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35)화 (135/173)

135화


프리다는 그다음 날, 해가 중천에 다 떠서야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움직였다. 

“끄응….”

덜커덕, 덜커덕. 마차가 돌길을 달리기 시작하면서다.

매일 폭신한 침구에 파묻혀 자던 황녀다. 이런 환경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피리 덕분이었다.

프리다는 주먹을 꼭 쥔 채 눈을 번쩍 떴다. 발레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익숙한 스승의 얼굴을 보며 프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 의식은 십 분쯤 전에 돌아왔다. 눈을 뜨기가 두려웠을 뿐이었다. 또 그 익숙한 석실 천장이 나올까 봐.

하지만 이 딱딱한 의자와 따뜻한 무릎의 온도, 덜컹거리는 바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은 바깥세상이라고.

프리다는 끙차, 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맞은편에는 짧은 갈색 머리를 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누구지. 모르는 사람인데.

이따 묻지 뭐.

프리다는 마차에 난 창문을 열었다. 햇살이 강렬하게 퍼붓는데도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눈이 부시다고 햇빛을 피하는 건 사치였다. 시간이 얼마나 허락될지 모른다. 볼 수 있을 때 모든 걸 담아 두어야 한다.

황궁을 떠나온 지 열 시간은 흘렀을까. 황성에서 벗어나 꽤 많이 내려온 것 같았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시냇가가 보이고. 빨간 지붕을 얹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보였다.

높푸른 하늘엔 새털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풍경화 속에서만 보던 장면이었다.

프리다는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림이 아니었다. 공기가 찼다. 겨울에 가까운 3월의 바람이 옷소매를 파고들었다. 거센 바람은 이제 창문 안까지 침투했다. 프리다의 풍성한 백금발이 마차 안에서 어지럽게 흩날렸다.

발레리는 바람 소리에 부스스 잠을 깼다.

“아, 황녀님. 일어나셨어요?”

“응. 근데 발레리, 저 사람 누구예요?”

프리다가 잠자는 케빈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 루카스와 교대를 한 듯했다.

“마부요. 마차는 두 명이 번갈아서 몰 거예요.”

“아아, 그렇구나. 발레리, 혹시 단검 있어요?”

“…네, 왜요?”

“잠깐 줘 봐요.”

발레리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손잡이 쪽을 프리다에게 내밀었다.

프리다는 검을 받아들자마자 긴 머리를 하나로 모으더니 댕강 잘라내 버렸다.

한 아름에 달하는 백금발 뭉텅이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발레리는 헉 소리를 내며 찬란한 머리카락 뭉치를 안아 들었다.

“화, 황녀님. 갑자기 왜…. 너무 아깝잖아요. 어떻게 기르신 머린데.”

“내가 동화 속 공주님도 아니고, 머리 길러서 뭐 해요. 이 머리카락 팔아서,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아무렇게나 잘린 단발을 하고 프리다는 눈부시게 미소했다. 햇빛 아래서 보는 사파이어 빛 눈동자는 루카스의 말처럼 정말 커다란 보석 같았다.

“이리 오세요. 좀 정리해 드릴게요.”

발레리는 단검으로 프리다의 머리를 좀 더 깔끔하게 다듬어 주었다.

이제 프리다의 머리 길이는 발레리보다 짧아졌다. 발레리는 프리다에게서 받아든 손수건으로 목덜미에 붙은 머리칼을 털어냈다.

“발레리, 이렇게 머리 짧으면 사람들이 나 못 알아보겠죠? 내 초상화는 다 풍성한 긴 머리에 드레스 차림이니까….”

“인상이 많이 다르긴 해요. 그래도 모자 쓰고 다니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

프리다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실크 보자기를 풀고 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면서 프리다는 쿡쿡 웃었다.

“머리는 참 마음에 드는데, 얼굴이 좀….”

“왜요, 황녀님? 뭐 문제 있어요?”

“아뇨, 머리 짧으니까 오빠 어렸을 때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요.”

프리다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혀 근엄한 척을 했다. 테렌스를 익살스럽게 흉내 내 발레리를 웃겨 보려는 의도였다.

쌍둥이는 쌍둥이구나.

앳된 테렌스의 얼굴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발레리는 웃을 수 없었다.

마차는 이틀을 더 달려 프레이저 후작령에 진입했다.

프리다는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놓고 불안한 시선으로 후방을 쳐다봤다.

아직 아무도 쫓아오고 있진 않았다.

아마 서쪽 게이트 근위병과 석실 문지기들은 교대 시간이 오는 다음 날 아침에서야 깨어났을 것이다.

거의 멈추지 않고 달려왔으니, 추적을 시작했다면 여섯 시간 정도 간격이 있겠지.

“발레리, 다 왔어. 이제 내려.”

마지막 주자인 루카스는 두 여인을 에버렛 강 유역에서 내려주었다. 케빈은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마부를 맡은 두 남자는 프리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별다른 질문 없이 정중히 대했다. 아마 두목 피어스가 묻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당부했을 것이다.

발레리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프리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프리다는 토끼처럼 폴짝 뛰어 땅에 내려왔다.

에버렛 강이 눈앞에 보인다. 

루카스는 발레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니, 이제 작별할 차례였다.

“메이벨 여관까지는 알아서 가. 어딘지 알지, 공주님?”

“네?”

공주님이란 소리에 프리다가 갑자기 반응했다. 이 남자가 혹시 본인의 신분을 알고 있는 건가 해서.

“아니 그쪽 말고, 우리 공주님이요.”

루카스가 발레리를 가리켰다. 발레리는 그의 등짝을 주먹으로 퍽 쳤다.

“아하하, 얘가 저 놀리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두목이 자정에 그리로 찾아가신다고 했어. 늦지 않게 들어가. 그럼 간다.”

루카스가 대뜸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발레리는 알았다고 하며 그의 얼굴을 귓가에서 떼어냈다.

그는 다시 마부석에 올라 잠자는 케빈을 태운 채 어딘가로 떠났다.

아마 북부로 갈 것이다. 남부 아지트는 박살이 났고, 볼드윈 공작이 망했으니 아마 북부가 더 안전하겠지.

그런데 메이벨 여관. 왜 두목은 거기로 오라고 했을까. 거긴 마력석 광산 코앞인데. 혹시 의뢰인이 광산과 관련된 인물인 걸까.

“발레리, 이제 우리 자유시간인 거죠?”

발레리가 상념에 잠긴 사이 프리다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프리다의 볼은 기대감으로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역시 남쪽 지방이라 그런가.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와닿는 강바람이 제법 따뜻했다.

“…아, 네.”

“빨리 구경시켜 줘요! 시장부터 가면 안 돼요?”

프리다가 발레리의 팔에 매달리며 재촉했다.

가끔 길거리에서 보는, 부모에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들이 이랬던 것 같다.

발레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었다. 이럴 때 보면 황녀가 저보다 두 살 위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작은 손을 붙잡고 강 유역을 지나 번화가로 나섰다.

후작령의 번화가는 황성보다 한산하고 볼거리도 별로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 오랜만에 와 보는 발레리의 눈에는 그랬다.

하지만 프리다의 눈에는 모든 게 새롭기만 했다.

시장 바닥을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 시끄러운 닭들, 상가 지붕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 펄떡거리는 생선을 들고 호객에 나선 어물 장수들.

무엇보다 축축하면서도 비릿한 이 시장의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래야 사람 사는 곳이지.

“발레리, 나 배고픈데. 맛있는 거 파는 데로 가요.”

한참 시장을 구경하던 프리다가 주린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마차에선 딱딱한 호밀빵으로만 끼니를 때운 터라 허기가 돋았다.

발레리는 프리다를 이끌고 먹자골목에 들어섰다.

프리다는 쫄쫄거리며 매대 위를 구경했다. 길거리 음식들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녀는 지글지글 익는 양꼬치 앞에 서서 군침을 꿀꺽 삼켰다.

발레리는 그런 황녀의 머리 위에 빵모자를 꾹 눌러 씌웠다. 머리를 짧게 잘라도 외모가 눈에 띄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엇, 모자 언제 샀어요?”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 계실 때요.”

“발레리, 나 이거 꼬치 사줘요. 근데 이거 무슨 고기예요?”

고기는 육각형으로 작게 썰려 있었다. 발레리는 코를 킁킁댔다. 약간 노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양인 것 같은데요. 냄새도 그렇고.”

“양…, 양은 귀여운데….”

“드시면 근육으로 가요.”

“두 개 주세요! 아니 아니, 네 개! 발레리도 두 개 먹을 수 있죠?”

프리다는 바로 점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점원은 생긋 웃으며 가장 노릇노릇 잘 익은 꼬치를 내줬다.

발레리는 꼬치를 들고 마냥 즐거워하는 프리다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돈을 냈다.

석실 안의 프리다와 지금의 프리다는 다른 사람 같았다.

외모도 그렇지만 목소리에서 나오는 기운 자체가 다르다. 검을 휘두르며 기합을 넣을 때처럼 힘차다.

둘은 먹자골목을 지나 광장의 분수대로 왔다. 프리다는 햇빛을 환하게 반사하는 물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이 빛을 받으면 이렇게 예쁘구나.”

그 물을 통과한 햇빛은 아주 가느다란 무지개로 갈라졌다. 프리다는 그 위로 손을 뻗었다. 무지개는 손에 잡히지 않았으나 손바닥에 예쁜 그림을 비춰 주었다.

프리다는 그러다 분수대 너머에서 아이스크림 부스 하나를 발견했다.

“발레리, 나 저거 먹고 싶어.”

“네, 사 드릴까요?”

“응. 나 분수대 구경하고 있을게, 얼른 갔다 와요.”

발레리가 아이스크림을 받아오는 사이, 프리다는 분수대의 물빛을 눈에 담고 있었다.

“얘, 아가.”

아주 가까운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 든 남자 같았다.

프리다는 뒤를 홱 돌아봤다. 뾰족한 모자를 눌러쓴 노년의 마법사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마법사를 바짝 경계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허리춤의 검 자루도 불끈 쥐었다.

“누구세요?”

“머리가 짧아서 남자아인 줄 알았는데 다 큰 아가씨였네. 미안해요. 근데 할 말이 있어서.”

“네? 무슨….”

“아가씨 입은 옷 말이야. 마기가 조금 느껴져서 봤는데….”

“마기요? 제 옷에서요?”

“응. 누가 마법을 걸어둔 것 같아서 그래요. 속박 마법은 또 아닌 것 같고 긴가민가하네. 혹시 몸 불편한 데는 없어요?”

“네… 전혀 없어요.”

—챙.

마법사의 목 앞에 검 끝이 겨눠졌다. 발레리였다. 아이스크림 하나가 땅에 엎어져 있었다. 급히 검을 꺼내느라 그랬을 것이다.

“누군데 우리 아가씨한테 접근하시죠?”

화들짝 놀란 마법사는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그는 정말 악의가 없어 보였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괜히…. 갈게요, 갈게.”

프리다는 땅에서 지팡이를 주워 마법사에게 건넸다. 마법사는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줄행랑을 쳤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발레리는 검을 검집에 꽂았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한순간도 혼자 두면 안 됐는데.”

“아니, 아니에요. 나쁜 사람 아닌 것 같았어요.”

“겉만 봐선 모르는 일이에요. 앞으로 주의할게요. 자, 여기 아이스크림 드세요.”

발레리는 왼손에 하나 남은 아이스크림을 프리다에게 내주었다. 땅에 떨어진 본인의 것은 안 먹어도 그만이었다. 지금은 딱히 먹고 싶지도 않았고.

프리다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 제 옷을 내려다봤다. 분명 평소에 입던 옷이다. 사흘이나 안 갈아입어서 찝찝하긴 했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잘못 본 거겠지. 여기 누가 마법을 걸었다고. 프리다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만끽하며 발레리의 손을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