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책은 역시 읽는 매체라지만 때로는 보는 매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림이나 동화 같은 것.
하얀 도화지 위에 선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신기한 게 선으로 굴곡을 표현하면 마치 입체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더 신기해하고 잘 그린다고 말한다.
물론 잘 그린 그림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림은 그게 끝이 아니니까.
하지만 굳이 도화지에 한정되지 않고 입체를 만들 방법도 있다.
그게 바로 팝업북.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열어보면 커다란 성이 나오고, 때로는 변신도 하며, 바람마저 일으킨다.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말이다.
“형아.”
“응? 왜? 준비 다 끝났어?”
“아냐.”
“뭐가 잘 안 돼? 펭귄 가방도 챙겼잖아.”
나는 달걀 푼 물을 동그랗게 펼친 뒤 살살 만져서 입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은 두툼한 달걀말이다.
“형아. 시하 책!”
“응? 책 읽어 달라고? 잠시만. 이것만 끝내고 읽어줄게. 아직 시간 어린이집 가려면 시간 좀 남았지?”
“아냐.”
“엥?”
오늘은 시하와 대화 수신호가 맞지 않았다.
뭐가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시하야. 정확하게 표현해야 형아가 알지.”
“형아. 시하 책. 사. 책!”
“책을 새로 사자고?”
뭐 어린이가 책을 사자는 건 부모로서 좋은 일이다.
책에 관심을 가지는 건 애가 공부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으니까.
물론 난 부모가 아니라 형이지만.
“사고 싶은 책이라도 있어?”
“아아! 종수! 책!”
“종수가 좋은 책을 가졌나…. 아! 설마 팝업북 말하는 거야? 성 튀어나오고. 그거?”
“아아! 형아. 형아. 종수 자랑.”
“종수가 엄청 자랑했나 봐?”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뭔가를 가지고 싶을 때는 별거 아니다.
장난감 가게에 들어왔을 때.
친구가 자랑했을 때.
플렉스를 하고 싶을 때.
마지막은 아닌가? 아무튼, 종수가 시하의 드문 수집욕을 자극했나 보다.
“그럼 팝업북을 많이 살까?”
“아냐. 하나!”
시하가 손가락 하나를 척 하고 들었다.
이거, 이거. 설마 돈 많이 든다고 하나만 사자는 거야?
후후후. 이래 봬도 돈을 꽤 많이 벌었다.
집을 사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청년 주택청약을 넣었기 때문에 언젠가 좋은 소식이 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걸 넣고도 돈이 꽤 있었다.
“걱정 마. 시하야. 형아가 서점 가서 싹 다 사줄게!”
“아냐. 아냐. 하나만.”
“형아 돈 많아. 걱정 마.”
달걀말이가 잘 말렸다.
두툼하게 썰어서 접시 위로 놓았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비주얼.
내가 만들었지만 참 잘 만들었다.
“아냐. 시하. 하나만. 시하가 만드러~”
“으응? 시하가 팝업북을 만든다고? 성 튀어나오고 그거?”
“아아.”
“만들어보고 싶어?”
“아아!”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설마 팝업북을 가지고 싶거나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닐 줄이야.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
아무래도 시하는 천재가 틀림없다.
벌써 프로 예술가나 다름없지.
자료 조사부터 시작해서 만들기까지.
이건 천재의 절차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지금은 주택 자금이 아니라 미대 등록금을 준비해야 할지도?
“알았어! 형아에게 맡겨. 시하가 만들고 싶은 거 다 만들자! 알았지?”
“아아!”
시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달걀말이가 점점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시하 역시도 무언가 입체적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시하의 흥미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
시하가 어린이집을 다녀온 뒤 곧바로 서점으로 향했다.
책을 하나 사기로 했지만 나는 시하를 위해 하나 더 살 생각이다.
시하가 고른 것 하나. 내가 고른 것 하나.
이렇게 두 개를 말이다.
‘책은 언제나 복불복이지.’
시하가 고른 팝업북이 별다른 참고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사를 해 봤다.
어떤 팝업북이 잘되어 있는지 말이다.
형식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다.
인기 있는 캐릭터를 고르는 게 아니라 다양하게 접히는 방식의 책을 고르는 것이다.
그래야 시하가 만들고 싶은 쪽으로 연출을 참고할 수 있으니까.
‘의외로 다양해서 신기하지?’
책을 열면 관속에 있는 사람이 나오게 한다던가.
띠지를 잡아당기면 공주님의 옷이 짠하고 변한다던가.
커다란 성이 두 번 접혀 있다던가.
생각보다 다양해서 놀랐다.
“시하야. 어떤 거 고를래? 팝업북은 이 중에 있어.”
“아아.”
시하가 신중하게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비싼 책도 많았다.
그 이유는 캐릭터값에 있었는데 저건 애니메이션 사업의 일종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시하가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고르면 돼. 알았지?”
“아아.”
시하가 열심히 보는데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없나 보다.
“형아. 페페. 업써.”
“응. 펭귄은 없네.”
“아아.”
시무룩.
왜 펭귄은 없는가.
아쉽지만 다른 걸 골라야 했다.
“아! 시하야. 여기 펭귄이 있어!”
“아?”
시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눈썹이 들썩거리는 게 기대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양.
나는 그게 귀여워 눈썹을 꼭 잡았다.
“아?”
“아하하. 미안해. 시하가 너무 흥분해서 진정하라고 잡았어. 자, 봐. 여기 펭귄 있지?”
“…….”
시하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 모습도 귀엽다.
이게 아니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보여준 건 펭귄이 아니라 캐릭터의 일종이니까.
다른 애들은 좋아하는 것 같은데 시하는 별로인가 보다.
“왜 마음에 안 들어?”
“페페 아냐.”
“어. 그래?”
“몬생겨. 페페.”
“어…. 굳이 말하자면 못생기긴 했는데…….”
뒤에서 책 정리를 하던 점원이 풋 하고 웃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머쓱한지 말을 걸어왔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거 인기는 있는데 못생기고 때리고 싶게 생겨서.”
“아, 그래요?”
“네. 그래도 인기는 좋아요. 이해는 안 되지만.”
“아하.”
“사실 전 텔렐레토비도 무서웠거든요. 애들이 아이 조아~ 하는데 목소리가 섬뜩하다고 해야 하나? 뭐만 하면 아이 조아~ 해서.”
“아하. 그러시군요.”
“이상한 느낌이 팍 들더라고요. 근데 애들은 좋아하니.”
나도 어릴 때 텔렐레토비라는 유아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보라색,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인 네 명의 텔렐레토비.
그 당시의 나는 별로 재미없다며 다른 만화를 봤었지.
“제가 좋은 팝업북 추천해 줄까요?”
“네? 아니요. 괜찮아요. 이런 건 직접 골라야 의미가 있잖아요. 다음부터는 정보 좀 알고 골라보자. 이런 경험도 되고.”
“아하.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뭐든 써봐야 알죠.”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좋을 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확률상 나도 좋을 수 있다.
그래도 책이란 게 때로는 나만이 아는 좋은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신인 작가가 신간을 내서 봤는데 그게 정말 마음에 든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아아. 형아.”
“오! 다 골랐어?”
“아아.”
“어디 보자. 늑대와 함께 춤을? 이런 동화도 있었나?”
그때 뒤에 있던 점원이 말했다.
“아! 그거! 얼마 안 찍은 책이에요. 작가가 경험 삼아 낸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시하야. 특이한 거 골랐네?”
“아아!”
이런 건 다른 서점에 가도 없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재고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책을 내면 좋을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저자 이름이 강인함? 시하야. 왠지 어린이집이랑 형아 대학교가 생각난다. 그치?”
“아? 아아!”
나는 이 책 하나와 꽤 잘 만든 책 하나를 골랐다.
“오늘은 형아가 책 읽어줄게.”
“아아!”
시하가 좋아서 책을 품에 꼬옥 안았다.
***
“형아!”
시하가 책을 나에게 건넸다.
자기 저녁 다 먹었다고 읽어 달라는 게 분명하다.
“형아. 설거지해야 하는데?”
“아냐. 책! 다음!”
“책 읽은 다음에 하라고?”
“아아.”
설거지는 바로바로 하는 게 귀찮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하의 저 간절한 눈빛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다.
“알았어. 읽자.”
나는 고무장갑을 끼다 말고 거실에 앉았다.
시하를 내 앞에 앉히고는 책을 잡았다.
“자. 그럼 펼친다?”
“아아.”
비닐을 뜯고 책의 첫 장을 펼쳤다.
먼저 늑대가 입을 벌리며 튀어나왔다.
놀랄 만도 한데 시하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입에 손가락을 찔렀다.
콕!
그대로 늑대가 접혀 들어갔다.
“형아! 들가!”
“어. 들어가네. 신기하지?”
“이케. 이케. 들가.”
“응. 여기 봐봐. 가운데 접혀 있지? 거기다 튀어나올 수 있게 그림 뒤편에도 접혀 있고.”
뭔가 글보다는 그림 위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시하가 자세히 관찰한다.
실눈을 뜨며 보고 있다.
저렇게 보면 잘 보이나? 나도 따라 해 볼까?
그렇게 우리는 실눈을 뜨며 지긋이 바라보았다.
“형아?”
“응?”
“눈!”
“왜? 눈이 이상해?”
“선이야. 선이야.”
“하하. 사실 실눈을 하면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이래. 기억해둬.”
“아아.”
나는 뭔가 쓸데없는 지식을 주입하며 책을 읽었다.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보니 늑대가 되었어요!”
“으아아악! 늑대가 되었어!”
“그때 한 마녀가 나타나 말합니다.”
“네가 다시 인간이 되려면 넌 돈을 쓴 만큼 벌어야 해! 깔깔!”
“저한테 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이건 너에게 주는 시련이야. 어딜 집에 백수로 지네!”
“집에 돈이 많을 걸 어떡하라고요!”
“그러니 게을러지지.”
여기까지 읽는 나는 뭔가 돈 많은 백수에 관한 악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뭐 게으름을 꼬집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
하여간 뭔가 특이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릴 때 시하가 내 소매를 당겼다.
“형아.”
“응. 계속 읽을게. 마녀가 사라지자 늑대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어요. 하지만 늑대는 몰랐어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때 시하가 물었다.
“왜?”
“응? 늑대는 고독하니까?”
“고독?”
“하하. 아니야. 왜 그랬는지는 모르니까 계속 읽어보자.”
나는 책을 넘겼다.
안경 쓰고 책을 크로스백처럼 메고 있는 부엉이가 나왔다.
책을 살짝 접었나 폈다 하니 날개가 파닥거린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시하랑 한 번 살펴본 후에 이야기를 계속했다.
“늑대가 물었어요.”
“똑똑한 부엉이야. 난 어떤 일을 해야 하지?”
“놀랍게도 부엉이가 대답했어요.”
“넌 늑대니 사람들이 놀라서 일을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그게 뭔데?”
“바로 춤이야! 춤을 추며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돼. 그러면 널 무서워하지 않을 거야.”
“그래! 그거야!”
책을 넘겼다.
늑대가 다리와 팔을 살짝 벌리고 있다.
책을 접었다 폈다 하니 양쪽으로 움직인다.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 돼!”
시하가 따라 했다.
“으르렁!”
뭔가 어디서 들은 노래 같지만 착각이겠지.
“그렇게 늑대는 짐승돌이 되어 티비도 나오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띠지 같은 게 있길래 시하에게 거길 잡아당기라고 말했다.
“그렇게 쓴 만큼 돈을 번 늑대는 인간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아이돌을 그만둘 수 없었어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게으른 일상보다 이렇게 일을 하고, 벌어둔 돈으로 물건을 사는 일상이 더 행복했으니까요.”
“아! 적절하게 일하면 더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아!”
“그렇게 좋은 점을 깨달은 남자는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며 살았답니다.”
“끝!”
뭔가 짧지만 좋은 이야기였다.
좋은 이야기였나? 좋은 이야기가 맞겠지?
근데 뭔가 이런 황당하면서 묘한 설정이 어떤 위화감을 일으킨다.
분명 이런 구성을 어디서 본 거 같은…….
“형아?”
“아! 시하야. 어때? 재밌었어?”
“아아! 시하도. 이거. 이거. 만드러!”
“응. 팝업북 만들자. 어떤 거 만들지는 생각해 봤어?”
“아?”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시하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시하야. 그럼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형아랑 고민해 보자.”
물론 이야기는 내가 쓸 거겠지만 그래도 게임 개발처럼 어느 정도 협업을 해야 한다.
“형아. 시하 아라.”
“응? 뭘 아는데?”
“이거야!”
시하가 내 품에서 벗어나 어딘가 도도도 달려가더니 펭귄 가방을 질질 끌고 온다.
그대로 철퍼덕 앉아서 알림장을 내게 내민다.
“아. 이거 오늘 확인 안 했는데. 여기에 시하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아!”
아무래도 뭔가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알림장을 펼쳤다.
“응?”
거기에는 하나의 행사 허락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준비물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