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500)

47화

니콜드가 피피티를 넘겼다.

「패션을 선도한다. 이건 어느 기업이라도 어려운 일이지요. 언제나 들었던 진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는 않겠습니다.」

화면이 넘어가고 나오는 것은 이번에 시하의 그림 패턴과 알리사의 디자인으로 만든 옷이었다.

「하지만 클라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있죠. 저희 하비니스가 그렇습니다. 그 감성을 얼마든지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죠. 바로 이렇게!」

세련된 옷들의 사진들이 나왔다.

앞, 뒤, 옆. 그런 사진들이 나오며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이 보였다.

한눈에 사로잡은 디자인을 중심으로 그 안에 들어 있는 섬유 기술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발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각으로 사로잡았어.’

먼저 화려함을 보여주고 거기에 어떤 효용이 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먼저 눈으로 사로잡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옷이라더라도 팔리는 게 많지 않다.

여기 있는 대다수는 얼마나 팔리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은데?”

“확실히 디자인에 하비니스 감성이 살아있구만.”

“이 감성에 먹혀 하비니스를 산다니까.”

“이번에 단단히 준비했는데?”

“그런데 단가가 좀 셀 것 같지 않아?”

“비싸더라도 사는 게 사람이야. 그리고 확실히 저 섬유 기술은 유용하지. 패션뿐만 아니라.”

“흐음. 그렇긴 해.”

기술 이야기도 좋고.

아무래도 반응이 좋았다.

사실 뭐 팔아봐야 아는 거지만 말이다.

그때 옆에 있던 하비니스 관계자 한 명이 나를 불렀다.

「저기. 잠깐만 앞에 나오면 안 될까? 시하랑 같이.」

「네?」

「발표 때 딱 모델로 나오면 좋잖아.」

「뭐 상관은 없어요.」

「고마워.」

앞에 있던 니콜드가 말했다.

「그럼 실제 옷을 입은 사람을 볼까요? 저희가 만든 섬유는 피부에 민감한 아기들에게도 확실히 안전합니다. 애들을 키워 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제로 영유아 때 피부가 민감해 기저귀 대신 천으로 하는 애들도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효과적이거든요.」

니콜드가 손짓하자 나는 시하를 품에 안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시하야. 옷 자랑하러 가자.”

“아아.”

자리 위에 올라가자 니콜드가 물었다.

「옷은 어떤가요?」

「굉장히 좋네요.」

「혹시 아기에게도 물어볼 수 있나요?」

「네.」

나는 시하를 보았다.

“시하야. 옷 어때? 편해? 까칠하지는 않고?”

“부드러~”

시하가 옷을 들고 얼굴을 비볐다.

배가 공개되었는데 괜찮은 모양이었다.

정말 귀엽다. 이게 아니지.

나는 재빨리 시하의 배를 감췄다.

“본의 아닌 노출에 죄송합니다.”

다들 그 모습에 웃음꽃이 피었다.

시하를 귀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니콜드의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형아~”

“시하야. 잘했어. 잘했어.”

나는 시하와 볼을 비볐다.

발표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피피티 화면이 넘어가고 마지막에 나온 화면은 시하가 그린 그림과 내가 적은 글귀였다.

검은 배경에 노란 달이 있다.

촘촘히 밝힌 별이 빛나고 그 밑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천.

그리고 그 천이 접히듯이 있는 붉은 철쭉이 피어 있었다.

옷에 있는 단순화된 패턴도 패턴이지만 포토샵으로 만든 높은 퀄리티의 그림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와. 그림이 너무 예쁘다.”

“붉은 천이 접혀 꽃을 형상화한 그림이라.”

“섬유와 패턴을 단번에 나타낸 거네.”

전혀 아니다.

그냥 철쭉의 전설을 엮어서 그렸을 뿐이다.

나도 천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시하가 노리고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저건 시인가?”

[금색으로 수놓은 달과 은빛으로 물들인 별.

애달픈 빛은 어우러지지 못하고.

같은 하늘 위에 붉은빛을 흘리니.

가엽게 여긴 무채색 꽃이 빛을 한데 모아.

고이고이 접은 뒤 꽃잎에 담아서.

풀리지 않는 매듭을 엮어.

꽃을 피우네.]

[철쭉-시하페페]

내 이름을 올리기 민망해서 일단 시하페페라고 쓰긴 했는데 뭔가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앞에 있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들렸다.

“으음? 무슨 뜻이지?”

“하하. 일만 하지 말고 시 좀 읽으시죠. 의인법 아닙니까.”

“그건 나도 알아.”

“제가 봤을 때 사랑 이야기죠. 달과 별이 사랑하는 겁니다.”

“오호. 그렇네? 그러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죠. 저 붉은빛은 피를 말하는 겁니다.”

나는 주변의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실제 전설의 이야기도 그랬으니까.

제대로 전해졌구나!

“그럼 저 무채색 꽃은 뭔데?”

“그거야말로 요즘 애들의 사상이 있는 겁니다!”

“그래?”

“이른바 삼각관계라는 겁니다.”

“어?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가?”

“어우러지지 못하게 막은 게 무채색 꽃이라는 거죠. 가지지 못할 바에는 죽여서라도 가지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겠죠.”

아니다. 그런 뜻이 절대 아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앞에 있는 사람이 해석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 풀리지 않는 관을 묶어서 자기가 가지는 거죠. 그렇게 마지막에 꽃과 사랑을 꽃피운 겁니다.”

“그런 무서운 의미였다니…….”

절대 그런 해석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세미나 도중이었기에 입만 뻥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질문을 하던 사람이 의문을 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붉은빛은 저 별과 달이 만들어낸 빛이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둘 중의 하나의 빛을 가져야지. 아무래도 자네 해석이 틀린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틀린 해석이니까 오류가 날 수밖에 없다.

앞에 있는 사람이 뭘 좀 아는 거 같다.

“후후.”

“왜 그러는가?”

앞에 있는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굉장히 자신 있는 행동이었다.

“한 사람만 사랑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

“둘 다 갖고 싶었던 거겠죠.”

“!!!”

나는 그 해석에 머리가 하얘졌다.

이 사람 일상생활이 가능한가?

그때 세미나의 마무리되는 니콜드의 발표가 귓가를 때렸다.

「이 정도 감성은 있어야 패션을 선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하비니스 부스에 방문해 주십시오.」

발표는 마무리되었다.

“형아. 가자.”

“응. 그래. 가자.”

그런데 저런 감성은 어떤 패션을 입을까?

적어도 선도하는 감성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통역사의 일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참가한 나라는 다양했는데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이 있었다.

이번 행사에 얼마나 많은 거래가 오고 갈지 모른다.

그래도 제발 한국인이 왔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했다.

내가 맡은 역할이 한국어, 영어를 번역해서 전해 주는 거니까.

“시하야. 알리사 누나랑 잘 놀고 있어. 알았지?”

“아아.”

“알리사. 시하 잘 부탁해요.”

“네. 저만 믿으세요.”

알리사는 빨리 몸을 움직이고 싶은 눈치였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구경할 곳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시하야. 형아 금방 일하고 올게.”

“아아.”

나는 시하를 떠나보냈다.

통역사의 일은 기다리는 경우가 많구나?

엄청나게 바이어랑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때 통역 요청이 들어왔다.

세미나가 빛을 발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하하. 계약하러 왔지요. 혹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시죠.”

대기하고 있던 니콜드가 왔다.

지금부터 협상의 시작이었다.

인자하게 생긴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패턴이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업체는 주문 제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샘플을 제작할 때 어려운 게 핏을 맞추는 거라는 걸 잘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저희는 한국에서 손님들의 데이터를 통해 1cm로 줄인 광목가봉 옷 패턴을 만들었습니다.”

광목은 원단이고, 가봉은 봉제하기 전에 미리 바느질해서 체형에 잘 맞는지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시군요. 그래서 저희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이걸 저희 한국 고객에 맞춰서 패턴화를 시킨 뒤에 소량 주문 제작 형태로 이번 하비니스 기업의 디자인을 제작해보는 건 어떨지에 대해 제안하는 겁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자기들의 패턴 기술과 합작을 하자는 제안.

그냥 섬유 팔고 옷도 입점하자는 통역을 할 줄 알았는데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그대로 니콜드에게 전하자 굉장히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니콜드와 세세하게 거래 내용이 오갔다.

“확실히 퀄리티를 위해서 주문 제작을 하는 방향도 괜찮아 보입니다.”

“네. 대량 생산도 가능하지만 이런 핏을 중요시하는 패션피플에게는 맞춤 제작이 좋죠.”

니콜드와 바이어가 계약을 나눴다.

둘 다 만족스러운 거래를 나눠서 기분이 좋았다.

나도 도움이 된 걸까?

“통역사가 한국인이니까 더 친근하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의외로 한국인인 게 먹혀들어 갔나 보다.

하긴 한국인이라서 말과 뜻이 제대로 전달되니까.

그가 떠난 뒤에도 많은 바이어가 찾아왔다.

정말 세미나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인도에서 온 바이어가 나를 가리키며 인사를 했다.

“Hello.”

「네. 안녕하세요.」

「강당에서 정말 좋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데 정말 따뜻해 보였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그 아기는 제 동생이에요.」

「오! 상당히 어린 동생이군요. 전 아빠와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하하.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어떻게 오셨나요?」

「하비니스 부스에서 얼마나 좋은 옷이 있는지 구경 왔습니다. 듣고 싶기도 하고요.」

「아! 그러세요? 그럼 인도어를 할 줄 아는 통역사를…….」

「아니요. 저는 앞에 계신 통역사가 마음에 드는군요. 영어로 하셔도 됩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나는 참 특이한 바이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니콜드가 소리쳤다.

「어?! 혹시 인도면직물 수출 진흥위원회 우즈왈 회장 아닙니까?!」

우즈왈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설마 부스까지 이렇게 돌아다닐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여기 온 인도 사람 중에 가장 실권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번 한국 섬유산업회와 MOU를 체결하러 온 거로 알고 있는데…….

‘설마?’

나는 뒤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인을 보았다.

오프닝에 봤던 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이 있었다.

다 끌고 왔나 보네.

나는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우즈왈이 말했다.

「소개 안 해줄 건가요?」

「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부스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부스를 소개하는 건 비즈니스 통역사의 역할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관없겠지.

「먼저 테마는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친환경 소재, IT와 테크놀로지 소재, 로컬문화를 위한 패턴과 컬러 기반의 소재, 트랜디한 소재.」

「그럼 당신이 입었던 옷이나 화면에 나온 꽃 패턴은 트랜디한 소재인가 보군요?」

「맞습니다. 사실 세미나에서 설명했던 것들이 여기 이렇게 다 있는 거죠.」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저렇게 느긋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면 저건 문화적인 특성이었다.

인도는 시간관념이 느슨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일주일 이내’라고 말하면 한 2달 이내라고 해석해야 했다.

‘근데 이런 건 또 어디서 나온 지식이지? 통역사의 지식인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지식은 익숙해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지금 우즈왈이 제일 관심 있는 거…….’

패션이 아니라 섬유일 것이다.

애초에 한국과 MOU 체결을 하러 온 이유가 섬유 발전을 위한 기술정보 공유니까.

그렇다면.

「이걸 먼저 자세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테크놀로지 소재.

주변 움직임을 보니 시간은 그렇게 없을 것 같다.

「의료 쪽에도 많이 쓰일 수 있는 초박막코팅이 된 섬유 소재 기술입니다.」

그렇게 내 설명이 이어져 갔다.

그리고.

“형아~”

어느새 돌아온 시하가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그러다 손에 있던 코코아가 살짝 쏟았다.

나는 뒷주머니에 있는 물티슈를 꺼냈다.

「회장님. 환자복이나 의료기술자들도 이런 섬유로 만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동생도 피부 문제에 민감하지만 이렇게 멀쩡하거든요.」

스윽.

나는 물티슈로 묻어 있는 것을 단번에 닦아내었다.

섬유가 좋아서 그런지 옷에 얼룩이 지지 않았다.

「이런 오염 물질도 단번에 씻겨 내려가죠.」

「오!」

「위생 문제가 더 좋은 기술로 바꿔 나갔으면 하네요.」

회장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계약을 체결할지도 모르겠다.

뒤에 있던 니콜드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는 완벽한 일 처리에 시하를 안아 올렸다.

그때 시하가 니콜드를 보며 검지와 엄지를 말았다.

‘어…. 그거 내가 니콜드에게 돈을 더 달라할 때 했던 시그널인데…….’

그걸 본 니콜드가 허탈하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역시 형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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