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렇게 발표가 끝났다.
아쉬운 마음으로 가려는데 시하가 붙잡았다.
“형아.”
“응? 왜?”
“형아. 투포!”
“으응? 형아도 투표해 달라고?”
나는 시하가 자기에게 투표해 달라는 건 줄 알았다.
이미 결과 발표가 끝났지만 나도 시하에게 스티커를 붙여줘야겠다.
“아냐.”
“응? 아니야?”
“아아. 하나. 투포해.”
“하나한테 투표하라고?”
“아아. 별. 별. 투포.”
“응. 그렇구나.”
나는 시하랑 같이 투표 판으로 갔다.
선생님에게 별 모양 스티커를 받은 다음, 하나에게 투표를 했다.
반짝이는 빨간색 별이 눈물점에 붙여져 있어서 예뻤다.
“자. 어때? 형아도 투표했지?”
“아아.”
끄덕끄덕.
역시 별 스티커를 붙이는 게 맞나 보다.
그때 뒤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혀기 오빠. 하나에게 투표해써?”
“응. 하나에게 지금 투표했어.”
“으응?”
하나가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한 걸까?
분명 시하가 말했던 대로 들어줬을 뿐인데.
“시혀기 오빠. 나중에 또 하나에게 투표해줘.”
“응?”
“하나. 케이팝 별에 나갈 거야!”
“아하. 그렇구나. 그때 내가 꼭 투표할게.”
“응!”
옆에 있던 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케이팝이 뭔지 모르는 모양.
대충 눈치를 보니 하나가 시하에게 부탁한 것 같았다.
투표해 달라고.
그런데 별이 스타라는 것만 알고 착각한 거겠지.
아무튼, 시하는 귀엽다.
이게 아니지. 시하에게 케이팝이 뭔지 알려줘야겠다.
“케이팝이 뭐냐면 우리나라 노래가 다 케이팝이라고 생각하면 돼.”
“형아. 숙자송?”
“어. 숙자송이 아니라 숫자송도 뭐 나름 케이팝이지.”
굳이 말하자면 댄스 음악이라고 하는 케이팝.
숫자송을 보면서 춤도 추니 나름 케이팝이지 않을까?
시하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이해시키기 어려울 거 같아서 그냥 한국 노래라고 말했다.
뭐 틀린 표현은 아니니까.
“저기. 시혁 씨.”
“아, 네. 선생님.”
“이제 어린이집으로 돌아가죠. 다 끝났는데.”
“그러게요. 이제 가야겠네요. 아! 시하는 저랑 집으로 돌아갈게요.”
“그러시겠어요?”
“네. 시하야. 이제 집에서 놀자.”
“아? 아아!”
그때 종수가 말했다.
“시하야. 어디가!”
“집!”
“그럼 내일은 부하다. 도망치면 안 돼!”
“아아!”
부하가 되는 건데 저렇게 해맑게 손을 흔들어도 되는 걸까?
전혀 상관없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시하야. 달릴 때도 run이라고 하지만 도망칠 때도 run이라고 쓰기도 해.”
“런?”
“응. 이건 한국어가 아니고 영어야.”
“아아! 런!”
우리는 그렇게 종수를 피해 집까지 런했다.
우승을 못 한 건 아쉽지만 다음에 더 잘할 수 있겠지.
시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 날. 어린이집.
오늘 종수는 어느 때보다 더 의기양양하다.
거의 왕이나 다름없는 하루가 될 테니까.
“하하. 다들 내 부하다.”
다른 아이들보다 아는 게 많다고 해서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드디어 승준과 시하를 이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집에서 엄마에게 칭찬을 엄청 받았다.
“자. 어디 보자.”
종수가 매의 눈으로 아이들을 훑었다.
승준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승준아.”
“어. 응.”
“여기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봐. 엣헴.”
“쳇!”
승준이 툴툴거리며 종수의 어깨를 주물렀다.
괜히 심술이 나서 꼭꼭 눌렀다.
“아악! 아파! 아파! 살살! 살살!”
“알았어.”
종수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승준이 히죽 웃었다.
오늘 하루는 부하였지만 이렇게 반항하는 것도 재밌었으니까.
종수가 살며시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나야.”
“으응?”
하나가 움찔거렸다.
뭘 시킬지 불안한 모습이었다.
“오늘 선생님에게 뭐 하고 놀 건지 물어보고 와.”
마치 ‘오늘 수업은 뭐지?’라는 물음.
사실 종수는 부하를 만들었는데 뭘 시켜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그냥 말해 보는 거다.
하나가 별거 아닌 명령을 듣고, 선생님에게 쪼르르 가서 물었다.
“선생님!”
“왜? 하나야?”
“오늘 뭐 해요?”
“후후후.”
선생님은 이 내기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내기를 함부로 하면 이렇게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된다는 걸 몸소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오늘은 바로 오이 마사지를 할 거예요!”
“오이 마사지?”
“응. 얼굴에 오이를 붙이는 거야. 피부도 매끈매끈해져서 좋아.”
“와! 하나. 예뻐져요?”
“응. 하나가 엄청 예뻐져.”
“와!”
사실 하나의 피부는 이미 꿀피부라서 할 필요가 없지만 어릴 때부터 관리가 필요한 법.
가끔 아이들의 피부가 부러울 때가 있는 유다희 선생님이었다.
‘나도 어릴 때는 저런 꿀피부였는데!’
아무튼, 다 같이 마사지를 하면 시간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
뛰어노는 아이들도 조금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놀이.
심지어 종수의 부하가 된 아이들이라서 더더욱 이 놀이가 빛을 발한다.
남이 해주는 마사지는 뭔가 대접받는 느낌이 드니까.
“선생님은 오이를 송송송 썰고 있을게. 받으러 와. 알았지?”
“응!”
하나가 또르르 달려가 종수에게 고했다.
“오이 마사지한대! 나중에 하나가 받으러 가기로 해써!”
“그래?! 그럼 너는 쉬어. 물어왔으니까. 받으러 가는 건 시하가 갔다 와.”
“아?”
시하는 오늘 형아의 왼쪽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서 깨운 걸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오른쪽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서 깨워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종수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모야?”
“응? 못 들었어?”
“아아.”
“선생님이 썰어온 오이 좀 가져와 보라고.”
“왜?”
“왜긴. 오늘 시하 네가 내 부하잖아.”
“아아.”
시하가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생님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통통통.
오이를 열심히 썰고 있는 선생님.
“샘!”
“응? 시하야. 왜?”
“오이.”
“아! 오이 가지러 왔어?”
“아아.”
“잠시만. 지금 열심히 썰고 있거든. 아니면 한 접시라도 가져갈래?”
“아아.”
선생님이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다.
시하에게 말 하나 더 가르칠 기회.
“주세요. 해야지.”
“주세!”
“요!”
“yo!”
“합쳐서 주세요!”
“주세여~”
“두 손 모아서.”
시하가 두 손 모아서 ‘주세여~’라고 했다.
조그마한 손이 꼼지락거렸는데 그게 너무 귀여웠다.
“자. 여기 있어.”
“아아!”
시하가 손을 모은 채 접시를 들게 되었다.
꽤 아슬아슬한 모양새.
“떨어뜨리면 안 된다? 꼭 잡아.”
“아아.”
시하가 이야기를 듣고 휙 하고 달려갔다.
도도도.
엉덩이를 실룩이며 종수에게 도착했다.
그때 발이 꼬여서 철푸덕 넘어졌다.
오이가 비상했다.
팔랑팔랑 날아서 종수의 얼굴에 안착.
찰싹찰싹 굵은 빗줄기를 맞는 것처럼 오이 뭉치가 종수를 덮쳤다.
“아악!”
이제 어깨 말고 다리 마사지를 받고 있던 종수에게는 이런 날벼락이 또 없었다.
승준은 시하가 오는 걸 감지하고 뒤로 굴러 몸을 피한 상태.
괜히 종수 옆에 있던 재휘는 볼에 오이가 하나가 붙었다.
하나는 그걸 보며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미남은 오이를 조아해! 자꾸자꾸 머쪄지면 나는 어떡해~”
원장은 그걸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을꼬…….
이제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조용히 오이를 줍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일어섰다.
“아아! 미아내~”
“시하 너! 너! 너!”
종수가 시하에게 삿대질을 했다.
시하는 미안해서 종수의 얼굴에 있는 오이를 떼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미끌.
하필 발에 오이가 있어서 종수 앞으로 철푸덕 넘어졌다.
“으아아악!”
“아아!”
“비켜어~~”
“아아. 미아내~”
종수는 이제 피곤한지 손을 휘저었다.
“이제 부하 끝이야. 부하 필요 없어!”
그 말에 승준이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래! 부하는 무슨! 하하하!”
부하도 정말로 충성심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종수였다.
아무리 하루 부하더라도 친구라는 위치여서 부하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피해만 봤다.
“미남은 오이를 조아해~”
“그만해…. 이제 그만…….”
종수가 허망한 눈으로 오이를 떼어서 접시에 날렸다.
시하는 그걸 보며 말했다.
“오, 이런!”
“뭐가 이런이야! 이런이!”
“오! 이! 런!”
“하아. 됐다.”
사실 시하의 눈에는 오이가 떼어지며 접시로 날아가는 게 오이가 달리는 거로 보였다.
달리는 건 영어로 run.
그래서 ‘오이, 런.’이라는 표현을 쓴 거였다.
띄어쓰기가 잘못되긴 했지만, 절대 종수를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자! 자! 다들 오이를 치워요!”
원장이 뒤늦게 중재를 하며 오이가 정리됐다.
다들 바닥을 물티슈로 슥삭슥삭 닦았다.
그리고 유다희 선생님이 오며 다시 오이 마사지가 시작됐다.
“자. 다들 가만히 누워있으세요!”
하나씩 붙여지는 오이.
다들 간지러워 시시덕 웃는다.
그렇게 위아래 없이 공평하게 오이가 놓인다.
친구들 사이에는 부하와 상사는 없는 법이다.
오늘 아이들은 그걸 알게 된 게 아닐까?
“자! 다들 오이 붙인 채 사진 한 방 찍어요!”
찰칵.
머리를 맞대고 누운 아이들의 사진이 찍힌다.
장난꾸러기 승준은 얼굴에 붙인 오이가 입에 들어가 있다.
하나는 오이를 붙인 채 손가락 하트.
종수는 입을 쭈욱 내민 채 불만 어린 표정.
재휘는 이제 안심이라는 듯 눈을 감고 씨익 웃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하는 얼굴에 붙인 타원형 오이를 브이 자로 만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시하의 그림. 픽시브 업로드.
[제목 : bro(형제)]
1. 형아 펭귄이 아기 펭귄과 함께 이불을 덮어주며 잠을 재우는 그림.
2. 형아 펭귄이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그림.
3. 형아 펭귄이 노트북을 치는 그림.
4. 형아 펭귄이 모자, 황금 목걸이를 쓰고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 그림.
[좋아요] [하트] [퍼가기] […]
[siha.pepe.] [작품 목록]
#4cuttoon #bro
[댓글]
-시하페페!! 너무 오랜만이야~
-사랑해요! 시하페페!!
오랜만에 업로드된 시하페페의 그림에 사람들의 [좋아요]와 [하트]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따뜻한 그림인걸?
-힐링하고 갑니다.
-그런데 무슨 뜻이야?
-그림 그대로가 아니까? 제목도 형제잖아!
-맞아. 형이 동생도 돌보고, 열심히 일도 하고, 결국 성공하는 거지.
-해피엔딩이네!
사람들이 흐뭇하게 그림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색채를 나타난 게 너무 좋았다.
-펭귄은 사실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거 같아. 시하페페가 원래 그러잖아.
-그치. 기승전결인 이야기인가 봐. 저 펭귄 형제 너무 좋다!
그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해석가가 존재했으니.
-쯧쯧쯧. 아직도 이 정도 수준이야? 내가 그렇게 해석해 줬는데도?!
-아니. 또 뭔데? 뭐길래?
-참. 다들 일차원적인 생각에서 못 벗어나요.
-솔직히 이건 일차원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봐봐. 해시태그도 적다고.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가 있지 않아.
실제로 더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시혁은 있는 그대로 형제의 그림을 올렸다.
그저 일상적이고 평온한 4컷 만화였다.
하지만 해석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쯧쯧. 진정한 예술은 ‘설명’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고! 이번 시하페페의 4컷툰은 보여주는 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지!
그런 거 없다.
-그래? 대체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해석이나 해 줘!
-먼저 저 제목! bro. 이건 형제를 말하는 걸 수도 있지만, 친구를 뜻하기도 하지. 한마디로 흑인 영어를 나타내는 거야.
-아. 그거 나도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 힌트는 또 네 번째 그림에 있어! 저 모자와 황금 목걸이를 봐! 래퍼의 상징 아니겠어! 결국, 흑인을 의인화한 거지!
-?!?!
그런 상징은 아니고 그저 형아의 멋진 모습을 소품을 이용해 표현했을 뿐이다.
-자! 펭귄인 이유는 여기에 있지! 펭귄은 결국 추운 곳에 살아. 그 말은 추위에 떠는 역사를 말하는 게 첫 번째 그림.
그냥 잠을 재우는 것뿐이다.
-두 번째! 흑인 인권 운동 중 하나! 1955년 12월 4일! 버스 보이콧! 흑인 운전기사를 고용할 것!
그런 거 아니고 그냥 형아가 운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 번째! 노트북으로 평범하게 일하는 모습으로 인권이 상승했다는 것!
그냥 형아가 일하는 모습을 그렸을 뿐.
-마지막으로! 대표적인 성공을 래퍼로 표현하며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지!
-?!?!
-그렇기에 제목은 bro. 우리는 모두 위아래가 아닌! 차별 없는 ‘친구’라는 범세계적인 표현으로 마무리한 거야! 정말 여러 의미가 담겨있어!
-진짜 그럴듯한데?
-그럴듯한 게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준 거야! 정말 실력이 너무 늘었어! 이런 따뜻한 그림과 메시지라니!
그런 범세계적인 메시지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이런 메시지를 계속 담긴다면 나중에는 정말 유명해질 것 같아! 난 그때가 너무 기대돼! 10년이 걸릴까? 아니면 20년?! 세계 유명인사가 될지도 몰라!
착각이다.
세계를 상대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오늘도 착각의 늪이 깊숙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