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사건은 하나의 뉴스로 인해 일어났다.
[…마르스 기업이 패션 페어&섬유박람회에 참여하기 전에 새로운 패션을 공개했다.
다채로운 꽃무늬 옷으로 S/S 코디를 한층 상쾌하게 꾸밀 수 있을 듯하다.
천연 소재인 한지를 이용한 스트라이프 패턴을 변칙적으로 이용한 브이넥 티셔츠도……]
기사로 보면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하비니스 기업으로서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어디서 본 패턴과 무늬들이 눈에 밟힌 것이다.
천연 소재 쪽은 다르지만 그걸 가지고 교묘하게 가린 표절이었다.
이런 경우 소송도 힘들었고, 이번 패션 페어&섬유박람회의 참가도 끝나 있을 것이다.
현재 니콜드는 복장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연결된 영상통화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노골적입니다. 아니, 이렇게 견제를 하다니요.”
“대책을 마련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심지어 발표도 마르스 기업이 먼저 하지 않습니까?”
“대책은 어떻게 마련하죠? 지금 패턴을 바꿀 시간이 없습니다. 디자이너를 쥐어짜고 다시 옷만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데요.”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니콜드 역시 분통이 터졌다.
“까다롭게 고르고 고른 겁니다. 하아.”
“어떻게든 이른 시일에 해 봐야죠. 아니면 그 옷만 빼던가.”
“그게 말이 됩니까. 그걸 어떻게 뺍니까. 이번에 소개하려고 준비한 옷인데요.”
“섬유 소재야 안 뺏긴다고 하더라도 결국 디자인으로 제일 먼저 사로잡는 거 아닙니까. 바이어들도 선도하는 패션과 기술을 원하는 거죠.”
“그걸 누가 모릅니까. 끄응. 일단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내일 안에 해결을 봅시다.”
영상통화가 끝난 니콜드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옷 디자인 하나쯤이야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노골적인 공격에 당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고,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게 하는 것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번 건 정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골치 아프네.”
니콜드가 일어나서 전화를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을 관계자들에게 연락해서 수습해야 했다.
알 필요가 있는 사람 몇몇 사람에게 통화를 한 후 시혁에게 연락을 넣었다.
사정을 이야기한 후에 바이어의 발표에서 빼야 할 부분을 말했다.
“아직 정리가 다 안 되어서 말이죠. 아마 나머지 얘기는 만나서 합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네요. 혹시 제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고민해 드릴게요.」
“하하. 마음만으로 괜찮습니다. 그럼 만나서 이야기하죠.”
통화를 끊은 니콜드가 한숨을 쉬었다.
***
이틀 뒤.
나는 시하를 데리고 니콜드와 만났다.
아무래도 사건이 터지고 나서 힘들었는지 핼쑥해져 있었다.
얼굴에 피곤한 티가 너무 많이 나서 안쓰러웠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자료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셔야 할 거 같아서…. 추가된 부분이 있을 겁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설명을 조금 드려야 할 거 같은데…….」
나는 니콜드와 대화를 나눴다.
옆에 있던 시하는 얌전히 그림을 그렸다.
그리는 건 철쭉과 달과 별이었다.
간단히 그린 그림이었지만 색감이 아주 좋았다.
「니콜드. 디자이너에게 부탁은 했습니까?」
「일단 하긴 했는데 마음에 드는 패턴이 없습니다. 기술 문제 아니라 예술의 문제니 더욱 골치 아프네요.」
「그건 유명 디자이너겠죠?」
「그렇죠. 단기간에 해결하기 힘든 일일 텐데…….」
「많이 골치 아프시겠네요. 혹시 이런 패턴형식은 공장에서 제조할 때 단가가 많이 들까요?」
나도 혹시 몰라 조금 생각을 해 봤다.
이번에 하는 경험은 그저 통역사로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파는 사람 입장에서 하나의 팀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뭡니까?」
「일단 제가 아는 알리사라는 디자이너에게 받은 디자인이에요.」
「오! 제대로네요. 원단의 단면과 조화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설계도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마 만들어봐야 알겠지만, 하비니스 원단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되어있을 겁니다.」
실제로 알리사가 내게 도움을 많이 줬다.
그래서인지 여러 자료도 많이 공유되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
니콜드는 이 패턴이 마음에 들었을까?
「그건 여기서 보완해 나가면 되는 건데 흐음. 디자인은 괜찮은데 무늬 패턴이 조금 아쉽군요.」
「별로인가요?」
「별로라기보다는 저희 하비니스에게 나올 룩이 아니라고 할까요?」
「룩이라…….」
패션에 룩이란 굉장히 모호한 표현이었다.
그냥 보이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패션은 언제나 변화하고 트렌드를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여러 안목이 종합적으로 합쳐진 느낌의 총체라고 굳이 설명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 사진가, 캐스팅 디렉터, 아트 디렉터, 바이어 등등.
마치 빅테이터처럼 원하는 ‘룩’이 존재하는 것이다.
「알리사 무늬 패턴은 조금 그런가요?」
「으음. 하비니스 기업의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이건 디자이너가 못했다기보다는 안목의 영역에 맞지 않는 거라…. 그래서 아쉽네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중에 시하가 나를 불렀다.
“형아.”
“응? 시하야. 왜 그래?”
“아아. 이거.”
시하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색도 다 칠했는지 예쁜 철쭉이 패드 위에 피어 있었다.
“우와. 진짜 색칠 잘했네?”
“아아.”
“역시 자연에서 직접 봐서 그런지 생생해. 꽃향기도 나는 것 같은데?”
“아아.”
시하도 기분이 좋은지 패드를 마구 흔들었다.
갑자기 시하랑 말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니콜드를 신경 쓰지 못했다.
「아! 니콜드. 미안해요.」
「…….」
니콜드에게 답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시하가 그린 철쭉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니콜드?」
「아! 시혁. 뭐라고 하셨죠?」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니콜드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가 들뜬 모습이었다.
「시혁.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 맙소사! 하하. 이렇게 찾게 되네요!」
「네?」
「여기 알리사의 디자인과 시하의 저 꽃 패턴이 조화를 이루지 않습니까? 상의는 시하가 쓴 꽃 패턴으로 포인트를 주고 하의는 거기 맞는 데님바지로 색을 배치하는 거죠.」
나는 상상을 해 봤다.
패션에 중요한 기본 중의 하나는 컬러매치였다.
무채색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
아니면 패턴에 있는 색과 비슷한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거나, 가방으로 꾸밀 수 있다.
그건 저쪽이 전문이니 알아서 할 거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건 하나였다.
나는 시하를 무릎에 앉혔다.
「니콜드. 시하가 그린 패턴이 마음에 드나요?」
「물론이죠. 색도 좋아서 이 정도 농도면 저희가 뽑아내기 적당합니다.」
「그렇단 말이죠?」
「네.」
나는 살며시 웃었다.
「설마 공짜는 아니겠죠? 아무리 아이더라도 이런 디자인을 보여줬는데 말이죠. 저희 시하가 요즘에 자동차에 꽂혔거든요.」
카니멀 자동차. 할인가 받아서 2만 원밖에 하지 않았다.
「하하! 얼마쯤 생각하십니까?」
「우승한 레이싱카 하나에 20만 원 하던데요. 설마 하나 살 돈만 주시겠어요?」
「너무한 거 아닙니까. 동생을 이렇게 거래에…….」
나는 살며시 웃었다.
「요즘 조기교육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우리 시하는 천재라서 벌써 돈을 벌게 되네요.」
「…….」
「급할 때 프리미엄은 더 붙지 않나요?」
「지독합니다. 하하. 근데 마냥 싫지만은 않군요.」
「아, 맞다. 그리고 비밀로 철저히 해서 발표 전에 짜잔, 하고 보여주자고요.」
「그래야겠죠. 유출한 놈이 누군지 몰라도 말이죠.」
「진짜 몰라요?」
「글쎄요.」
니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모르려나?
표절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견제구가 어디서 나온 출처인지 명백했다.
산업 스파이.
뭐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
“시하야.”
“아아.”
“네 그림이 전시장에 걸리게 생겼어! 우리 시하 본격적으로 데뷔하겠네?”
“아아.”
“나중에 시하 그림이 막 10억에 팔리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아.”
시하는 내가 뭐 때문에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기뻐하니 시하도 기뻐했다.
살며시 시하가 웃었다.
“어? 아, 이거 사진 찍어야 하는데!”
“아아!”
내가 빨리 폰을 꺼내자 시하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쉽게도 또 포토 찬스를 놓쳤다.
그런 모습을 본 니콜드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 갖고 나중에 그림이 10억에 팔리는 건 비약이 아닌가?」
「어? 니콜드. 한국말 알아들어요?」
「그림과 10억은 알아들었습니다.」
그 두 개로 대충 때려 맞추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셨다.
「그럼 우리 준비할까요? 아, 맞다. 디자이너의 허락도 받고, 계약도 하셔야죠.」
「그렇군요.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계약하시죠.」
이렇게 우리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
계약서를 작성한 알리사가 얼떨떨한 눈을 했다.
“시혁. 내 얼굴 좀 꼬집어봐 주세요.”
나는 거절하지 않고 힘차게 꼬집었다.
“아아아!! 아파요!”
“아픔을 느끼려고 꼬집어 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아니거든요?”
“어때요? 이렇게 처음 디자이너로 이름을 내게 생겼는데?”
“수많은 디자이너 중의 하나가 된 거 아닐까요? 아니면 아예 묻히거나?”
“그래도 거기 출발선까지 못 선 사람도 많죠.”
“하지만 시하의 그림 패턴이 들어가서 저 혼자만으로 해낸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에이. 칭찬 엄청 받으시던데…. 저랑 같이 공장을 공부한 보람이 있죠?”
“그거 없었으면 실무도 모르는 디자인이 될 뻔했죠. 거기에 맞는 디자인 패턴을 짠 거니까요.”
“그거면 됐죠. 하고 싶은 좋은 경험이잖아요.”
“이제 빨리 만들어서 입혀보고 수정해 봐야죠. 정말 빠듯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나는 고개를 돌려 시하를 보았다.
“시하야.”
“아아.”
시하는 새로 산 카니멀 자동차에 푹 빠져 있었다.
이번에는 기린 모양이었는데 이게 은근 희귀했다.
“기린 마음에 들어?”
“아아. 페페.”
“엥? 페페는 펭귄 아니야?”
“페페.”
“설마 페페가 더 좋다고?”
“아아.”
끄덕끄덕.
좋아하는 건 같은데 아무래도 최애 장난감은 페페였던 것 같다.
아쉽게 됐네. 희귀한 기린 자동차야.
옆에 있던 알리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하랑 마찬가지로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흐흥~”
혼자서만 한 게 아닌 것 같다고 했으면서 역시 기분은 좋은가 보다.
하긴 이런 경험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래도 하비니스의 라이벌 회사인 마르스 기업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걷고 있는데 바로 앞에 검은 세단이 지나가며 차를 세웠다.
‘뭐지?’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알리사.”
“네?”
“혹시 연기 잘해요?”
“제가 너무 잘해서 어릴 때 산타가 선물을 안 주더라고요.”
나는 알리사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 문이 열리며 어디서 본 얼굴이 나타났다.
하비니스 기업의 관계자였다.
통역을 준비하면서 하비니스 관계자와 종종 소통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름이 분명 맬포이였나?’
맬포이가 나를 불렀다.
「시혁. 여기 있었습니까?」
「언제 한국에 왔어요?」
「얼마 안 됐습니다. 하하. 타시죠.」
「네?」
「집으로 가시는 길 아닙니까? 하하.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아하. 고맙네요. 그럼 실례할게요.」
「하하. 어서 타시죠.」
나는 차 문을 열다가 맬포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맬포이.」
「네?」
「마르스 기업에서 얼마나 받으셨어요?」
맬포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살며시 웃었다.
「저도 좀 관심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