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500)

46화

맬포이가 얼굴을 풀고 시치미를 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에이. 왜 그러세요. 같은 선수끼리.」

나는 맬포이가 온 순간부터 너무 의심스러웠다.

물론 한국에 와야 할 시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데려다주는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그래서 찔러봤는데 살짝 굳은 얼굴에서 감이 왔다.

‘그래. 딱 이 시기쯤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니콜드의 말에 의하면 진짜 작업을 할 사람 빼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대책은 마련했다고.

그렇다면 산업 스파이가 할 행동은 역시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오는 직감이었다.

이 모든 게 다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보자.

나는 뒤에 있는 알리사를 가리켰다.

「뒤에 있는 사람 보이시죠?」

「네.」

「마르스 기업의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알리사라고 해요.」

「네?」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얼굴을 하세요. 그래서 거짓말은 잘하겠어요? 얼마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저도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아시죠? 저에게 시하가 있다는 거.」

「압니다.」

「그래요. 그럼. 일단 차에 타고 이야기 나눠요.」

나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타며 시하를 안았다.

맬포이의 표정을 보니 뭔가 긴가민가한 모양이었다.

내 말을 자연스럽게 받은 시점에서 맬포이는 산업 스파이였다.

부릉.

차가 출발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백미러로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게 보였는데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자연스럽게 니콜드와는 통화를 했고.’

나는 주머니에 있는 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느 기업에서 바보 같이 스파이를 한 명만 심을까요. 감시 역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게 시혁입니까?」

「아니요. 여기 있잖아요. 자연스럽게 제 친구로 온 감시 역.」

내가 턱짓으로 알리사를 가리켰다.

알리사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잘하고 있는지 죽 쑤고 있는지 저희도 알아야 하니까요. 아, 너무 배신감 느끼지 마세요. 저희도 안전핀 하나는 달아야 하니까. 이해하시죠? 한두 푼을 주는 건 아니니까.」

「이해합니다.」

아주 술술 부는구나.

그나저나 알리사가 연기를 잘하네.

딱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도도한 비서 느낌이었다.

알리사가 말했다.

「이번에 세미나에서 먼저 발표해 기를 죽이는 작전이었는데 대처가 꽤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전략기획실에서 한 번 더 보내 버리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번에 저희가 유사한 패턴을 만든 걸 역으로 뒤집어씌우는 거죠.」

알리사의 입가가 비틀어 올렸다.

「역으로 현장에서 우리를 표절하고 있다고 말할 겁니다. 새로운 디자인을 통해서 말이죠.」

「아!」

맬포이가 놀라며 입을 벌렸다.

「설마 그런 식으로 한 번 더 물을 먹일 줄이야. 생각도 못 했습니다.」

뭘 놀래. 그런 거 없어.

그나저나 알리사치고는 꽤 세밀한 설정이었다.

나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인데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니, 진짜 통할 거 같기도 한데?

그나저나 맬포이가 우리 얘기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쯧쯧. 우리에게 사기당하는 건 줄도 모르고.

나는 맬포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는 시하 때문이라고 쳐도 맬포이는 뭐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됐나요?」

「아, 저 말입니까? 저도 애들 때문이죠.」

본의 아니게 내가 맬포이의 의심을 한층 덜었나 보다.

「애들이요?」

「네. 사실 제가 빚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애들을 더 나은 환경에 키우려면 돈이 더 많아야 해요.」

「아, 그렇구나.」

「시혁도 알지 않습니까? 부모가 부유해야 애들도 돈 걱정 없이 크는 법이죠. 시켜줄 것도 많고요. 하하.」

애들은 원래 돈 걱정 안 한다.

부모가 돈 걱정을 하지. 맬포이는 부모라는 핑계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맬포이가 이어 말했다.

「나만 좋자고 이 일을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비니스 기업에서 주는 월급도 상당할 텐데 꽤 큰 결심을 했네요.」

「더 많은 돈과 일자리까지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얼마 받으셨는데요?」

「20만 달러에 연봉 인상이죠.」

20만 달러라면 약 2억 4천 정도.

얼마나 갖다 바쳤길래 그 정도 돈을 주나 싶었다.

이 사람 간도 크네.

「엄청 받으시네요. 저도 좀 더 달라고 해 볼까요?」

「하하. 옆에 한번 요구해 보시죠.」

「그럴까요?」

나는 알리사를 보았다.

알리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혹시 화가 났나?

「맬포이. 계약에 관해서는 비밀유지 조항이 있었을 텐데요? 입이 너무 가벼우시군요. 제가 이래서 당신을 감시하러 나간 겁니다.」

「아, 그게….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화난 게 아니라 연기였다.

진짜 산타클로스도 선물을 주지 않을 정도의 거짓말이었다.

아니, 산타도 속아서 선물을 주지 않을까?

그 정도로 알리사는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맬포이 미안해요.」

「하하.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혼자만 오래 비밀을 끌어안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말을 많이 했나 봅니다.」

뒤가 구린 짓을 하니 그렇지.

「그럴 수 있죠. 저도 이야기해서 좋았어요.」

「그럼 다행입니다. 사실 오늘 어떤 디자인을 했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네요. 그런 작전이었으니. 안심입니다.」

어느새 차는 집 근처의 지하철역까지 도착해 있었다.

나는 내리기 전에 맬포이의 등을 보았다.

「맬포이. 그거 알아요? 아이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큰데요. 그러니 맬포이도 좋은 아버지가 되길 바랄게요.」

「하하. 든든한 등만 보여야겠군요. 앞은 잘 안 보여주고요.」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시하의 입이 열렸다.

“서럽, 매포이.”

갑작스러운 말에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shut up’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형아.”

나는 시하의 눈을 보았다.

시무룩.

그 모습을 보고 시하가 말하는 걸 해석할 수 있었다.

분명 전하는 뜻은 이거였을 것이다.

서럽(다). 맬포이(때문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뭔가 맬포이에게 한 방 먹여준 거 같아서.

「맬포이. 한국말로 서럽다는 말이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제가 맬포이랑 많이 이야기하고 자기랑 놀아주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아, 정말 놀랐습니다. 오해 안 합니다. 하하.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제가 괜히 형을 뺏어서 미안하네요.」

「그럼 저희는 갈 때가 있어서 여기서 헤어지죠. 태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알리사가 맬포이를 보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아주 도도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연기를 끝까지 유지할 셈이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맬포이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하야. 이제 형아가 많이 놀아줄게.”

“아아.”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머니에 폰을 꺼냈다.

「니콜드. 이제 알아서 하시겠죠?」

「하하…. 감사합니다. 시혁. 스파이까지 잡았네요.」

「어느 정도는 의심하지 않았나요?」

「뭐, 그렇긴 하죠. 맬포이뿐만 아니라 몇몇이 더 있어서 그렇지만.」

「그럼 처리는 거기서 알아서 하시죠.」

「법무팀에서 잘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나는 통화를 종료하고 알리사를 보았다.

“연기를 엄청 잘하던데요?”

“말했잖아요. 산타가 선물 안 줄 정도라고.”

“정말이었네요. 소름 돋았어요.”

그때 시하가 내 다리를 잡고 머리를 콩콩 부딪쳤다.

“형아~”

“아, 미안해. 이제 시하랑만 이야기할게.”

“아아.”

나는 시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사실 최고의 활약상은 시하가 아닐까?

“최고였어. 시하야.”

“아아.”

시하는 정말 귀엽다.

***

-패션 페어&섬유박람회 당일.

행사장에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기자, 섬유 관계 바이어, 통역사, 패션 디자이너, 모델, 섬유산업연합회 회장, 인도면직물 수출 진흥회 회장 등.

참가하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개막식 폭죽이 터지면서 그 시작을 알렸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어색한 옷을 고쳐 입었다.

“시하야. 형아 어때?”

“아아.”

“멋있어?”

“머시써.”

“시하도 오늘 멋있어.”

하비니스 기업에서 만든 옷을 입었는데 영 어색하다.

헨리넥 셔츠에 슬랙스를 입었는데 뭔가 단정한 느낌이 나면서 젊은 사람의 감각이 살아있었다.

20, 30대의 남성이 좋아할 패션이었다.

“시하야. 너도 옷 마음에 들어?”

“아아.”

시하 역시도 나와 같은 옷을 입었다.

일하는 거니 알리사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니콜드가 같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어린애들의 민감한 피부에도 문제없는 느낌을 연출해 주고 싶다나?

뭐 그래도 종일 같이 있을 수 없으니 알리사에게 부탁하기는 했다.

옆에 있던 알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시혁. 시하. 오늘 둘 다 멋져요!”

“그래요? 그런데 전 왜 이렇게 어색하죠?”

“잘 좀 챙겨 입어요. 시하만 챙기지 말고요. 꾸미면 더 멋진데 안 꾸미는 건 인류의 낭비예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제 친구가 가르쳐줬는걸요?”

“설마 수현이?”

“Yes!”

그렇구나. 다 서수현에게 배웠구나.

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비유는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형아.”

“응?”

“저거.”

나는 시하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행사장에는 정말 많은 부스가 있었고 옷들도 다양했다.

그게 시하의 눈길을 사로잡았나 보다.

“구경 가고 싶어?”

“아아.”

“음. 세미나 시작 전 아직 시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잠깐 구경할까?”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여러 군데를 구경했다.

먼저 간 곳은 우리나라 전통 한복이 있는 곳이었다.

색이 너무 고와서 시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선택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알리사가 더 눈에 불을 켜고 원단을 만져보고 있었다.

“이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 진짜 부드러울 것 같아요. 시하야. 만져봐.”

“아아.”

“부드럽지?”

“아아. 리사. 부두.”

“흐흥~”

나도 시하의 손을 잡고 한번 만져보았다.

정말 부드러운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시하도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응? 아. 시하야. 얼굴을 그렇게 하면 안 돼. 죄송합니다.”

부스를 지키고 있던 관계자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호호. 괜찮아요. 아이가 이렇게 좋아해 주니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관심을 가지는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실제로 시하가 귀여운지 다들 옆에서 원단을 만져보고 있었다.

충분히 만졌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가자. 시하야.”

“아아. 바이바이.”

우리는 다른 멀리 가지 않게 다른 곳을 둘러본 다음 세미나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니콜드가 손을 흔들었다.

「시혁. 우리 발표 잘 보세요. 이제 시작입니다.」

「한 방 먹여줘야죠. 하하. 그런데 스파이는 어떻게 됐어요?」

「하하. 제대로 잡아서 그쪽에 거짓 정보를 흘렸죠. 아마 눈치 못 챘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네. 아, 혹시 그거 써도 됩니까?」

「그거요?」

「네. 시혁이 픽시브에 올린 것 말입니다.」

「아, 그거요?」

「그 글귀가 좋아서 마지막에 써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넣었는데 원하지 않으면 삭제도 가능합니다.」

「사실 저야 상관없죠. 그런데 조금 부끄럽기는 하네요. 하하.」

「하하. 왜요?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

이번에 그린 시하의 그림 하나만 올리기 그래서 글귀를 쓴 것뿐이었다.

그때는 뭔가 감성에 젖어 있어서 쓴 건데…….

「뭐, 포장을 잘해 주세요.」

「걱정 마시죠.」

잠시 후.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시나리오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마르스 기업이 자신감 있게 먼저 출시한 작품을 소개했고, 다들 감탄을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니콜드가 단상에 올랐다.

“시하야. 니콜드야.”

“아아.”

시하도 뭔가 기대가 되는지 눈을 반짝였다.

니콜드가 입을 열었다.

「따라 하는 건 쉽지만 감성은 복사할 수 없습니다. 저희 하비니스의 브랜드가 그를 증명합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저 말은 마르스 기업을 향해 한 말이었다.

‘멋지네.’

마르스 기업의 관계자라면 얼굴을 구기고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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