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프리다는 발레리와 함께 잡화점을 실컷 구경했다.
다리가 아파질 즈음, 둘은 강가가 보이는 술집 테라스에 자리 잡고 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다. 고소한 견과류와 질긴 건어물이 안주였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프리다는 좋아서 입이 째졌다.
“캬…! 이 목 넘김 너무 좋다. 발레리, 우리 오늘 어디서 묵어요?”
“에버렛 강 건너서 숲을 지나야 해요.”
“헤헤, 그럼 우리 배 타요?”
“네. 그래야죠. 건너가서 말도 빌리고요. 말 탈 줄 아시죠?”
“응, 그럼요! 5년 만에 타는 거라 잘 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좋다…!”
프리다는 신이 났는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기지개를 켜는 동작 같았다.
발레리는 말없이 강 너머 숲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짙은 풀냄새가 실려 있었다.
희미하게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그곳은 이제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죽은 단원들의 장례식도 언젠간 치러 주어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모든 게 끝나면. 내게 주어진 임무가 무사히 끝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단원들과 함께 외국에서 새 출발을 한다 한들….
웃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웃으면서 살 자격이나 있을까.
“발레리…. 무슨 생각 해요?”
프리다는 잔에 남은 맥주를 모두 털어 마신 뒤 맞은편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황궁을 떠나온 뒤부터 발레리는 좀체 편해 보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괜히 혼자만 신나 있는 것 같아서 프리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 그냥 있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아뇨,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프리다의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며, 발레리는 억지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걸 모를 프리다가 아니었다. 지난 열 달 동안 지켜본 발레리는 희로애락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엄청 심란해 보이는데….”
“황녀님. 저 정말 괜찮아요.”
프리다는 두 손을 테이블 너머로 뻗어 발레리의 손을 잡았다.
“발레리, 정말 고마워요. 날 위해서…. 나 즐거우라고. 나 좋은 추억 남겨 주자고 이렇게 몰래 데리고 나와준 거잖아. 황궁에 돌아가고 나서가 걱정되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가 발레리 불이익 받지 않게 아버지한테 잘 이야기할게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말이었다.
발레리는 그렇게 이타적인 목적으로 황녀를 데리고 나온 게 아니었다.
황궁에 돌아간 이후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군 복무는 끝났다. 황녀를 바래다주고 나면 황궁에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안 그러셔도 돼요. 이만 일어나실까요?”
발레리가 프리다 앞에 놓인 빈 잔을 보며 물었다.
황녀의 순수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생선 가시를 삼킨 것처럼 목 안이 따갑고 쓰렸다. 그래서 술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쪽배를 타고 에버렛 강을 건넜다.
배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강폭이 좁고, 유속이 느렸고, 날씨도 맑았다. 다리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었다.
까만 하늘은 우유를 두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뿌연 별빛이 한가득이었다.
그 빛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물 위에서 발레리는 천천히 노를 저었다.
맞은편에 앉은 프리다는 방금 강가에서 딴 꽃과 풀을 가지고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둘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프리다의 집중하는 모습을, 발레리는 힐끔힐끔 몰래 훔쳐보았다. 짧은 백금발이 별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아직도 프리다는 모른다. 발레리가 왜 자신을 데리고 나왔는지.
누군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던 말은, 아무래도 까맣게 잊은 것 같다.
바깥에 나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럽고 행복해서.
발레리는 까만 눈동자 한가운데 황녀의 모습을 담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황녀를 의뢰인 앞에 데려간다면.
그건….
유괴다.
사람을 속여서 꾀어내는 것이다. 목적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애먼 곳으로 데려가는 행위니까.
‘…이게 납치하고 다를 게 있을까.’
함께 외출하자면서, 정체불명의 의뢰인 앞에 데려다 놓는 것.
이게 날 전적으로 믿어 주는 사람한테 할 짓인가.
혼신을 다해 억눌러온 양심이 또다시 꿈틀거렸다.
발레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프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프리다는 발그레한 볼에 한가득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발레리도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처럼 침울한 모습을 내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퍼펑! 펑! 퍼퍼펑!
느닷없이 들려온 폭발음에 발레리와 프리다는 급히 서쪽 하늘을 쳐다봤다.
불꽃놀이였다.
튤립과 개나리, 유채, 수선화….
노랗고 빨간 봄꽃 형상의 폭죽이 밝은 밤하늘 위를 화려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프리다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입을 헤 벌렸다.
“와아… 너무 예쁘다….”
발레리는 하늘에서 눈을 뗐다.
이맘때쯤 후작령의 마법사 연합은 봄맞이 불꽃 축제를 했다. 발레리에겐 매년 보던 광경이라 큰 감흥은 없었다.
차라리 프리다의 감탄 어린 얼굴을 바라보는 편이 더 마음이 동했다.
“발레리, 나 살면서 이렇게 낭만적인 풍경은 처음이에요….”
“좋아하셔서 다행이에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는 프리다를 보며, 발레리는 조용히 미소했다.
‘이번은…. 황녀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기억이겠지.’
불꽃놀이가 끝났다.
그 사이 쪽배는 강 반대편에 도착했다.
배가 강가에 서자마자, 프리다는 앉아 있는 발레리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발레리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툭— 얹혔다.
방금 프리다가 만든 화관이었다. 토끼풀 줄기를 엮고, 그 위에 개나리를 꽂아 만들어낸.
“발레리.”
“…네?”
아직 노를 잡고 있는 발레리는 샛노란 화관을 머리에 얹은 채 프리다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프리다가 몸을 굽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목을 끌어안았다.
“난 발레리가 좋아요.”
“…황녀님.”
“평생 친구 하고 싶어.”
“…….”
“나 여행 갔다가 돌아오면, 라벤더궁 정원에서 나랑 케이크 먹고…. 검술 대련도 하고…. 땅따먹기도 하고 가위바위보도 해요. 아까처럼 시내 구경도 하고, 맥주도 마시고요.”
“…황녀님.”
발레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프리다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친구이자 전담 호위가 되는 거예요. 내가 발레리 묵는 방을 라벤더궁에 따로 만들어줄게요. 안 그래도 오빠가 발레리 방 너무 작다고, 다른 데로 옮겨줄까 고민하던데.”
발레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 왜….
테렌스 얘기가 나오는 걸까.
가슴을 파고드는 따끔한 통증에, 발레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오빠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프리다는 포옹을 풀더니 턱 끝에 검지를 대고 톡톡 두드렸다.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도 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으음…. 오빠가 발레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네?”
“요즘 주말에 찾아오면 발레리 얘기만 하더라고요. 발레리가 밥은 잘 먹냐, 요즘 기분은 어떤 것 같냐, 본인 얘기 안 하냐 묻는데… 아니 내가 발레리랑 오빠 얘길 왜 해. 내 얘기하기도 바쁜데. 그쵸?”
“…아.”
“저번 다과회 때 마음에 드는 아가씨 있었냐니까, 없었다는 거예요. 대체 오빠 이상형은 뭐냐고 물었죠. 자긴 키 크고, 눈동자 까맣고, 검술 잘하는 사람이 좋대. 그거 딱 발레리 아니냐고 그랬더니, 얼굴이 시뻘게져선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있죠.”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문득 과거 그와 했던 대화가 뇌리에 스쳤다.
—그럼 전하는 어떤 느낌이 좋으신데요?
—눈동자 색이 짙은.
—키는 큰 편이….
—검술도 잘한다면 좋겠지.
꽤 오래전이었다. 작년 초여름이었나. 아마 첫 보고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상형이란 게 나였다고?
설마 그때부터 날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저번 주에는 막 결혼에 신분이 중요하냐고 물어보고. 나는 별로 상관없다고 했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는데…. 어후, 진짜 느끼했어요.”
발레리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테렌스의 환한 미소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심장 한구석이 쥐어 뜯겨서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제발, 제발 그만 말씀하세요. 더 이상 못 듣겠으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일까.
프리다는 발레리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녀는 전혀 아랑곳없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발레리에게 모두 꺼내 보이고 있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한 차례 여과도 없이.
“물론 내 추측이에요. 오빠 맘이야 오빠만 알겠죠.”
“…….”
“솔직히 발레리가 너무 아까워요. 발레리는 유쾌하고 다정하고 매력 넘치는데, 오빠는 너무 무뚝뚝하고 재미없어. 황궁 관리들도 오빠 별로 안 좋아한대요. 일 엄청 많이 시키고 깐깐하다고.”
그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부분조차 제가 좋아했다면 믿으시겠나요.
꽉 말아 쥔 발레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버리고 온 연인의 이야기를 듣는 건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프리다는 잔인하게도 말을 계속했다.
“근데 내가 상상을 해 봤거든요? 발레리가 우리 오빠랑 결혼하면 난 너무 좋을 것 같아.”
“황녀님, 그건 말도 안—”
“가족이 되는 거잖아요.”
“…….”
“발레리가 내 올케가 되면, 난 평생 시집 안 가고 라벤더궁에서 살 거야. 헤헤, 근데 나 너무 멀리 나갔다. 그쵸? 발레리는 오빠한테 관심 없잖아요.”
발레리는 고개를 더 깊숙이 떨어뜨렸다.
프리다가 머리에 얹어 준 화관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가족이라.
제가 그런 걸 가질 자격이 있을까요.
황녀님은 혼자 그런 예쁜 그림을 그리고 계셨네요.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고.
“…감사해요, 황녀님. 절 그렇게 봐 주셔서.”
발레리는 사력을 다해 눈물을 삼키며 배에서 일어섰다.
프리다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순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황녀님.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선 안 돼요.
당신 같은 사람을….
난 유괴할 수 없어.
“감사하긴 무슨. 아으, 마차에서 잘 못 잤더니 너무 졸리다. 우리 얼른 말 빌려서 숙소로 가요!”
오랜만에 술을 마신 프리다는 맥주 한 잔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상대방의 반응을 파악하지 못한 채 주절주절 떠들어댄 이유였다.
발레리는 말을 한 마리만 빌렸다. 취한 황녀에게 승마를 시킬 순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