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저 여자 누구예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미묘한 환경 변화를 감지했다.
그의 침대 맞은편 벽에 웬 낯선 여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이대는 이십 대 초중반으로 추정됐다. 흑단 같은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새카맸고, 눈꼬리가 올라가 있어 새치름해 보였다.
“…누구인 것 같나?”
“모르겠는데요. 하, 짜증 나. 지금 나한테 도발하는 거예요?”
“정말 모르겠어?”
“빨리 떼어요. 무슨 침대 앞에다 저딴 걸 걸어놔. 좋은 분위기 다 망쳐 버리게.”
발레리는 제 볼에 입 맞추는 테렌스에게 울컥 짜증을 부렸다.
아무리 초상화라지만, 외간 여자가 내려다보는 앞에서 그와 살을 섞긴 싫었다.
테렌스의 얼굴에 잠시 서운한 기색이 감돌았다.
“…너잖아.”
“뭔 소리예요. 저게 어떻게 나예요?”
“이스티아 하르만 대사. 그자가 널 찾는다며 저 초상화를 두고 갔다.”
“하르만? 그 곱슬머리 왕자인가….”
발레리는 건국제 무도회 때 대뜸 외국어로 말을 걸어왔던 남자를 떠올렸다. 어떻게 생겼더라. 어깨 길이의 부스스한 곱슬머리였던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네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좀 다르게 그려진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너야.”
테렌스는 실실 웃으며 조곤조곤 해명했다.
발레리는 고개를 갸웃대며 그림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저와 공통점이 있긴 했다. 까만 눈과 검은 머리, 햇빛에 그은 피부, 도톰한 입술과 날렵한 턱선까지.
뭐야. 진짜 나랑 비슷하잖아.
“…좀 닮기는 했네. 근데 날 왜 찾는대요?”
“글쎄. 친해지고 싶으니 그랬겠지.”
테렌스가 그녀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무도회 때 발레리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남자였다. 마음에 찔렸지만 하르만의 의중을 그대로 알리고 싶진 않았다.
직접 만나게 해줄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
“그래서, 그 왕자한테 저 안다고 했어요?”
“아니, 모른다고 했다.”
“잘했어, 테렌스.”
발레리는 그의 부드러운 뒷머리를 어여삐 쓰다듬었다.
“…오늘도 예뻐해 줄게요.”
도발이었다.
테렌스는 픽 웃으며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다.
“아니, 오늘은 내 차례다.”
발레리는 순식간에 눕혀졌다.
“아, 잠깐만요.”
그녀는 침대 밑에서 푸른 약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테렌스의 입에도 옮겨 주었다.
거기서부터였다.
테렌스는 정말 숨 쉴 틈 없이 깊숙한 키스를 해댔다.
나중엔 발레리가 도리질을 치며 고개를 뺄 정도였다.
“아으, 숨 좀 쉬자 이 인간아!”
그녀는 숨을 헉헉대며 테렌스의 어깨에 손톱을 콱 박아 넣었다.
이날 밤은 강약조절이랄 게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산소 운동을 하듯 격렬하기만 했다.
테렌스가 오른손의 통증을 참으면서까지 그녀를 몰아붙인 탓이었다. 발레리도 그와 합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결국 발레리는 밤이 다 깊기도 전에 기진맥진해서 대자로 뻗어 버렸다. 아무리 체력이 발군이라도 전력 질주를 여러 번 반복하면 탈진할 수밖에.
테렌스는 침대맡에 놓아둔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는 복직근이 선명한 그녀의 아랫배를 꼼꼼히 닦아주며 생각에 빠졌다.
‘만약 후사를 본다면…. 너 이외에 다른 사람과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데.’
“발레리.”
“네.”
“날 좋아하나?”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 질펀하게 뒹구는 취미는 없는데요.”
발레리는 여상한 투로 대꾸했다.
일전에 테렌스가 했던 말을 따라 하는 듯도 했다.
테렌스는 목을 가다듬은 뒤, 좀 더 내밀한 질문을 준비했다.
“…혹시 나중—”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발레리가 느닷없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 맞다, 테렌스.”
“…음?”
“좀 이질적인 주제 꺼내도 돼요?”
말허리가 잘린 테렌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젖은 수건을 한쪽으로 치우며.
“제가 북부에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북부라면, 볼드윈 공작령?”
“네네, 거기요. 거기 마력석 장신구 생산시설 있잖아요.”
“…그렇지.”
볼드윈 공작이 언급되자, 테렌스는 평상시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나온 마력석 부스러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간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테렌스는 흠칫하며 눈을 고쳐 떴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수개월 전부터 정탐꾼을 파견해 조사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정황만 있었고 확실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공작 또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의 딸인 에이바가 뒤를 캐보겠다 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던 차였다.
“전해 들었으니까 알죠, 뭐. 조만간 시간 되시면 제 친구 한번 만나주실 수 있어요? 증거를 확실하게 잡았다고 하더라고요.”
“…신원이 확실한 자인가?”
“선량한 백성이긴 해요.”
루카스는 평민 출신이었다. 멀쩡한 신분이 있으니 군대도 다녀온 거고.
펠런 단원이란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현상수배 벽보에도 그의 얼굴은 없었다.
두목 피어스의 말을 빌리자면 루카스는 ‘다른 덴 다 더러워도 범죄 기록만큼은 깨끗한 놈’이었다.
“남부 출신인 네가 북부에 아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군.”
“하하, 아시다시피 제가 예전에 여행을 많이 다녀서….”
발레리는 눈꼬리를 애써 접으며 다시 몸을 누였다. 제보 이야기를 너무 대뜸 꺼낸 것 같아 조금 후회됐다. 테렌스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았으면 했다.
다행히 테렌스는 별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느른하게 웃으며 발레리의 목 위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속으로 들어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일단 누군지 알려준다면 신원 조회부터 해보겠다. 만날 용의는 있어. 마침 조사가 지지부진하던 영역이었으니.”
“…이미 알아보고 있으셨구나.”
“그랬지. 성과는 딱히 없었지만.”
“음, 신분은 밝히지 마시고, 그냥 관리인 척하면서 만나 주실래요? 저도 같이 나갈게요.”
제보를 주선하는 발레리의 자세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테렌스는 그녀의 제의가 반가우면서도 약간은 의아했다.
이런 뜻밖의 사안에 그녀가 관심을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알았다.”
“근데 나한테 할 말 있던 거 아니에요? 아까 내가 말 끊어먹은 것 같은데.”
“…아니야. 오늘은 이만 자자.”
테렌스는 침대맡의 램프를 껐다. 오늘은 왜인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그는 점점 규칙적으로 변해가는 연인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처음엔 그녀의 비밀 연인이 된 것만으로 만족하려 했었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젠 다른 차원의 목마름이 그를 괴롭혔다.
‘널 몇 번씩 안아도 온전히 가졌다는 생각이 안 들어. 아무래도 내가 욕심나는 건…. 너와 함께하는 미래인 것 같다.’
시작부터 이별을 예고했던 연인에게, 그는 선뜻 반지를 건넬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워질수록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테렌스는 그 과정에서 그녀의 심기를 조금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아직 너는 날 사랑하는 것까진 아니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반지를 끼울 마음이 들게 하려면.
***
“이야기 됐어. 만나 준대.”
발레리는 루카스가 묵는 여관방에 찾아와 있었다.
좁다란 공간에 독한 장미 향수 냄새가 매캐하게 진동했다.
밤에 바쁘다더니, 어김없이 하룻밤 상대를 찾아 시간을 보낸 듯했다.
“흠, 그분은 언제 시간 된대?”
“다음 주말에. 나도 같이 나올 거야.”
발레리는 테렌스에게 변장을 당부했다.
중급 관리들이 입는 관복에다, 가발도 착용하고 나오라고.
그래야 제보자도 위계에 압도당하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사실은 핑계였다. 루카스는 딱히 위계에 굴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새털처럼 입이 가벼운 그에게 테렌스의 진짜 신분을 밝히기 꺼려질 뿐이었다.
“흠, 근데 공주님. 여자인 거 들켰다가 애국자인 척해서 용케 살아남았다며?”
“…언제 적 얘길 하고 있어.”
“아무튼 우리 공주님이 황궁에서 작업 치는 물건, 그거 뭐야? 저번에 물어보려다 까먹었다.”
루카스의 호박색 눈알이 호기심으로 반들거렸다.
“뭐…, 유품 같은 거야. 어떤 황제가 남기고 간.”
“유품? 흠, 아직도 못 찾은 거야? 우리 공주님 입대한 지 꽤 되지 않았나.”
그래. 일 년이 거의 다 돼 가지.
발레리는 겸연쩍게 이마를 긁적거렸다.
일 년이 다 돼가도록 성과가 없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드넓은 황궁에서 있을 만한 곳은 웬만큼 다 뒤졌는데 안 나오는 걸 어떡하나.
“더럽게 찾기 힘드니까 그렇지. 황제 무기고, 황실 박물관 창고, 황제 침실 금고까지 뒤졌는데 없었어.”
“무기고? 박물관? 뭐 오래된 무기 같은 거야?”
“…….”
루카스는 그녀의 말에서 단서를 찾아 목적물을 대강 맞혔다.
정곡을 찔린 발레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흠, 공주님. 그럼 마지막 보루에 가야지.”
“…마지막 보루?”
루카스는 커다랗게 뜨인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능글거리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심각하게 변해갔다.
“무덤.”
무덤?
지금 얘 나한테 무덤을 파라고 하는 건가?
발레리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쭉 흘러내렸다.
“…미, 미친 거 아니야? 사람 무덤을 어떻게 파.”
그녀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잔뜩 겁먹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루카스는 쿡쿡 웃었다.
“우리 공주님 기질이 이렇게 유약했었나? 산 사람 집보단 죽은 사람 집이 더 털긴 쉬울걸. 도굴꾼들이 괜히 있겠냐.”
“아무리 그래도 무덤은….”
“못 팔 것도 없지. 어떤 황제가 남긴 유품인지는 모르겠는데, 자식들 안 물려줬으면 답은 하나야. 이 나라 황족이나 귀족들은 죽으면 애장품을 같이 묻으니까.”
그러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발레리는 잠시 벽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초대 황제 엘로이스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건만, 벌써부터 으스스하게 오한이 나는 기분이었다.
“어우 씨, 나 어떡하냐, 하….”
발레리의 입술은 공포에 질려 시퍼렇게 변색해 갔다.
근육으로 탄탄하게 다져놓은 두 다리조차 바들바들 떨렸다.
‘후우, 황녀님하고 테렌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죄책감 들고 무섭네….’
그녀는 펠런 단원 중에서도 꽤 간이 큰 편이었다. 애초에 간이 작았다면 쫓고 쫓기는 도적질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령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단원들이 유령 괴담을 나눌 때마다, 발레리는 귀를 막고 에베베거리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무서우니까. 더럽게 무서워서 미치고 팔짝 뛰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