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어쩌다 보니 여차저차해서 해오름 동아리에 초대받았다.
놀랍게도 배역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번 연영과 신입생들도 참여한다는 모양이다.
물론 과동아리에 가입한 사람만.
웬만하면 다들 가입하기도 하니까 문제없다고 한다.
근데 왜 오디션에 부른 걸까? 나는 그냥 연습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런 것도 다 좋은 경험이지 않을까?
언제 이런 걸 보겠어.
이런 마음으로 시하와 함께 참가했다.
“형아. 사람 마나.”
“여기 강당이라서 그래.”
“아? 아아.”
건물 1층에 만들어진 이 강당은 보통 비어 있는 경우가 좀 많은데 제일 바쁜 시간대는 시험 기간이다.
시간이 거의 풀로 차지하고 있어서 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지 못할 정도다.
나 역시도 여기서 시험을 본 적이 있다.
“오! 시하페페 작가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여!”
나와 시하는 연영과 학생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신창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신창민이 내 손을 잡으며 격하게 악수를 했다.
“와, 진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시하페페 작가님! 최고!”
“작가라고 들으니까 어색하네요.”
“저도 그래요. 각색 작가, 시나리오 작가. 이런 말 들으면 어색하긴 하죠. 하하하. 근데 여기 이 애는?”
“아! 제 동생입니다. 이름은 시하예요.”
“아! 그래서 시하페페 작가시구나!”
굳이 사실 둘이서 시하페페 작가라고 말할 수 없었다.
딱히 숨길만 한 일은 아닌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시하는 별 관심 없는지 무대만 가리킨다.
“형아. 커!”
“그래. 여기는 강의하고 그러는 곳이라 크지. 전에 소강당이랑 비슷한 크기 아니야?”
“아냐. 더 커.”
조금 더 큰가?
그래도 이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신창민이 말했다.
“오늘 같이 심사를 봐주시는 거죠?”
“네? 아닌데요.”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그래도 심사위원석에 앉으시죠.”
“…왜죠?”
“당연히 제일 잘 보이는 곳이니까요.”
“좀 떨어져 앉아도?”
“에이! 에이! 제일 가까이서 직관해야죠. 옆에서 심사를 어떻게 쓰는지도 보고! 종이에 뭐 쓰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점수 아닌가요?”
“따로 체크하는 부분까지 보면 작품 활동에 도움 되지 않겠습니까! 상의도 할 텐데.”
아…. 그림 그리는 건 제가 아니라 시하라서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뭐 가까이서 학생들의 연기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시하야. 앞에서 볼까?”
“아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심사위원석이 있는 맨 앞자리로 갔다.
심사위원석이라고 해봤자 강당 무대 앞의 1열인 의자일 뿐이지만.
“시하야. 신기한 거 가르쳐줄까? 여기 의자는 책상도 나와.”
“정말?!”
“그럼.”
나는 손잡이 부분을 열어서 책상을 꺼냈다.
시하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책상 숨바꼭질하고 이써! 숨어써!”
“푸흡.”
숨바꼭질하는 책상이라니. 하여간 말하는 게 너무 귀엽다.
시하도 책상을 꺼내서 펼쳐 두드렸다.
토닥토닥.
그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근데 시하야. 나중에 연극…. 이거 오디션이거든? 주인공을 누가 할지 정하는 대결이야.”
“이기는 사람 레드야?”
“으응. 그렇지. 레드지. 아무튼, 이거 예전에 어린이집에서 춤 포스터를 만든 것처럼 연극 포스터를 그려 달라고 했거든.”
“정말?”
“응. 혹시나 그려볼래?”
“시하 할래.”
“돈도 준대.”
“얼마?”
“할무니 열 개?”
“할무니 만타! 집 살 수 이써?”
“아니.”
집 사려면 할무니 열 개로 어림도 없다.
월세 정도는 낼 수 있을지도?
시하가 그 말에 시무룩해졌다. 저런. 시하야. 열 개면 엄청 페이가 좋은 거야.
물론 러프본을 먼저 줘야겠지만. 마음에 안 들면 반절이라도 준다고 한다.
“연기 열심히 보자. 알았지?”
“아아.”
그때 신창민이 멀리서 다가왔다.
아이도 한 명 있었는데 그건 연주였다.
“응? 연주?”
“아? 연주! 하이!”
연주가 시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많이 놀란 모양이다. 나 역시도 놀랐으니까.
“시하야. 안녕. 시혁이 오빠도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연주는 여기 어떻게?”
“아빠가 구경하러 오라고 했어요.”
“아빠? 아!”
그러고 보니 연주 아버지가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되었다고 들었다.
이름이 샤이먼 스미스이셨던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하니 기억이…….
「오! 시혁!」
“응?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지갑은 잘 있죠?”
「그때 이후로 안 들고 다닙니다. 요즘 폰으로 다 되는 시대잖습니까. 한국이 참 좋죠.」
스미스 씨가 자신의 폰을 흔들었다.
하긴 요즘 지갑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지긴 했지.
교통카드부터 시작해서 다 폰 하나에 들어있으니.
「그거 굉장히 편리하겠네요.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써버렸네요.」
「괜찮습니다. 다 알아들어요. 물론 영어가 편하지만.」
「연극 쪽 일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
「뮤지컬과 연극 쪽 일이 재밌긴 하죠. 하하. 저 꽤 유명하긴 합니다.」
「그럼 정식 교수가 된 건가요?」
「아니요. 하하하. 일단은 2년만?」
「아하.」
나는 그렇게 된 거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연고가 여기가 아니신데 정식 교수가 되기 힘들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시하가 우리 연주랑 잘 놀아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에이. 시하보다는 하나라는 애가 잘 놀아줄 거예요. 하하하.」
「하하하.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단짝친구라고.」
시하에게 승준이 있다면 연주에게는 하나가 있다.
뭔가 밸런스가 맞는 느낌이다.
“연주. 여기 커.”
“으응? 큰가?”
“아아.”
시하야. 너 화제가 여기 크다! 라는 거밖에 없는 거 아니지?
연주는 이런 곳을 많이 가봐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큰 걸 못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니까 나도 시하를 데리고 이리저리 구경 많이 다녀야 하나 싶다.
왠지 저런 시야의 차이를 보면 못 해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서…….
말 한마디에 괜히 비약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어릴 때 많은 것을 봤으면 하는 기분이다.
그 나이 때 매번 생각이 달라지고 느낌이 달라진다.
그걸 잘 느끼고 경험하고 쌓았으면 좋겠다.
“오디션 해. 오디션.”
“응. 나도 그렇게 들었어. 그건 별로 본 적 없어서 궁금하긴 해.”
“연주도 오디션 해?”
“응? 아니. 난 오디션 할 필요 없어. 바로 통과야.”
“연주 대단해~”
어마어마한 자신감이구나. 연주야.
시하도 오디션 할 필요 없이 프리패스거든!
난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거야?
“다 모였네요. 그럼 오디션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착석해 주세요!”
신창민이 신나게 말하며 엄지를 나에게 추켜세웠다.
나한테 대체 왜?
슬럼프 와서 괴로워했다고 들었는데 진짜 사실인가?
저런 모습을 보니 조울증이 의심되긴 한다.
***
무대 위에 책상과 의자가 따로 마련된 심사위원석이 없는 건 이유가 있다.
관객의 시선에서 무대를 바라볼 때 배우의 모습과 구도, 분위기를 상상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옆에 있는 신창민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앞에 있는 건 관객이 아닌 심사위원이지만.
“이렇게 강의실 신청을 하고 간접 경험시키는 거죠. 왜 있잖아요. 모의고사 때 수능 분위기랑 익숙해지기 위해서 꼭 학교에서 치게 하거나 집에서 학교 책걸상 마련해 두고…….”
“아. 알아요.”
“형아. 모이? 고사? 아! 모이고 사는 고야? 모여서 모 사?”
시하야. 모여서 뭘 사는 게 아니라 시험이야.
“시하도 나중에 학교 가면 알게 될 거야. 하게 될 거고.”
“재미써!”
아마 진짜 의미를 알면 재미없을 거다.
스트레스받아서 나한테 푸는 거 아니지?
수험생이 되어 집 거실에서 티비 소리도 1로 맞춰두고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조심스럽게 대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시하의 중2와 고3 생활이 궁금한 한편 걱정이 된다.
“형아?”
“응? 아! 저기 배우들이 나오네.”
“아아!”
시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온 사람은 신입생이다. 긴장한 티가 좀 났다.
“저는 주인공인 김주혁 역을 하고 싶습니다!”
“네. 씬23 해보세요.”
나는 책상에 놓인 시나리오를 들춰보았다.
명확한 미래의 환상이 보이는 장면이다. 시하가 그린 천을 들춰내며 8, 90년대 시대가 보이는 씬.
앞에 있는 학생의 눈빛이 바뀐다.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이리도 활기찬 풍경이라니. 마치 미래로 온 것만 같구나. 아니. 미래인가?”
손에는 마치 권총이 들린 것 같이 천을 열고 있었다.
미몽에서 깨어나 얼굴에 꽃이 핀다.
“한글 간판이 가득하구나. 한글이…. 한글이…….”
그것만으로 능히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듯이 확신에 찬 눈빛이다.
살며시 눈을 감다가 뜨며 다시 놀란 얼굴로 바뀐다.
“저건…. 나인가?”
시나리오를 보니 환생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나와 있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구나.”
권총 쥔 손이 천을 내린다.
뒤를 돌며 말한다.
“내가 한 일이 무용하지 않았구나. 그럼 해야지.”
그 뒤로 연기가 계속되는 걸 보며 나는 시나리오의 뒤편을 빠르게 속독했다.
총으로 장교들을 죽이고 마지막은 폭탄으로 장렬히 산화한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장면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단소 대신 총과 폭탄이라…….
‘대사랑 연출이 좋네.’
한국인의 뜨거운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학생의 연기가 끝났다.
“시하야. 어때? 연기 잘해? 점수 줘 볼래?”
“아아.”
재미로 우리에게 종이를 주었다.
번호와 이름 옆에 점수를 매기는 칸이 있고 간단히 메모할 수 있게 칸을 프린트해 놓았다.
시하는 고민하더니 4를 적었다.
“10점 만점에 4점이야?”
“아냐!”
“그럼 몇 점 최고 점수인데?”
“형아 점.”
“???”
시하가 옆에 ‘ㅇㅅㅎ’를 썼다.
“이거 바드면 체고 점수야.”
그게 숫자 몇인데?
도저히 알 수 없는 점수 체계였다. 앞으로 ‘ㅇㅅㅎ’를 아라비아 숫자에 포함되는 거로?
아니면 무한대 기호처럼?
대체 4점이 높은 건지 낮은 건지.
“다음 나와 주세요. 이제 주인공은 마지막이네요.”
아무래도 주인공에 지원한 사람은 2명뿐인가 보다.
첫 번째 사람이 신입생이었던가? 분명 처음에 긴장했지만, 막상 연기에 들어가니 잘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은 더 잘했다.
듣기로는 2학년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1년 더 다닌 티가 나는 것 같다.
시하의 점수를 보니 3이라고 썼다.
어라? 나랑 좀 의견이 다르네.
“시하야. 저 사람이 점수가 더 낮네?”
“아냐. 서이 점이 더 노파.”
“4가 3보다 더 높잖아?”
“시하는 서이 점이 더 노파.”
그래. 우리 시하는 서이를 포기하지 못하지.
아무래도 [시하 점수]는 3점이 더 높은가 보다. 근데 그거 너만 알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이 보면 더 낮다고 할 수밖에 없어!
“연주는 어때?”
“흐음.”
“왜?”
“다들 잘해요. 근데 내가 더 잘할 거 같은데.”
“아, 그래?”
어마어마한 자신감이구나. 이게 바로 아메리카 스타일로 자라서 그런 건가?
“시하야.”
“아? 연주 왜?”
“너도 더 잘할 수 있지?”
“시하보다 형아가 더 잘해.”
저기요. 시하야? 그걸 왜 나에게 넘기니?
물론 우리 시하는 그런 방법은 모르고 진짜 내가 잘하는 줄 알겠지만.
그때 옆에서 신창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 혁씨도 해볼래요? 번외 느낌으로?”
“예?”
「그거 좋네!」
스미스 씨?!
“어…. 진짜요? 농담이죠?”
근데 심사위원으로 와 있는 동아리 회장부터 연출 쪽까지 눈을 빛내며 나를 보았다.
대체 왜? 다들 왜 이렇게 재밌겠다는 표정인데?
“형아. 시하 보고 시퍼!”
“연주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 연극 같은 연기 못 하는데요. 발성도 되어있지 않고.”
신창민이 푸하하 웃었다.
“그거 다들 알고 있어요. 그냥 재미로 한번 보는 거지요.”
“으음. 그럼 다른 이야기로 해도 돼요?”
“예?”
“그냥 서브 스토리로 조금 바꿔서요.”
“오오. 재밌겠는데요? 이야기 좀 해주실래요?”
“사실 이 주인공이 장교를 죽이러 떠나는 기차 안에서 한 여인과 같이 가는 거죠.”
“서로 사랑하는?”
“아니요. 서로 할 일을 하는 동지로요. 전 여인 역할도 해보려고요.”
“?!”
연주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나는 연기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내가 생각해낸 스토리를 보여주기로 했다.
책상을 위로 올리고 무대 위에 털썩 앉았다.
먼저 여주 연기.
“우리의 눈은 만년설이 아니겠소.”
절대 녹지 않고 봄이 오지 않는 만년설인지 의심하는 대사였다.
나는 자리에 일어서서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손에는 무언가 쥐고 있다.
남주 연기.
“분명히 녹을 것이오. 나는 보았소.”
가운데로 앉으며 옆으로 고개만 돌리고 다시 여주 연기.
이제는 고개 돌리는 것만으로 여주와 남주를 구분해서 보여줄 생각이었다.
“나도 보았소.”
“그랬소? 정말이오? 당신도 천 너머를 보았단 말이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거요?”
“으음?”
“내가 본 건 만년설에 피워둔 모닥불이오. 화려하게 타오르지도 못하고 꺼져가는.”
“그리 부정적이면서 담력은 대담하오. 책 두 권짜리 자료를 가지고 그리 평탄하다니.”
비밀리에 접수한 적군의 주요 인물과 기밀문서를 의미했다.
시대적 상황이 그래서인지 다들 자료가 뭔지는 어렴풋이 아는 듯했다.
여주가 말한다.
“어딨는지도 모르면서.”
“걱정 마오. 혹시 품에 숨겼어도 내 지켜줄 거이니.”
여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는다.
그리 들고 다니면 순경의 몸수색에 무조건 걸린다.
“이리 생각이 어수룩해서야.”
“뭐요?”
“그러니 화려하게 타오르려 하지. 난 조용히 타닥이겠소.”
“내가 지켜줄 필요도 없었나 보오. 그리 자신 있는가 보면.”
“서로 갈 길 갑시다. 어차피 다른 길이니.”
“종착역은 같을 거요.”
“다르던데…….”
남주는 먼 미래에 되찾은 조국을 말하고 여주는 현재를 말한다.
여주가 먼저 일어난다.
남주가 쥐고 있는 손과 여주의 펼쳐진 손은 물건의 유무를 연출한다.
여주가 말한다.
“나 먼저 내리오.”
“잘 가시오.”
“아 참. 궁금증은 풀어주고 가야지.”
나는 옆에 있는 남주가 아니라 앞에 있는 심사위원석을 보았다.
살며시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여기에 있소.”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
침묵.
심사위원은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닫고 입을 살며시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