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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38)화 (138/173)

138화


황녀가 이야기를 마쳤다. 

“그… 그러니까.”

발레리는 말을 더듬었다. 프리다의 말을 듣는 동안 그녀는 얼굴의 혈색이 모두 빠져 있었다.

제 귀에 들어온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엔 너무 비현실성이 컸다.

“제 의뢰인이… 그… 아… 마왕이라는 말씀이세요?”

“응. 그런 의뢰를 할 사람은 마왕 오벨론밖에 없어요. 지하세계 최고 집행관 말이에요.”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발레리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내가….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두목이 의뢰인이 누군지 말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나.

괴로워하는 발레리를 지켜보며, 프리다는 담담한 어조로 제 심경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많이 놀랐고, 실망했고, 화도 나요. 다른 누구도 아닌 발레리가 나한테 그런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게. 검술 선생으로 들어온 것도…, 다 계획된 거였나요?”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건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된….”

발레리는 변명을 늘어놓으려다 단념했다. 어차피 믿어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이.

발레리는 굳은살투성이인 두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내가 내 손으로….

황녀님을….

그래서 의뢰인이 그랬던 거였어. 황녀가 황궁으로 돌아가는 건 자유겠지만 그 결과를 알고 있으니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나라 전체가 암흑에 잠겨버린다니.

머릿속에 파편처럼 떠돌던 단서들이 조금씩 얼개가 맞춰지고 있었다.

발레리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땅을 짚고 고개를 떨궜다.

갓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거친 나무 바닥을 방울방울 적셨다.

발레리는 속으로 외쳤다.

원망의 화살은 두목 피어스에게로 향했다.

두목.

고작 이거예요?

이 사람이랑 보검을 마왕한테 제물로 바치고, 우리끼리 외국 나가서 잘 먹고 잘살자고 그랬던 거야?

황녀님이 지하세계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데, 마왕이 황녀님을 해치지 않는 게 의미가 있어?

하아, 이제 그만하죠, 우리.

그렇게 오랫동안 자유롭게 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절반이 죽었잖아.

우리 도적단, 죄짓고 산 거 맞잖아.

귀족들이 아무리 부정하게 쌓은 재물일지라도, 우리가 훔친 건 맞잖아.

그거 죄 맞아요.

누군가의 분노를 낳고, 원한을 샀잖아.

차라리 그냥 다 자수하자.

우리가 뭘 잘했다고 망명을 가요.

우리 사람 죽인 적도 없잖아요. 그 지랄 같은 귀족들 털끝도 안 건드렸고…. 그 인간들이 부정하게 수탈한 재물 훔쳐서, 원주인한테 돌려준 거. 그것뿐이잖아.

그래, 두목이 정의라고 말하는 그 일.

그거 해서 우리 몫으로 떨어진 것도 별로 없잖아.

체포돼서 재판까지 가더라도 사형까진 안 받겠지.

두목, 미안해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하나도 안 미안해.

난 황녀님 데리고 거기 못 가요.

망명? 안 가.

난 그냥 이 나라에서… 내가 지은 죗값 받을래.

프리다는 우는 발레리를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쿰쿰한 냄새가 나는 여관 침대의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결혼 사절단이랑 가든, 발레리랑 가든, 난 어차피 마왕 앞에 가게 돼 있었구나. 어쩌면 지금 가서 결판 짓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보검도 가지고 나왔으니까.’

“발레리, 고개 들어요.”

프리다가 낭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발레리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차마 황녀의 눈은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앞장서요. 거기 갈 테니까.”

“네?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예요. 지하세계 말이에요. 이왕 온 김에 마왕 무찌르고 오죠, 뭐.”

발레리는 얼이 빠졌다. 지금 황녀는 무슨 소릴 하는 걸까.

당장 제 발로 마왕 앞에 가겠다고? 이렇게 아무런 계획도 없이? 결혼식을 명목으로 한 출정 일도 따로 잡혀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발레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굴에 붙어 있던 눈물방울이 이곳저곳에 튀었다.

“아뇨, 황녀님. 얼른 짐 챙기세요.”

“…짐은 왜요? 보검만 들고 가면 되는데.”

“아뇨,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셔야죠.”

프리다는 기가 찼다.

근 일 년을 그렇게 공을 들여 날 꾀어 나온 사람이다. 확실한 목적을 이야기해 놓고, 갑자기 이렇게 태세를 전환하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발레리, 장난해요? 나 의뢰인 앞에 데려가려고 여기 온 거 아니었어요?”

“그건 의뢰인이 누군지 모를 때 했던 말이죠. 황녀님, 거기는 계획하신 날에 사절단이랑 같이 가세요. 지금 갔다간 어떻게 될지—”

말을 하던 발레리의 눈이 확 벌어졌다.

화르륵.

황녀가 입은 옷에서 돌연 붉은빛이 나기 시작하면서다. 마치 불에 타고 있는 것처럼.

프리다도 깜짝 놀랐다.

입은 옷에서만 빛이 나는 게 아니었다. 아까 벗어둔 셔츠와 석실에서 챙겨 가지고 나온 보따리 자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뭐지.

뭘까.

그제야 프리다는 떠올렸다.

최근 옷가지를 가져다준 마법사 게일의 전공이 무엇이었는지.

추적 마법.

“발레리.”

“네?”

“도망가요.”

“…네?”

“도망가라고. 빨리! 곧 들이닥칠 거예요. 내 옷에….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콰쾅!

마침 아래층에서 문을 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객실 수색이 시작된 듯했다. 거센 발소리도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내 말 안 들려요? 도망가라고! 빨리 저 창문으로 뛰어내리든지 해! 이러다간 잡혀간다고요!”

프리다는 발레리의 어깨를 흔들며 악을 썼다.

하지만 발레리는 바닥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쿵쿵거리는 무거운 발소리. 남자들의 낮은 말소리. 모든 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 올 게 왔구나. 발레리는 초연한 얼굴로 모든 게 들이닥치길 기다렸다.

쾅!

굉음과 함께 낡은 나무 문이 떨어져 나갔다.

문을 부수고 침입한 사람은….

켄드릭이었다.

“…발레리, 너 정말….”

그의 뒤엔 문지기 기사 아홉 명이 우르르 몰려 서 있었다. 모두 가슴 부분에 미스릴을 부착한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기사들을 비집고 마법사 게일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든 지팡이 끝에서 붉은빛이 나오고 있었다. 황녀의 옷에서 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빛깔이었다.

추적 마법을 쓰고 있는 듯했다.

“…하아, 여기 계셨네요, 황녀님. 하도 멀리 계셔서 마력석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수색을 위해 출동한 문지기들은 잠시 얼어붙어 있었다.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른 황녀의 앞에, 한때 검술 스승이었던 발레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침묵은 잠시였다. 곧 기사들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카랑.

검이 뽑혔다.

발레리의 목에 아홉 개의 칼날이 드리워졌다. 그녀가 곁에 놓아둔 개나리 화관은 기사들의 발에 짓밟혀 형체 없이 으스러졌다.

기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켄드릭만이 검 자루를 쥔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으, 발레리! 도망가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요! 경들, 걔 빨리 놔줘요. 이건 내 명령이야. 칼 빨리 안 거둬? 쟤 아무런 잘못 없어. 나는 내 발로 직접 걸어 나온 거라고요!”

프리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기사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분명 황제는 이렇게 명령했었다.

—납치범, 혹은 유괴범과 같이 있을 거야. 그자를 꼭 체포해 와라.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그 유괴범이라는 자가 황녀의 검술 스승 아가씨였을 줄이야.

게다가 황녀는 이자를 놔주라고 한다.

“황녀 전하, 폐하께선 이자가 유괴범이라고 하셨습니다. 꼭 체포해 오라고 하셨는데….”

“아니, 절대 안 돼. 발레리는 내 명령으로 나랑 외출했을 뿐이에요. 내가 데리고 나온 거라고!”

프리다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기사들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상반되는 두 가지 명령이 있다면, 더 높은 쪽이 내린 명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으니.

누군가의 칼끝이 발레리의 목에 살짝 그어졌다. 표피가 찢어져 피가 한 방울 흘렀다. 그러나 따가움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

발레리는 울먹이는 황녀를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황녀님.

왜 내 편을 드세요.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빤히 아시면서.

발레리는 덤덤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들어 올렸다.

기사들은 멈칫했다.

“뭐 하세요, 기사님들. 수갑 채우고 잡아가셔야죠. 저 유괴범 맞아요. 저기, 게일 마법사님 뭐 하세요. 얼른 황녀님 모시고 황궁으로 가세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나오는 거지. 게일과 기사들은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분명 황제 폐하는 이자가 유괴범이라고 했었는데.

왜 황녀를 황궁으로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며, 왜 자진해서 수갑을 채우라 하는지.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발레리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발레리는 포박된 채 기사들에게 이끌려 나갔다. 단 한 마디의 저항도 없이.

문간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켄드릭을, 발레리는 소리 없이 지나쳤다.

그와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던 것처럼.

펠런 두목 피어스는 기사들이 온통 헤집어 놓은 메이벨 여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근 풀숲에 몸을 숨긴 채.

도착하자마자 황궁 기사들을 발견한 터라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는 손에 땀을 쥐고 입구를 바라봤다.

황녀와 발레리가 아직은 이곳에 오지 않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수색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환한 백금발을 한 소년이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발레리가 수갑을 찬 채, 기사 두 명 사이에 끼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아, 안 돼….”

피어스는 풀덤불 안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무게에 짓눌려 나뭇가지들이 투두둑,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밝은 밤하늘 아래, 발레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평온했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마치 가야 할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피어스가 목격한 그 백금발 소년은….

황녀 프리다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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