르는 필드인 것 같으니까 잠시 지켜보겠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이 필드의 룰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1라운드와 같은 양상이었으나 녀석의 공격과 스텝이 조금 느려졌다.
땡!
[2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땡!
[3라운드가 시작됩니다.]
'가만.'
별로 긴장감 없이 녀석을 상대하다 보니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중계결계는 엄청 단단한 결계잖아?'
상대의 공격은 흡수하면서, 대신 내 몸에는 충격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럼 이걸 두른 채 공격하면?
내 몸에 반탄력은 안 전해지지만 단단한 둔기로 때리는 효과가 나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선제 각성 스트리머 중에 이거 두르고 체술가 흉내 낸 애들이 있기는 했었지.'
기억이 났다.
그런 애들은 레벨 100 언저리에서 대부분 죽었다.
그때부터는 직업 경계가 뚜렷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스트리머가 체술가 흉내 내면 골로 가기 딱 좋다.
'어차피 재미도 없는데 그런 거라도 시험해 보자.'
나는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중계결계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는데 몇 번 해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퍽!
권왕이 늘 강조하던 임팩트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공격력이 훨씬 강해지잖아?'
주먹 끝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김정현이 강조하던 그거 같다.
'오.'
새로운 기술을 획득한 거 같아서 약간 신이 났다.
권왕에 비하면 너무 조잡한 공격이어서 주먹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했지만 나름의 재미는 있었다.
퍽!
큰주먹 원숭이는 턱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큰주먹 원숭이가 다운되었습니다.]
나는 쓰러진 큰주먹 원숭이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일어서기를 기다려주었고, 큰주먹 원숭이는 몇 번이나 더 쓰러졌다.
마지막 3초를 남기고 큰주먹 원숭이는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보통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저 큰주먹 원숭이를 그냥 죽였을 거다.
"시스템상 라운드도 있고 시간도 세고 있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복싱룰을 따르는 필드니까 아마 승리 선언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몸에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주먹 원숭이가 링 위로 뛰어 올라와 내 오른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우끼끼!
[큰주먹 원숭이에게서 승리하였습니다.]
[큰주먹 원숭이가 패배를 인정합니다.]
어느새 깨어난 큰주먹 원숭이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챔피언 벨트를 내게 건네주었다.
[챔피언 벨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이 큰주먹 벨트를 지니고 1층으로 내려가 탐색하면, 숨겨진 특성 '초재생'과 '초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내 계획대로 다 됐다.
그런데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알림이 들려왔다.
[업적, '큰주먹 원숭이의 첫 패배'를 달성하였습니다.]
보통 '첫 판정'이 붙은 것들은 큰 업적에 속한다.
이런 게 뜨면 보상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아니 이렇게 쉬운 클리어에 첫 업적 판정이 들어간다고?'
게다가 '첫 판정'이 떠버리면 필드 자체가 변할 수도 있다.
다음에 다시 들어와 초재생과 초인을 얻는 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나는 '첫 판정'이 좋다.
나는 업적을 일구고 히든피스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즐거운 사람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 이거 좀 불길한데?'
초재생과 초인은 여기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지, 다른 곳에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쓸데없이 좋은 게 주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이내 알림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