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1화 (291/500)

291화

신창민은 바보같이 입을 헤벌렸다.

정말 이게 배우들의 오디션을 보면서 잠깐 생각한 캐릭터란 말인가?

물론 자신 역시도 만들려면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시간에 저렇게 매력적인 여성을 만들라고 하면 글쎄?

그녀의 능력도 출중하다.

스토리는 무언가 임무를 받았다. 문서 양식 같은 비밀자료를.

거기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고, 남자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자가 빈손이라는 걸 알렸다.

‘미쳤네.’

소품이 없어도 관객들에게 충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책 2권 분량의 자료는 어디에 숨겨서 들고 있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하지만 길게 끌지 않았다.

오로지 이 대사를 위해 마련해뒀다는 듯이.

[여기에 있소.]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많은 분량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머리에 담았다는 여성의 능력이 정말 매력적인 연출로 드러났다는 것!

이 여성의 과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로지 이 장면에 대한 글을 구상하고 표현했다는 것이 잘 전해졌다.

매력적이다. 그래. 정말 매력적이다.

“가사로 표현했을 때 느꼈지만 진짜 한 장면을 만드는 게 대단한 거 같아요. 물론 전체적인 흐름을 쓰는 건 모르겠지만.”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시혁은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다.

앉아있던 이시하는 앞에서 박수 대신 책상을 두드린다. 형아, 대다내! 하면서 종이에 ‘ㅇㅅㅎ’ 점수를 크게 쓴 걸 보여준다.

아무래도 서이보다 더 큰 최고점을 받은 모양이다.

신창민이 말했다.

“괜찮다면 이 장면 넣는 것도 무리 없어 보이네요. 진짜 괜찮은데요? 어차피 시나리오에 이름이 같이 올라가니까…….”

“뭐, 괜찮아요.”

“이 여주 신분이랑 과거 이력들을 잘 꾸미면 더 멋져질 거 같아요. 와, 근데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어요?”

이시혁은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그저 머릿속에 담긴 자료. 내가 지니게 된 통번역 능력과 비슷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걸 모르는 신창민은 이미 흥분 상태에 휩싸였다.

옆에 있던 연영과 교수인 스미스도 마찬가지.

「진짜 최고였습니다. 책 두 권이 머릿속에 있다니.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 머릿속에 상상되더군요. 혹시 시혁은 그런 여성이 이상형입니까?」

“…글쎄요.”

시혁은 곤란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차마 시혁의 여자 버전이라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으니까.

시하가 시혁의 다리를 잡아당기더니 귓속말하는 형태를 취했다.

시혁이 쪼그려 앉아서 귀를 대령했다.

“형아. 머시써! 여자도 머시써. 형아 가타써!”

“시하야. 쉿. 쉿. 그건 비밀이야.”

“시하 아라써. 비밀 지킬래.”

오로지 여기 있는 시하만이 알아보았다.

“저기…….”

연주가 멍하니 시혁을 바라보았다.

“응?”

“그 역할 저도 하고 싶어요! 정말 멋져요!”

아무래도 시혁의 연기에 빠진 게 아니라 여성의 캐릭터에 빠져버렸나 보다.

“하하하. 그럼 해볼래? 내가 대사 써줄까?”

“네네!”

“시하도! 시하도!”

아무래도 번외 오디션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

일단 오디션은 계속되었다.

다른 단역들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신창민은 오디션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넣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스미스 교수님이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눈 깜빡임 없이 노트북을 두다다다 치고 있는데 조금 무서울 지경이다.

뭐, 서브 스토리로 편입시키는 거니까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미 깔아놓은 캐릭터 위에 글이 춤추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

잠깐 봤는데 캐릭터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저게 진짜 재능인가?”

“허얼.”

“?”

해오름 동아리 부장이 나랑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내 말을 들었나 보다.

근데 왜 저렇게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지?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인가?

“형아. 다음 모야?”

“응. 다음 대사는 말이야.”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지만 우리는 뒤로 가서 시하와 연주에게 대사를 가르쳐주었다.

정말 여기서 연극을 해볼 생각인가 보다.

이게 짧은 것 같은데 막상 대사를 외우려고 하면 길다고 느껴진다.

연주는 꼭 해보고 싶은지 불타는 눈이다.

근데 내가 친 대사의 의미는 애들이 알고나 있을지 모르겠다.

“시하야. 화려하게 타오르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아?”

“시하 아라. 달집이야. 달집.”

그래. 이게 정상이지.

연주에게 물어볼까?

“연주는 알아?”

“남자의 멋있음이에요!”

“?”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호한 대답이다.

아니, 맞는 말인가? 모르겠다.

“근데 대사가 조금 어렵지?”

“아니요. 전 다 외웠는걸요. 짧아서 쉬워요.”

나는 연주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사실 아까부터 놀라고 있었다. 왜냐면 연주는 정말 대사를 다 외웠으니까.

뭔가 똑똑한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억력이 뛰어나다.

“형아. 시하도 다 아라.”

“정말? 그럼 마지막 대사가 뭐였지?”

“아코!”

시하가 이마를 탁 쳤다.

분명 까먹은 거겠지. 시하의 기억력은 사실 나쁘지 않다.

옆에 있는 연주가 이상할 정도로 좋은 거였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

“잘 가시오, 였잖아.”

“아아. 바이아비.”

갑자기 나지막한 분위기에서 바이바이란 대사를 쓴다고?

시하가 하는 역이면 귀엽기는 하겠다.

“시하 다 외어써!”

“정말 대단하네.”

의심스럽긴 한데 아까부터 열심히 연습했으니 얼추 기억은 할 거다.

시하의 기억력은 문장을 기억하는 것보다 풍경과 분위기, 그리고 행동을 잘 기억한다.

아무래도 관찰력이 뛰어난 편인 것 같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가?

창의력도 뛰어난 편이다.

우리 시하가 더 엄청나거든! 나 대체 뭐랑 비교하면서 어깨를 펴고 있는지.

이게 바로 나도 모르게 아이를 비교한다는 것일까?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그럼 해볼래?”

“아아!”

마침 배역도 각자가 다 정해진 모습이다.

남은 여주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아마 내일 정해질 것이다.

대본을 보고 은근히 하고 싶어 하는 동아리 멤버가 많았다.

농담으로 남자도 여주로 오디션 봐도 되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다.

“시하야. 해보자.”

연주가 시하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렇게 의욕적인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항상 한발 물러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태도를 고수했던 거 같았는데…….

“여기 앉아.”

“아아.”

시하와 연주가 무대 위에 앉았다.

내가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재밌는 이야기를 보듯이 둘을 쳐다보았다.

연주가 말한다.

“우리 눈은 만년설이 아니겠소.”

“갠차나. 갠차나. 눈 노가.”

“?”

“시하 아라.”

뭔가 대사가 틀리지만 연주는 꿋꿋이 이어갔다.

아까 연습 때도 그랬으니 이제 익숙하다.

“나도 보았소.”

“천 너머로 바써?”

“무슨 말을 하시는 거요?”

“눈 노근 거 말하는데?”

“내가 본 건 만년설에 피워둔 모닥불이오. 화려하게 타오르지도 못하고 꺼져가는.”

“대다내!”

시하는 뭔가 기억 안 나니까 애드리브가 많다.

대사 맞는 게 거의 없어!

연주는 그 애드리브를 받아주지 못하고 정직하게 대사를 한다.

그 어긋남이 너무나 웃음을 자아낸다.

다들 입술을 씰룩이고 있지만 아이들이 부끄러워할까 봐 참아주나 보다.

하지만 신창민은 글을 쓰다가 노트북에 머리를 살며시 댄 채 어깨를 들썩거린다.

참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서로 갈 길 갑시다. 어차피 다른 길이니.”

“아냐. 가치 가. 가치. 형아도 가치.”

“다르던데…….”

연주가 일어섰다.

“나 먼저 내리오.”

“아아. 바이바이.”

“아참. 궁금증은 풀어주고 가야지.”

연주가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연기를 생각보다 잘해서 놀랐다.

“여기에 있소.”

“시하는 반짝이 손에 이써. 대다나지?”

“?”

시하가 허리에 손을 얹자고 배를 쭈욱 내민포즈를 취한다.

근데 앉아있어서 가슴을 내민 것 같기도 하다.

너무 귀엽다.

다들 사람들이 푸하하 웃음을 뱉었다.

“아, 진짜 웃겨.”

“배 아파.”

“귀엽다. 귀여워.”

“반짝이 뭐냐고.”

“심지어 연주가 진지하고 잘해서 더 웃겨.”

연주는 지금 반응에 입을 삐죽였다.

자신이 상상한 건 이런 게 아니라는 듯이.

뭐 시하 때문에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하야. 대사 제대로 외웠어야지!”

“시하 다 외어써. 근데 까머거써.”

“그걸 외운 거라고 하지 않아!”

“아냐. 시하 아라. 여기에 이쏘!”

“그거 내 대사잖아!”

“먼저 내리오!”

“그것도 내 대사야!”

나는 시하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이 하는 걸 따라 외우는 경우도 있긴 하지.

내 건 생각 안 나는데 이상하게 남이 한 건 기억하는 때도 있다.

아마 시하도 그러지 않을까?

답답해하는 연주의 모습에 왠지 종수가 겹쳐 보인다.

‘흠흠. 시하에게는 악의가 없어. 연주야.’

그게 제일 나빠! 라는 마음속 대답이 들려오는 것 같다.

***

해오름에게 포스터를 주기로 했는데 과연 시하가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하야. 포스터 그릴 거야?”

“시하 그려.”

“생각은 해 뒀어?”

시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생각하기 힘들지. 그래도 아직 공연하려면 기간이 많이 남았으니 여유가 있다.

연극 포스터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 걸까?

“일단은 자료조사부터 해야겠지.”

“자료조사?”

“응. 형아도 일할 때는 자료조사를 꼭 하거든.”

번역하거나 통역하거나. 둘 다 자료조사는 필요하다.

언제나 그러한 자료 속에서 무언가가 나오니까.

“자. 연극 포스터라는 건 바로 이런 거야!”

실제 사람 사진이 있는 것과 그림 디자인을 한 것을 가리지 않고 보여주었다.

딱히 이걸 따라 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냥 참고하라는 거지.

시하가 그 의도를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포인트만 잡아주기로 했다.

물론 나도 잘 모르지만 이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인기 있어지는 것도 아니니.

“잘 봐. 포스터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어.”

“모야?”

“바로 글자 넣을 곳을 마련해두는 구도…. 으음…. 빈자리를 남겨둬. 여기 글자 넣어도 되겠는데? 하고.”

“!!!”

내가 그림을 가르쳐줄 수도 없으니 시하가 참고할 만한 부분을 짚어 주었다.

여러 그림을 보는 것보다 이런 점을 짚어 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포스터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으니 최대한 시하가 자유롭게 그림을 펼쳤으면 좋겠다.

상상을 제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만 암묵적인 규칙은 지키도록.

꽉 차 있는 그림을 그리면 글자 넣기가 참 애매해지니까.

“우웅.”

시하가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케 그리지? 어케 그릴까? 삼피, 사피야. 어케 그리까?”

고민하는 속에 성장이 있는 법이니.

딱히 부담 주고 싶지는 않다. 사실 시간 내에 못 그려도 된다.

너무 늦을 것 같으면 전화해서 못하겠다고 하면 되니까.

‘나도 참여하긴 해야 하는데.’

글자 넣는 건 시하가 할 수 없으니 오롯이 내 몫이다.

어떻게 보면 공동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형아. 생각 안 나.”

“그럴 때는 다른 재밌는 놀이나 하자. 나중에 생각해도 돼.”

“정말?”

“응. 오히려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르잖아.”

“머리에 전구 불 나와?”

“응?”

만화에 그런 게 나왔나?

머리 위에 전구가 나와서 불 들어오는 거.

“실제로는 전구가 나오지는 않아. 그건 알지?”

“시하 반짝이 나와. 전구도 나와.”

“반짝이는 어디서 나오는데?”

“손! 반짝반짝.”

언제나 손에서 반짝이가 나온다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마법 같은 건가?

어쩌면 시하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음?

생각해 보면 시하는 어머니의 능력을 물려받은 거겠지.

그런 능력이 발현되면 손에서 반짝이는 뭔가가 보이는 걸까?

내 눈에도 푸른빛이 보인다고 했는데…….

“시하야. 정확히 반짝이가 뭐야?”

“?”

“형아가 알고 싶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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