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2
“기어이 거길 다녀온 거야?”
한정훈 차장이 검은 상복을 입고 출근한 날 보며 못마땅한 눈을 한다.
나는 권영섭 사장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설마 거기서 밤이라도 샜어? 멀쩡한 거 보니 봉변은 안 당했나 봐?”
밤을 새진 않았다.
그저 한성은행원이라는 것 자체로 불청객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로 인해 장례식장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되겠기에 한적한 새벽 시간을 틈타 잠깐 다녀온 것뿐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던 일진기업 직원들에게 욕을 좀 먹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죽은 부군이 따뜻한 밥 한 끼는 먹이고 보내길 바랄 거라며, 사모님이 직원들을 막아주었기에 큰 봉변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하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들었더라면, 직원들에게 주먹질이라도 당했더라면 이 먹먹한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지지 않았을까?
사모님이 보내주던 그 넉넉한 온정이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누른다.
“하여튼, 자살은 왜 해? 남은 가족은 어쩌라고? 직원들은? 자기 때문에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억울한 채무자들은?”
“자살하신 거 아닙니다.”
자살일 리 없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권영섭 사장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무엇보다 경찰도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을 지은, 명백한 사고사였다.
그런데도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살일 거라며 아무렇게나 찧고 까불어댄다.
한정훈 차장도 마찬가지다.
“자살이 아니긴 개뿔. 이건 어떻게 봐도 자살이지.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하니까 회사도 망하는 거 아니겠어?”
“······.”
“그리고 문상을 다녀왔다니까 하는 말인데, 유가족들한테 그거 확인했어? 상속 어떻게 할 건지? 하긴, 사전에 입을 다 맞춰 놨을 테니 당연히 상속 포기겠지. 하여튼 민폐라니까. 사람들이 말이야. 책임감이 없어요. 책임감이. 남들 어떻게 되든 제 살 길만 찾으면 다냐고.”
“······.”
“아 참, 사망 보험금은? 그 노인네 자살까지 할 정도면 보험 정도는 들어 놨을······.”
한정훈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눈이 돌아간 내가 의자에 몸을 묻고 있는 한정훈의 얼굴을 냅다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다.
뻑
“억!”
“이 개새끼가! 사람이면 해서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지, 뚫린 주둥이라고 어디 자꾸 개소리를 씨부려!”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벌러덩 나동그라진 한정훈도, 한정훈의 개소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던 대부계 직원들도 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다들 벙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차장이 피범벅이 된 얼굴로 벌떡 일어나 내게 소리친다.
“이, 이 미친 새끼가······ 야! 하성운! 너 돌았어?”
“그래! 돌았다! 씨발 새꺄!”
쌓일 대로 쌓인 게 터져버린 만큼, 눈이 돌아버린 나는 다시 한 차장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부랴부랴 끼어든 동료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야! 하 대리! 그만 둬! 진정하라고!”
“놔! 놓으라고! 저 개새끼 오늘 내가 아주 죽여 버릴라니까!”
“저, 저 미친 새끼 눈 돌아간 것 봐. 야! 하성운!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내 기세가 어찌나 살벌했던지 한 차장이 버럭 화를 내는 와중에도 책상 뒤로 급히 몸을 숨긴다.
키 183의 건장한 체격. 거기다 소싯적에 태권도도 좀 했다.
겁을 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난 아직 화가 다 안 풀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한 차장의 면상을 한 번 더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성난 황소 같은 나를 이미 네 명이나 달라붙어 거의 육탄으로 막고 있는 상태.
거기다,
“대체 이게 다 뭐 하는 짓들이야!”
그 소란에 달려들어온 박순호 지점장의 일갈까지.
결국 6년을 묵혔다 폭발한 내 하극상은 그렇게 짧고 굵게, 그리고 일반인의 싸움이란 게 다 그렇듯이 조금은 맥 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난 당연하게도 지점장실로 불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길래 한 차장이랑 주먹다짐까지 해??”
지점장 박순호가 의아함 한 조각, 황당함 한 조각, 분노 한 조각이 적절히 섞인 눈으로 날 본다.
한 차장은 코뼈라도 부러졌는지 피가 멈추지 않아 급히 병원으로 달려간 상태.
“······.”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변명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한 차장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행내 폭행이라니······ 그것도 하극상! 이봐. 하 대리. 자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줄 알아 몰라?”
나는 아무 대꾸 없이 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 지점장 앞에 내밀었다.
참 오래도 들고 다녀 손때가 다 묻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책임지고 그만두겠습니다.”
한 차장에게 가한 폭력은 돌발적이고 충동적이었다.
순간 정말 빡돌아서 이성을 상실했다.
하지만 한 차장의 얼굴로 구둣발을 들어 올린 그 순간에는 이미 이성은 돌아와 있었고, 찰라 간에 난 이 지긋지긋한 은행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정말이지 한 점 망설임도 없이, 그간 쌓인 울분을 모조리 담아서 한 차장의 면상을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통쾌함.
신기할 정도로 뒷 일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한 대 더 때리지 못한 게 그저 아쉬울 뿐.
오히려 결혼도 아직이고, 지켜야 할 가정도 없는 주제에 이 쉬운 걸 그동안 왜 그렇게 미련스럽게 참고 있었던 건지,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날 지점장이 참 철딱서니 없다는 눈으로 본다.
“이대로 그만두면? 이 문제가 해결이 돼? 한 차장이 고소라도 하면 어쩔 거야?”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멍청한 소리 말아! 세상이 그렇게 쉬워? 나이라도 적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건데 이런 전적 가지고 어딘들 갈 수 있을 것 같아?”
박순호 지점잠이 내가 내민 사직서를 신경질적으로 북북 찢는다.
“잔말 말고 일단 예금 창구로 가서 텔러들이나 도와. 당분간 대부계 쪽에는 얼씬도 말고. 내가 너 아끼는 거 알지?”
안다. 실적은 좋았으니까.
“한 차장이 같이 일 못 하겠다고 투덜대도 그거 다 무시하고 막아준 것도 알지?”
그것도 안다.
박 지점장과 한 차장은 라인이 다르다.
박 지점장은 김강철 전무 라인이고 한 차장은 직급은 낮지만 한창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조성환 상무 라인이다.
한 차장이 나를 까대면 까댈수록 오히려 자기 사람처럼 느끼는지 더 감싸주곤 했다.
장원 지점에서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은 분명 박 지점장 덕분이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좀 영리하게 살아. 내가 매번 말하잖아. 은행은 정치라고. 자네가 이대로 그만두면? 한 차장은 바로 자네를 고소할 거야. 외부인한테야 거리낄 게 없으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으면 한 차장도 어쩌질 못해. 상사가 직계 부하를 고소하는 순간, 바로 본사 높으신 분들한테도 보고가 갈 테고, 직계 부하한테 주먹질이나 당하는 한심한 놈이라는 낙인은 두고두고 한 차장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엔 조성환 상무로부터 팽 당할 수도 있다.
웃음거리가 된 수족을 안고 갈 만큼 좋은 인품은 아닌 걸로 알고 있으니까.
출세 지향 주의의 한정훈이라면 확실히 자존심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 같진 않다.
“그러니까······ 한 차장은 내가 잘 달래볼 테니까 하 대리 자네는 당분간 없는 듯이 있으라고. 정 안 되면 본점이든 다른 지점이든, 자네가 갈 만한 곳은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
‘그 동안 내가 너무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 건가?’
박순호 지점장.
단순히 내 실적이 좋아서, 한 차장과는 대척점에 있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날 감싸주는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 이유들이 감정의 시발이긴 하겠지만, 방금 내 사직서를 찢으면서 하는 말들에는 그런 이유 이상의 걱정과 애정이 담겨있었다.
‘이젠 정말 자기 새끼라고 생각하는 건가?’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라는 유대감과 책임감.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괜히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그래서 차마 박 지점장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일단은 이렇게 수신계 창구로 옮기기 위해 간단히 짐을 싸고 있다.
웃긴 것은, 평소에는 내가 한 차장한테 개길 때마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관심사원 취급하던 대부계 동료들이 정작 이런 대형 사고를 쳐버리고 나니 오히려 진짜 동료처럼 군다는 것이다.
“이햐! 여태 하 대리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래도 좀 참지 그랬어? 한 차장 그 인간 말 더럽게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한 차장 앞에서는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서 어떻게든 날 면박 주기 바빴던 공현수 과장이 핀잔을 주면서도 대견하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인다.
“그래도 한 차장님이 말이 심하긴 했죠. 고인한테 민폐라느니 무책임하다느니······.”
대부계 막내 이은섭도 내 편을 들어준다.
그동안 한 차장에게 쌓였던 불만, 그리고 곧 짤리게 될 나에 대한 그간의 미안함과 시원함이 뒤섞인 태도 변화.
그런 변화가 반갑기는커녕 입맛이 쓸 뿐이다.
“심 차장님. 저 또 왔습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하자 대부계 일 외에 은행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수신계 심은정 차장이 웃음기 다분한 얼굴로 나를 맞는다.
“짐까지 챙겨온 걸 보니 이번엔 꽤 오래 있을 모양이야?”
가끔 이렇게 수신계 업무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부분은 수신계 업무가 많을 때 심 차장의 요청으로 제일 만만한 내가 차출되는 형식이었지만, 솔직히 난 수신계 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혹시 그만둘 건 아니지?”
“······.”
“그만두지 마. 우리 지점 근속 연수가 꽤 긴 편이긴 하지만, 한 차장이 여기 있어봤자 얼마나 더 있겠어? 버티면 다 해결돼. 그리고 정 대부계에 있기 그러면 그냥 우리 수신계에 말뚝을 박든가. 그렇잖아도 인원 충원 요청 한 지가 반 년이 다 됐는데도 아직 감감무소식이라 짜증 나 죽을 지경이거든. 이참에 그냥 여기 말뚝 박자 하대리. 내가 잘해 줄게.”
“그럼 그럴까요? 이참에 수신계를 한 번 접수해볼까요? 저 발차기도 잘해서 웬만한 진상은 다 날려버릴 수 있는데, 저 한 번 제대로 밀어주시겠습니까?”
“그래! 그 발차기! 그게 하 대리가 우리 수신계에 꼭 필요한 이유지!”
“그, 그런가요? 하하.”
심은정 차장의 농담에 오늘 처음으로 웃는 것 같다.
답답했던 마음속 먹구름도 조금은 걷히는 느낌.
그렇게 수신계로 넘어와 예금 창구에 짐을 풀었다.
그러자 옆 창구 텔러인 김승혜 계장이 내 자리에 커피를 가져다 놓으며 찡긋 윙크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무심한 척 말없이 들어 올리는 엄지척.
나에 대한 응원도 있지만 한 차장의 평소 인품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리다고 무시하고, 여자라고 경시하고, 계약직은 계약직이라고 멸시하고. 거기다 문제가 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습관적인 성희롱까지.
그러니 저 엄지척은 오늘 나의 그 발차기에 대한 칭찬이다.
비단 김승혜 계장만이 아니다.
텔레들 대부분이 내 발차기를 정의구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지금 내 앞에 한 잔 한 잔 쌓여가는 커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그런 환대 속에서 여섯 잔의 커피와 함께 보게 된 창구 업무.
새삼 텔러들에게 감탄을 하게 된다.
일반 입출금 업무부터 신용카드, 보험, 외환까지······ 그야말로 전천후다. 그뿐이랴. 그 모든 업무에 완숙하고 전문적이다. 심지어 감히 따라갈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일 처리까지 빠르다.
저들이 없으면 과연 은행이 돌아갈까?
그런데도 연봉은 내 연봉의 절반 수준.
‘이 정도면 거의 착취인데······.’
은행도 이젠 좀 바뀌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두 배나 되는 연봉을 받으면서 다른 텔러들보다 일은 절반 밖에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많이 민망하다.
그렇게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였다.
“하 대리님.”
2년 차 행원이자 대부계 말단인 이은섭이 날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의아해하는 내게 이은섭이 서류 봉투 하나를 내민다.
“이건 하 대리님이 처리하시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이은섭이 내민 것은 대출 신청서류 봉투였다.
거기에는 죽은 권영섭 사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출 불가로 결정이 난 데다 당사자가 죽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서류 파기가 원칙이지만, 유품이라면 유품이랄 수도 있는 물건이기에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걸렸나 보다.
“은섭씨. 고마워.”
“뭘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이은섭이 대부계로 돌아가고, 난 잠시 서류 봉투에 적힌 ‘일진기업 권영섭 사장’이라는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이름을 보고 있자니 권영섭 사장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고, 이내 가슴속에선 찬 바람이 쓸쓸하게 훑고 지나간다.
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빨간색 매직팬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져 있는 D라는 글자.
그런데,
“어?”
착시일까?
D라는 글자 옆으로 마치 환상처럼 어떤 글자들이 타이핑 되듯 새겨지고 있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새로운 고정거래처 확보. 삼원 브레이크]
[기업신용평가등급 D→A 확정날짜: 202X년 4월 16일]
< 무심한 척 엄지척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