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화 (289/500)

289화

슬럼프라는 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사실 전조가 있다.

목이 살살 아프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귀신같이 다음 날 목감기로 이어지는 걸 다들 느껴봤을 거다.

하지만 창작하는 사람에게 슬럼프란 몸이 아프다는 신호나 바이러스에 옮는 게 원인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이 원인이다.

정확히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쏟아버리는 것.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 굉장히 세게 왔다고 할 수 있었다.

“후우.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는 신창민은 침대에서 뒹굴뒹굴 구르는 중이다.

저번 학기에 모든 힘을 쏟아서 쉬고 있다.

그것도 오래된 일이다.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치겠네. 진짜 슬럼프인가.”

자신이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떠오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찍 일어나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영화를 봐도 심장이 두근대지 않는다.

그런 무력감이 길어짐에 따라 괜스레 초조해지고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는 아닐까 하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으윽.”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너튜브를 켰다.

누군가는 시간 버리는 짓이다. 도피한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영감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니 뭐라도 보거나 들어야 했다.

“다 때려 부수고 싶다.”

갑자기 찾아오는 충동은 누구 하나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신창민은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달칵달칵 클릭했다.

검색창에 [다 때려 부순다], [불태워버린다] 따위의 키워드를 치기 시작한다.

보통 진짜 때려 부수는 영상이나 불타는 뉴스 같은 게 보인다.

아무거나 클릭하고 지켜보는데 참 신기한 것이 너튜브 알고리즘이다.

관련된 영상 몇몇 개가 추천으로 올라온다.

“응? 봄이 왔구려? 제목만 봤을 때 불타는 거나 때려 부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냥 그림인 거 같은데 호기심이 인다.

마우스로 클릭해본다.

영상과 자막이 나오며 노래가 들린다.

신창민은 가사를 집중해서 듣고 자막을 보았다.

달칵.

다시 돌려서 그림과 가사를 보았다.

달칵. 다시 돌리고…. 달칵. 다시 돌리…. 달칵. 다시 돌…. 달칵. 다시…. 달칵. 달칵. 달칵.

몇 번이나 돌려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와…….”

머릿속에 폭죽이 터졌다.

뭔가 홀린 듯이 댓글 창에 입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허락받아야 영상에 댓글이 올라온다고.

“아. 진짜. 대박인데. 이거.”

마른세수를 하며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까와 다르게 명료한 눈빛.

드디어 슬럼프라는 미몽에서 깨어났다.

***

꽃이 피는 3월이 왔다.

대학생들도 개강하는 때인데 이번 수강신청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강의를 별로 듣지 않아도 된다. 무슨 말이냐.

전공 학점은 이제 2학기에 한 강의만 들으면 되었고 교양도 거의 다 채웠기 때문에 4학년은 굉장히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게임 번역일은 거의 막바지였다.

애초에 일본어로만 번역해 두면 되기에 평안한 일이었고 페이도 잘 받았다.

이미 한 일이 다시 돈으로 돌아와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야 열정으로 한 일인데 미리 해둔 덕분에 돈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었다.

NM의 팀장 안현태가 말했다.

-번역 비용은 정부에서 주는 거니까 받을 수 있을 때 받는 게 좋죠! 어차피 회삿돈도 아니고 제 돈도 아닌데요.

엄지를 치켜들어 주셨다.

뭐, 양심에 살짝 찔리기는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번역도 아니었으니까.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등등으로 번역했으니 한 번에 금액이 세게 들어왔다.

원래라면 업체에서 진행해서 분배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기도 하고 NM의 계약 소속이었으니 비율로 조금 떼가기도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개인으로서 굉장히 많이 받은 편이다.

‘시즌2도 번역해 주기는 해야 하는데 말이야.’

시즌1이 생각보다 매출이 잘 나왔다고 했다.

그 돈으로 시즌2를 진행한다고 한다.

물론 시즌2부터는 정부의 지원 사업과 아무 상관이 없다.

경 트리오 셋의 생돈이 개발비로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별문제는 없겠지.’

시즌2부터는 번역 비용도 경트리오가 나에게 줘야 한다.

사실 시나리오 값까지 합치면 더 줘야 하는 건 맞는데 그 비용은 시즌2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시즌2 매출 비율 5%로 좀 떼달라고.

의외로 셋은 흔쾌히 허락했다.

나도 좋았다. 어차피 열정으로 적은 거긴 하지만 의외의 돈으로 돌아왔으니까.

물론 번역비는 당연히 받겠지만. 시나리오 비용은 예외다.

사실 그렇잖아. 처음 쓴 거기도 하고 조금 모자라 보이기도 한 작품이니.

예외적인 돈이라고 생각했다.

경트리오는 우리 차기작을 이렇게 응원하다니! 하면서 감동한 모양이지만.

어…. 그런 거 아니야…. 번역비로 빵빵하게 받을 생각뿐이었어…….

물론 이 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형아. 모해?”

시하가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형아. 밥하고 있지요. 많이 배고파?”

“시하 배에 물어볼께! 배야. 배야. 배고파? 꼬루룩 해써? 안 해써? 이상하네? 시하 배고파. 꼬루룩 안 했눈데 배고파.”

시하가 자기 배를 주물럭거리며 원으로 흔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배고프다는 말이지?

“조금만 기다려봐. 오늘 형아가 맛있는 거 했어.”

“모야?”

“김치찌개!”

“김치?”

시하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사진 찍을 때 김~치~ 하는 거 말하는 게 아니야!

“먹는 김치를 넣어서 국을 만드는 거야. 거기에 고기도 넣고 두부도 넣고.”

“파 송송!”

“응. 파 송송!”

“떡국! 떡도 너어?”

“떡국에 진심인 편이네…….”

어라? 떡 대신 김치 넣으면 김치찌개 맞지. 응. 그렇지.

사실 끓이는 방식을 봤을 때 많은 차이가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아마 먹으면 놀랄걸? 형아표 김치찌개는 진짜 맛있거든!”

사실 매운 요리는 잘 안 하는 편이다.

시하가 매운 걸 잘 먹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많이 주면 엉덩이가 불나거나 배가 아플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그런 건 조심하고 있다.

“이제 시하는 4살이니까 김치찌개 정도는 맛나게 먹지 않을까! 매운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고!”

“마자! 시하 4살이야. 매운 거 마니 머글 수 이써. 고추도 머글 수 이써.”

4살은 위대했다. 매운 고추도 먹을 수 있다니!

아무리 그래도 땡초는 피하자. 응!

“정말? 고추도 먹을 수 있어?”

“아아! 시하 다 커써.”

4살이 다 큰 거면 5살이 되면 얼마나 더 커지는 걸까?

대체 4살이란 무엇일까?

뭔가 철학적인 질문 같기도 하다.

“그럼 고추 먹을 수 있는지 오늘 확인해 봐도 돼?”

“대! 대!”

시하가 허리에 손을 하고 배를 쭈욱 내밀었다.

아주 자신만만하구만.

“알겠어. 그래서 형아가 준비했어. 엄청 큰 왕고추!”

내 손보다 좀 더 큰 오이고추를 준비했다.

이거라면 별로 맵지 않겠지.

하지만 크다는 건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강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

원래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인데 말이지.

시하는 그걸 몰랐다.

“엄청 커!”

“엄청 크지!”

“매어 보여!”

“엄청나지!”

시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허리에 있던 손이 공손히 모였다.

갑자기 오만해졌다가 예의가 발라졌는데?!

“대장 고추야. 시하 그거 머거?”

“응. 시하는 이제 4살이니까 이거 먹어야지.”

“형아도 가치?”

후후후. 나도 같이 끌어들여서 안 먹을 속셈인가 본데 소용없지.

“당연하지. 형아는 레드 형아라서 그냥 먹을 수 있는걸?”

나는 오이고추를 크게 베어 물었다.

음. 맛있네. 아삭아삭하면서 뭔가 살짝 단맛도 나는 것 같다.

싱그러움이 입안에 감돈다.

맵지 않아서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형아. 대다내!”

“하하하!”

이게 뭐라고 대단하다 하는지. 갑자기 현타가 온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니?

“오! 시하야. 김치찌개 다 됐다. 이 고추 좀 거실에 있는 식탁에 둘래?”

“아아.”

시하가 오이고추를 받고 거실로 달려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식탁 밑에 놓고 숨긴다.

아무래도 거대한 고추의 위엄에 압도당했나 보다.

나는 모른 척하고 김치찌개를 그릇에 퍼서 가져왔다.

식사를 시작했다.

“어라? 고추가 어디 갔지?”

“어디 가찌?”

시하도 모른 척 주변을 둘러본다.

주머니에 있는 다마고치를 꺼내더니.

“삐약이가 머거써? 고추도 머거?”

“푸흡. 삐약이가 먹을 리가 없잖아.”

“피피가 머거써?”

“그렇게 큰 거 못 먹는데?”

“누가 가져가찌?”

시하가 모른 척하는 걸 지켜보았다.

나는 식탁 밑을 보았다.

“아! 여기 있네!”

“차자따!”

“네가 왜 찾았다고 하냐? 시하가 숨겼지?”

“아냐. 고추가 발이 달려서 여기 숨어써.”

그런 고추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있다고 해도 너무 징그럽지 않아?

“그럼 고추 먹어볼까? 시하야?”

“시하 고추 말고 김치찌개 머고 시퍼!”

“그럼 이거 고기랑 같이 먹으면 엄청 맛있어.”

시하의 동공이 떨린다.

후후후.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그럼 김치찌개부터 먹을까?”

“아아!”

후르륵.

“마시써!”

“푸흡! 고기도 먹어. 김치랑.”

김치랑 고기를 오물오물 입에 넣는다. 그리고 밥도 한 숟가락 크게 넣었다.

볼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흐뭇하게 보다가 고추를 살짝 잘라서 다 먹고 난 뒤에 입에 쏙 넣어줬다.

“자. 고기.”

“아~”

아삭아삭.

“?”

“고추 먹었네?”

“안 매어?”

“이야. 시하 고추도 먹고 엄청나네!”

“!!!”

아삭아삭.

생각보다 안 매운지 놀란 눈치였다.

오이고추라서 그래. 나중에 어디 가서 고추 먹으면 안 된다?

시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그렇게 맛있게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 오빠!」

서수현이었다.

“왜?”

「완전 대박! 엄청난 제안이 왔어요.」

“뭔데?”

「우리 학교에 연극영화과 있잖아요. 알죠?」

“알지.”

「연영과 동아리가 있거든요. ‘해오름’이라고. 유명한데.」

“유명한 건 모르겠고 나름 알지.”

대학로에서 연극도 하면서 돈도 벌고 실력도 키우는 동아리다.

극단이라고 봐도 무방하기는 하다.

아무튼, 과동아리로 등록되어 있는데 나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재작년과 작년에 연영과 학생이 쓴 시나리오로 꽤 좋은 성적이 나왔다고 했다.

물론 재작년과 작년의 연극 내용은 똑같았다.

뭐라고 했더라? 아!

“테라피 여행…….”

「네! 그거 완전 힐링물인 줄 알고 갔다가 절절한 투병 이야기였죠.」

“희망적인 이야기 아닌가?”

「막. 긍정적으로 남은 인생 살려고 하는데 그게 뭔가 보는 입장에서 안타까워서.」

“그건 그렇지. 아, 그래서 그게 왜?”

「혹시 그거 쓴 시나리오 작가 이름 알아요?」

“아니. 모르는데?”

안타까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작가 이름보다는 작품 이름을 더 기억하는 법이다.

테라피 여행도 대학교를 걷다가 포스터로 광고하는 걸 본 것뿐이다.

재작년과 작년에 걸어둔 거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신창민이라고 있는데요. 이번에 우리가 부른 노래 있잖아요.」

“응.”

「그거로 시나리오를 써버렸는데 혹시 괜찮다면 허락해줄 수 있냐고 묻던데요?」

“응?”

「아무래도 스토리 라인이 비슷하게 가니까요.」

“이미 써놓고 허락받는 건 뭔데?”

「듣기로는 슬럼프였다가 확 하고 와 닿아서 두다다다 써버렸다는데요?」

“아, 난 또.”

당연히 허락할 줄 알고 써놓고 물어보는 건 줄 알았다.

역시 오해였던 모양이었다.

“으음.”

「물론 연극이란 게 표를 상업적으로 파는 거지만 다들 열정페이로 활동한다고 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연극이다.

사실 연극판이 어렵다고 듣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동아리 활동이니 쉽지 않은 점도 있을 것이다.

돈보다는 실력을 키우는 목적이 아니겠나.

“그럼 시나리오에 이름 좀 넣어 달라고 해줘. 허락의 표기만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오! 그거 괜찮겠다. 아! 시나리오 비용은 많이는 아니고 조금은 줄 수 있겠다고 하던데요?」

거기도 없는 돈 꺼내 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뭐 조금이라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뭐 알겠다고 해.”

「얍얍.」

어차피 대사도 없는 노래였고 줄거리도 대충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이 된다.

펭귄이 아니라 인간인 주인공이 어떻게 이야기와 배경이 추가되어서 그려질지 기대가 되었다.

「아무튼, 이 부탁은 들어주는 거로?」

“어. 뭐…. 별것도 아닌데 그러지 뭐.”

「그래도 저작권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엄청 돈 되는 것도 아니니까. 연극 잘돼서 영상 조회 수나 엄청 나오면 좋겠다.”

「아! 맞다! 부탁이 또 있었는데.」

“근데 어디서 부탁받은 거야?”

「그 사람 강인대니까 제 채널을 보고서 인맥으로 알음알음 연락한 거죠.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런 식으로?」

“아, 맞네.”

세상 참 좁네. 좁아.

“그래서 부탁이 뭔데?”

「혹시 시하페페 작가가 포스터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묻던데요? 비용은 지급하겠다고…….」

“?”

그…. 사람이 아니라 펭귄이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나 봐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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