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둘은 빌린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여관에 도착했다.
메이벨 여관. 마력석 광산 광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작은 여인숙이었다.
발레리는 카운터에서 투숙을 신청한 뒤 벽시계를 흘끗 봤다.
아직 자정이 되려면 한 시간은 남았다.
모든 걸 말해야 한다.
피어스가 오기 전에.
두 여인은 주인의 안내에 따라 3층 구석의 한 객실에 들어섰다.
프리다는 볼품없는 낡은 가구들을 쭉 둘러보더니, 욕실에 들어가 대충 몸을 씻고 나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은 뒤, 본인이 벗어놓은 셔츠를 손에 들고 유심히 살폈다.
‘흠…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옷인데. 마기가 왜 느껴졌을까.’
생각해 보니 요즘 옷가지는 켄드릭이 아니라 보조 집사인 마법사 게일이 가져다주고 있었다.
게일이 무슨 마법 전공이더라.
프리다는 그의 이력서에 쓰여 있던 학적사항을 되짚어봤다.
관심이 없으니 잘 떠오르질 않았다.
털썩.
프리다는 삐걱대는 침대 위에 앉았다. 온몸이 노곤했지만, 잠을 청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문득 발레리 쪽을 봤다. 발레리는 아직도 개나리 화관을 쓴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떨면서.
까만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혹시 나 때문일까. 프리다는 걱정스레 운을 뗐다.
“…음, 발레리, 내가 아까 취해서 말을 막 한 것 같아 미안해요. 오빠 얘기한 거 너무 부담스러웠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요즘 희망에 가득 차 있어서 그래요. 여행 갔다 무사히 돌아오면 발레리랑 이것저것 할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 별생각을….”
“황녀님.”
발레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프리다의 앞으로 다가와, 나무 바닥 위에 차례차례 두 무릎을 꿇었다. 개나리 화관도 벗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응? 왜 또 무릎을 꿇고 그래요. 갑자기 그러면 나 겁나는데….”
“…지금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할게요.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응, 알았어요.”
아무 영문을 모르는 프리다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
발레리는 숨을 단전까지 들이마신 뒤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황녀의 짙푸른 눈동자를 직시하면서.
이번엔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하리라.
더 이상 면전에서 당신을 기만하지 않으리라.
“전 황녀님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한 사람이에요.”
“…계획?”
“그러기 위해 모든 걸 속였어요. 제 이름, 제 신분, 그리고… 제 직업을요.”
프리다는 갸웃거리며 발레리를 내려다봤다. 대뜸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도적이에요. 황녀님을 데리고 오라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황궁 병사로 입대한 거예요.”
“…도적? 누가 날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요?”
발레리의 설명이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던 건지, 프리다는 아직 아무런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도적은 뭐고 의뢰라는 건 또 뭔지.
프리다는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어느 때보다도 결연한 표정인 발레리가, 지금 제게 무엇을 고백하려 하는지.
“네. 황녀님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그 의뢰인이에요. 제게 황녀님을 데리고 오라고 했고, 또 황실의 보검도 가져오라고 했어요.”
“나를 데려오고… 황실의 보검을 가져오라고 했다고요? 아, 그래서 내 보검을 가지고 나온 거예요? 건국기념관에서?”
“네.”
프리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너무 많은 양의 충격적인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는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야 한다는 걸 프리다는 알았다. 일단 궁금한 것부터 차근차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이름을 속였다면, 진짜 이름은 뭐예요?”
“이름은 아시는 대로 발레리예요. 성은 없어요. 로빈슨은… 가짜 신분이고요.”
“흐음, 나를 그 사람에게 데려가고, 그 보검도 그 사람한테 건네준다고 쳐요. 그렇게 해서 발레리가 얻는 건 뭐죠?”
“…마력석이요. 저희 도적단은 위험에 처해 있어요. 현상 수배 중이고, 귀족들의 표적이거든요. 벌써 절반은… 살해당했고. 남은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하려고 해요. 그 자금이 필요해서….”
구차하고 궁색했다.
입 밖으로 꺼내니까 더 그랬다.
단원들의 목숨은 물론 소중하다. 이미 많은 이들이 처참히 스러져 갔다. 남은 이들을 지켜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 가족과도 다름없는 동료들이니까.
그 이유로 눈앞의 황녀를 무참히 저버리고 있었다.
이 사람도 내겐 더없이 소중한 사람인데. 그 앞에서 대놓고 말하고 있다. 내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널 팔아넘기려 한다고.
“그러니까 발레리는, 도적단 소속인데. 쫓기는 동료들을 해외로 탈출시키려고, 그런 의뢰를 받아서. 지금 하고 있는 거네요?”
프리다는 딱딱 끊기는 어투로 발레리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네.”
발레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수긍하는 것밖엔 더 붙일 말이 없다.
내가 무슨 도적단에 소속됐는지. 그 도적단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그 도적단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무래도 그런 건 황녀님께 중요하지 않겠지.
말해봤자 그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니까.
“아, 그래서 그런 소원을 말했구나. 나랑 같이 외출하자고. 난 또, 나랑 즐거운 시간 보내려는 줄 알았지.”
프리다는 순진했던 제 과거를 자조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피가 잘 잡히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이, 제 숨은 의도를 술술 털어놓고 있는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쨌든 프리다는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하아, 발레리. 그래서 그 의뢰인이 누군데요?”
프리다는 해외 망명에 대해선 잘 몰랐다.
하지만 외국 정부에 신상보호를 요구하려면 적지 않은 금액이 필요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걸 마력석으로 지불하려면 꽤 많은 양일 것이다.
‘그만한 마력석을 선뜻 내줄 수 있으면서, 나를 원하고, 또 내 보검을 원하는 사람.’
프리다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퍼즐은 이미 다 맞춰졌다.
‘사람이 아니었네.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어.’
프리다의 질문에 대답을 준비하는 발레리는 다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 정말 죄송하지만…. 하아… 그게 누군지 몰라요.”
“…모른다니? 그게 말이 돼요?”
“정말 이름도 모르고 생긴 것도 몰라요. 그저… 맹세 하나만 받았을 뿐이에요. 황녀님을 해치지 않겠다는 피의 맹세요. 시에나 여신의 징표까지 받았어요.”
의뢰인의 맹세 징표는 피어스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 오니까, 황녀에게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피의 맹세? 그 사람이 그걸 했다고요? 시에나 여신 앞에서?”
“네. 황녀님을 해치면 곧바로 심장이 멈추게 된다고 했어요.”
프리다는 턱을 매만졌다.
하긴, 마왕은 여신을 직접 받드는 집행관이다. 피의 맹세를 한다면 그 징표는 여신에게서 직접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녀를 해치지 않겠다는 피의 맹세는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오벨론은 섭리 상 살아 있는 사람을 해칠 수도 없다.
눈속임용 미끼였을까. 발레리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그래서 발레리가 나한테 원하는 건. 그 의뢰인한테 가자, 내 보검도 그쪽에 넘겨라, 이거겠죠? 내가 아는 발레리 성격상, 아무것도 모르는 날 데리고 거기 가긴 찔려서 말한 걸 테고요.”
“…어려우시겠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상한 사람한테 가는 건.”
발레리는 통감했다.
본인은 설득에 하나도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만약 본인이 황녀의 입장이라도 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믿고 따르던 친구의 부탁이라 할지라도.
절망스러웠다.
난 왜 스스로 이런 구렁텅이를 파고 들어와서, 황녀님까지 이곳에 끌어들이고 있는 걸까.
비탄에 빠져 있던 도중, 양어깨에 황녀의 손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발레리는 고개를 들어 프리다를 보았다.
프리다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얼굴이었다. 방금의 폭로를 들은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발레리, 잘 들어요.”
“…네.”
“나, 그 의뢰인 누군지 알고 있어요.”
“네? 황녀님이 그걸 어떻게… 누군데요?”
발레리의 놀란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프리다는 묘하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내 정혼자요.”
“정…혼자? 황녀님께 정혼자가 있다고요?”
***
프리다는 그때부터 털어놓았다. 발레리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제 사연을.
사실 내게 여행 같은 건 없어요.
이번 달 말에, 나는 여행이 아니라 와이어 숲에 가는 거예요.
지하세계에 있는 누군가의 아내, 아내라고 하니까 좀 웃기다.
난 내가 제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 조상 중에 한 명이, 마력석 광산을 대가로 나를 팔았어요.
크세니아와의 전쟁에서 이기려고, 마왕과 계약을 맺은 거죠. 마력석 광산을 받고 추후에 태어날 황녀를 넘기기로.
그리고 백여 년이 지나서 내가 태어난 거예요.
그 계약대로라면 나는…. 그 작자한테 시집가서, 지하세계에 꼼짝없이 묶여 살아야 해요.
국력의 근원인 광산을 지키고, 칼레바니아 땅 전체가 암흑에 덮이는 걸 피하려면요.
원래대로라면 스무 살 때 시집갔어야 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갖은 수를 써서 5년 동안 시간을 벌었어요.
그동안 행여나 마왕의 수하들이 잡으러 올까 봐, 석실이라는 성소에 갇혀 지냈던 거고요. 이전에 집행관 하나가 내 침실에 침입한 적이 있기도 했어서….
아무튼 내가 숨어 지내면서 검술 수련을 왜 했는지 궁금했을 거예요.
신탁이 내려왔어요. 재작년 여신 축일에.
엘로이스의 보검으로 마왕의 목을 칠 사람이 이미 황실에 태어났다고 하더라고요.
희망이었어요. 그 망할 놈의 혼약을 깨뜨리고, 날 구해낼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니까.
오빠는 당연히 그게 본인인 줄 알고, 보검을 잡았어요. 하지만 그 보검은 저주받은 거라—그걸 잡은 발레리가 왜 멀쩡한지는 모르겠지만—오른손에 영구 화상을 입었고요.
아버지는 신전에 바로 이의를 제기했어요. 왜 보검의 주인이 테렌스가 아니냐고. 자기는 맹세코 혼외자가 없다고.
사제 셀레스틴은 이렇게 답했대요.
당신 슬하에 자식이 테렌스뿐이냐고.
결국 남은 건 나였죠. 아무도 상상 못 했던 일이었어요. 나는…. 잡아본 칼이라곤 빵칼하고 고기 칼밖에 없으니까. 오빠처럼 뛰어난 검사가 아니니까.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미래도 없는 거 손 하나 잃으면 어때, 이 심정으로 보검을 잡았어요.
신기했어요. 내가 잡으니까 그 오래된 보검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새것처럼 변하는 거예요.
마왕비가 될 처지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던 거죠.
그래서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던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검술을 가장한, 누군가를 끝장내는 방법을요.
와이어 숲에 가는 건, 지하세계에서 그와 결혼식을 가장한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고요.
3월 31일이 결혼식 날이거든요.
기사 열한 명과 마법사 열 명, 사제 네 명이 혼인 사절단으로 나와 동행할 예정이에요. 그중에는 켄드릭도 있고요.
그 사람들은 아마 응원밖에 할 게 없겠지만요.
지하세계의 존재들을 상처 입힐 수 있는 무기는, 내 보검뿐이니까요.
인간계의 무기나 마법 공격은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아요.
만약에 내가 마왕을 물리친다면.
아마 자유를 얻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예요.
와이어 숲에서 실종된 모든 사람들이 거기 구금된 걸로 추정되거든요.
켄드릭이 나와 동행하는 것도 그 이유고요.
그리고 아마도….
마왕이 발레리에게 그런 의뢰를 준 건…. 일종의 보험이었을 거예요.
내가 마지막까지 숲에 등장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보검과 나.
그게 마왕 오벨론의 목적이니까요.
마력석이야 뭐, 지하세계에 널리고 널렸다는 물질이고.
이제 좀 의문이 풀렸나요?
나를 훔치러 온 도적, 발레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