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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화 (3/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3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새로운 고정거래처 확보. 삼원 브레이크]

[기업신용평가등급 D→A 확정날짜: 202X년 4월 16일]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대로다.

‘꿈인가? 나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야?’

혹시나 싶어 옆자리의 김승혜 계장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혹시 여기 이 글자들 보이세요?”

“글자요?”

김승혜 계장이 의아해 하며 내가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곳을 본다.

“글자라뇨? 무슨 글자요?”

“안 보입니까?”

“D말고는 아무것도······.”

내가 이상해 보이는지 의아해 하는 그 눈에 걱정을 담는다.

‘안 보인다고?’

그럼 내가 보고 있는 건 뭔데?

아니, 애초에 없었던 글자가 갑자기 생겨났다.

이 봉투에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거야?

전신에 소름이 쫙 돋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

“괜찮으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봤나 봅니다.”

그렇다고 안 보인다는데, 원래 있지도 않았던 글자인데 이게 왜 안 보이냐고 생때를 쓸 수도 없는 노릇.

나한테만 보인다.

어째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면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나?

만일 이게 헛것이 아니면?

설마 죽은 권영섭 사장이 귀신이 되어서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그저 황당하고, 또 조금은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내 눈은 내게만 보이는 그 글자들 중 하나에 멈춰 있다.

[삼원 브레이크]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브레이크 제조 회사다.

‘삼원 브레이크가 고정거래처가 된다고?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일진기업의 회생을 위해 백방으로 자금줄을 물색하던 중에 알게 된 사실.

삼원 브레이크는 일진기업이 부도 시에 인수를 원하는 기업 중 1순위 후보였다.

이미 물밑작업까지 거의 끝마친 상황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인수처가 아니라 고정거래처라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상황과 비현실적인 글귀, 심지어 신뢰도까지 낮다.

그럼에도 그 글귀를 봐버린 이상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터무니없는 희망인줄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인은 해야 했다.

폰을 들었다.

띠띠~♪ 띠띠디디디~♬ 띠디~♬♬

흥겨운 리듬의 컬러링이 들려온다.

기어코 그래미를 먹은 BTS의 노래다.

“어.”

“나야. 하성운.”

“알아. 하씨. 또 무슨 일인데?”

퉁명스레 물어오는 상대는 대학 때부터 참 지겹도록 붙어 다닌 대학 동기이자 입행 동기인 본점 리스크 관리팀의 이관우 대리다.

좋은 이름 놔두고 날 항상 하씨라고 부른다. 입에 착 감긴다나 뭐라나.

“일진기업 인수처 어디야?”

“일진? 거기 아직 부도 안 났잖아? 부도도 안 났는데 벌써부터 뭔 인수야?”

“이미 물밑작업 들어갔다는 거 다 아니까 구라 칠 생각 마. 너 저번에 멀쩡한 우성실업, 분식회계니 뭐니 하며 총괄회의에 가져갈 뻔한 거, 그거 내가 막아줬어. 나 그거 조사하느라 3일 동안 잠도 못 잤고. 그리고 신입 연수 때도······.”

“야이 개자식아. 대체 그걸 언제까지 우려먹을 건데?”

“그럼 목숨줄 구해준 값이 그렇게 간단히 퉁쳐질 것 같냐? 그것도 두 번인데?”

“거머리 같은 자식!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두 곳으로 좁혀졌어. 하나는 삼원 브레이크고, 하나는 KG브레이크.”

KG브레이크는 업계 3순위 정도다.

말이 3순위지, 삼원 브레이크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급이 다르다.

“혹시······ KG로 내정된 건 아니고?”

“······.”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놀람.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이관우가 놀란 만큼이나 나도 지금 놀라고 있었다.

일진기업의 인수처가 삼원 브레이크가 아니다.

판정보류 문구에 적힌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이 순간 가능성이란 것이 생겨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왜 삼원 브레이크가 밀려난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이게 말이 안 되는 거거든. 삼원의 기업 가치야 말할 것도 없고, 인수 조건도 삼원 쪽이 더 좋았단 말이지. 당연히 다들 삼원 쪽으로 넘어갈 거라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었고. 근데 갑자기 분위기가 KG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져 버렸어.”

“대체 왜?”

“윗선에서 하는 일이니 나야 모르지. 다만······.”

“다만?”

“이건 그냥 우리 팀 내에서 떠도는 말이긴 한데······ 조성환 상무 쪽에서 손을 쓴 거란 말이 있어.”

“조성환 상무가? 뒷돈이라도 받았다는 거야?”

“그야 모르지. 뒷돈을 받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님 다른 조건이 달렸을 수도 있고. 물론, 말했다시피 이건 어디까지나 실체 없이 떠도는 소문일 뿐이야.”

실체 없이 떠도는 소문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난 그 말이 사실이라 확신했다.

‘한 차장 그 인간이 그렇게 무리하게 등급 변경을 주장한 것도 다 조 상무의 지시였던 거야.’

모든 게 KG 브레이크에게 일진기업을 떠먹여주기 위한 빌드업.

‘조 상무의 그 개짓거리에 한 차장은 하수인 노릇을 한 것이고.’

인면수심도 유분수지, 그런 주제에 권영섭 사장의 죽음을 자살이니 뭐니 해대며 조롱까지 일삼았다.

“개같은 새끼!”

입에서 절로 욕이 터진다.

“뭐? 야! 갑자기 왜 욕은 하고 지랄이야!”

아차차!

“아, 미안. 너한테 한 거 아냐.”

“나한테 한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내가 너 욕을 왜 해? 이렇게 좋은 정보도 따박따박 물어다 주는데.”

“그냥 욕을 먹는 게 나을 것 같기도······.”

“욕도 먹고 정보도 주고 하면 나야 더 좋지.”

“기어이 날 안 놔줄 셈이냐?”

“너무 그렇게 날 나쁜 놈으로 몰고 가지 마. 세상사 새옹지마라고, 언젠간 이 질긴 끈을 네가 더 붙잡고 늘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그냥 퇴사를 하고 만다.”

“무려 쌍둥이 공주님을 둔 이 시대의 위대한 가장께서 퇴사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퇴사! 그 전에 제수씨가 널 살려둘 것 같아?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보다 삼원이 일진 기업을 인수하려는 이유가 뭐였어?”

“그야 당연히 밸브지. 초창기때부터 거래해 온 곳이 있긴 한데, 요즘 성능 문제로 말이 많았거든.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삼원이라는 온실 속에서 편하게 커오다 보니 여러 가지로 경쟁력이 떨어진 거지.”

“그래서 삼원에서 칼을 빼든 거다?”

“국내에서도 문제가 생겼지만 이번에 해외에서도 결국 내구도 문제로 사고가 터졌거든. 그래서 대체할 업체를 찾던 중에 일진기업이 눈에 띈 거지.”

처음에는 일진기업과의 공급 계약 정도로만 계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진 일진기업이 부도 위기로까지 내몰리자, 아예 사업 확장 쪽으로 가닥을 잡고 인수 절차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KG가 끼어들어 깽판을 친 거고. 음······ 삼원에서도 아냐? KG로 확정됐다는 거.”

“아마 모를 걸? 지금 우리 팀도 그 일 때문에 충격 먹고 완전 카오스 상태거든. 그러니까 너도 입단속 잘해. 괜한 짓 해서 나한테 불똥 튀면, 그땐 진짜 너 죽고 나 죽고니까.”

“혹시 삼원 쪽 인수 담당자 누군지 알아?”

“그건 왜? 괜한 짓 하면 죽는다고 내가 방금 1초 전에 말한 것 같은데?”

“너한테 불똥 튈 일 없게 할 테니까 그 사람 연락처나 가르쳐줘.”

“불똥이 아니라, 나 타고 있는데 이미? 이미 내 몸에 불이 붙어버린 것 같은 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응. 기분 탓이야.”

“······.”

“······.”

“이것 하나만 알아둬. 이 일로 내 출세에 문제가 생기면 나 하나로 좆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넌 우리 쌍둥이 공주님들에게도 아주 몹쓸 짓을 하게 되는 거야.”

“걱정하지 마. 너 없어도 공주님들은 내가 잘 돌볼 테니까.”

“나, 죽는다고는 안 했거든?”

“그래. 그러니까 나 믿고 맘 편히 가.”

“······.”

전화를 끊은 나는 방금 적은 메모장을 잠시 만지작 거렸다.

[삼원 브레이크 기업법무 본부장 강선우]

삼원 브레이크의 일진기업 인수 담당자다.

잠시 메모장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새삼스러운 눈으로 서류 봉투 위의 판정보류 문구들을 보았다.

‘이거 정말 실화야?’

문구의 내용대로 아귀가 딱딱 맞아들어가는 상황.

이 대목에서 고민이 생겼다.

이 문구의 내용들이 정말로 예지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대로 내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개입을 함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일까?

전자라면 그냥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만일 후자라면?

내가 개입을 해야지만 완성이 되는 거라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분명 이 문구들이 나한테만 보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게 회사를 지켜달라는 죽은 권영섭 사장의 간절한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일 수도 있다.

물론 미신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일단 내 상식선에서는 지금 이 괴현상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다.

‘등급 변경 날짜가 4월 16일이면 앞으로 6일 남았나?’

1차 부도일로부터 이틀 전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관우의 말대로 삼원 쪽에서 아직 모르고 있다면, 더 지체했다간 손 쓸 틈도 없이 상황이 종료되어버릴 수도 있다.

알려야 한다.

그렇다고 대놓고 연락을 취했다가는 차후에 감시팀에 걸려 그 어린 공주님들에게 날백수 아버지를 선물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세 번의 통화연결음이 울리고,

“여보세요?”

전화가 연결되었다.

“강선우 본부장님 되시죠?”

“예. 그런데요?”

“일진기업 인수팀을 꾸리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잠깐의 정적.

극비로 진행되는 일이기에 날 선 목소리가 이어진다.

“누구시죠?”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모르시는 것 같아 귀한 정보 하나 드리려는 것뿐이니까.”

“······?”

“일진기업 인수처 이미 KG로 내정됐습니다. 괜히 시간낭비 마시라구요.”

“예? 그게 무슨······?”

철컥―

강선우의 놀람과 의문을 뒤로하고 단호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검은색 마스크, 알이 큰 선글라스. 깊게 눌러쓴 모자, 그리고 CCTV 하나 없는 어느 깡촌 마을의 구멍가게 앞 낡은 공중전화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현타가 오기도 하지만, 한 가정의 평화와 한 가장의 출셋길과 두 어린 천사들의 무탈한 미래를 위해 최선 정도는 다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로써 공은 내 손을 떠났다.

이제 남은 일은 삼원 브레이크의 몫이다.

강선우 본부장이 내가 준 정보를 장난 전화로 치부해버리든, 아님, 심각한 사안으로 생각하고 윗선에 보고를 하든, 그로 인한 삼원 브레이크의 결정이 어떤 것이 되든 간에 그건 이제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기적처럼 모든 일이 문구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 뿐.

‘아니, 아직 하나 남았군,’

그것도 아주 중요한.

유가족들의 상속 포기를 막아야 한다.

적어도 6일 후,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 전에 상속 포기가 결정된다면, 회사가 다시 살아난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 나한테만 보인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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