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하하, 천하의 공주님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네. 이 오빠가 대신 가서 삽질해줘?”
“…아니, 됐어. 무덤을 파도 내가 파.”
발레리는 루카스의 호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어찌 됐든 이번 임무는 혼자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덤에서 유령을 보고 기함해 쇼크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흠, 하나보단 그래도 둘이 나을 텐데.”
루카스는 짐짓 아쉬워했다. 발레리는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덤 파는 일을 맡길 순 없겠지만, 다른 쪽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얘는 평민 남자고, 학교라는 걸 다녀봤으니까.
“루카스, 너 글 잘 읽는 편이지? 그럼 그거나 알아봐 줘.”
“뭘?”
“칼레바니아 역대 황제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공주님, 범위 좀 좁혀 줘. 지금 엘리엇 황제가 25대인가 그렇잖아. 다 알아보기엔 너무 많다고.”
역대 황제들의 묘지를 전부 알아봐 달란 건, 유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역사서를 깊이 꿰고 있지 않은 한 황제들의 묘 위치를 전부 파악하긴 어려웠다. 장례식은 만백성이 보는 가운데 장엄하게 엄수됐으나 매장은 조용히 치러졌기 때문이다.
죽은 황제 24명의 묏자리를 전부 알아보라기엔 너무 많은 감이 있긴 했다.
“그럼 15대까지만.”
“…알았어. 대가는?”
“제보 받아주는 관리한테 대가 톡톡히 쳐달라고 할게.”
“뭐 얼마나 높은 사람인데 그래? 진짜 황실 근위대장이라도 돼?”
루카스는 이 밖에 여러 질문을 던졌다. 발레리는 칼같이 튕겨냈다.
이미 그에게는 충분한 힌트를 줬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루카스는 워낙 촉이 좋았다. 정보를 더 풀었다간 모든 걸 맞혀 버릴 기세였다.
그는 몇 번 더 유도신문을 하다가 포기했다. 발레리가 그만 좀 찔러 보라며 역정을 냈기 때문이다.
“우리 공주님 입이 생각보다 무겁네. 그럼 다음 주에 보자고.”
***
아침인데 방이 왜 이리 어둡나 했더니, 창밖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발레리는 채플 후문의 처마 밑에 서서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굵은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손바닥 위를 흥건히 적셨다.
노랗고 빨간 낙엽들이 흠뻑 젖은 채 바닥에 뒹굴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잔디에선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많은 이들은 가을비를 보면 쓸쓸해진다고 했다.
발레리는 오히려 따뜻함을 느꼈다.
“마침 그때처럼 비가 와서 좋네.”
오늘은 그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목 피어스가 차가운 빗속에 쓰러진 그녀를 거둬준 날이었다.
부모가 없는 발레리는 자신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몸집이 비슷한 거리의 아이들이 열 살이니, 본인도 그렇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펠런에서 지낸 지 일 년이 된 날, 피어스는 발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널 데려온 지 오늘로 딱 일 년이 됐구나. 오늘을 네 열한 번째 생일로 정하는 게 어떻겠니.
매년 이맘때면 단원들은 멧돼지나 사슴을 사냥해 와서 바비큐를 해 먹곤 했다. 펠런의 막둥이이자 ‘공주님’인 발레리의 생일 파티를 위해서였다.
단원 로이가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준다고 난리 법석을 피우다 아지트의 부엌을 다 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로이는 몸 좀 괜찮아졌을까.”
마음 한쪽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문을 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이던 로이의 모습이 잠시 떠올라서.
발레리는 반가운 가을비를 뒤로하고 석실로 향했다.
곧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비가 온다고, 황녀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야지.’
나선형 계단을 지나 종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발레리는 열린 문틈 안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별안간 펼쳐진 어둠에 놀랐다.
뭐야?
왜 이렇게 어둡지?
분명 황녀님께서 종을 울리셨는데.
원래대로라면 석실 천장에 밝은 광구가 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석실은 빛 한 점 없이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이상하다. 황녀님께서 이 시간까지 주무실 리는 없을 텐데….’
발레리는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며 석실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황녀님? 계세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뭐지.
꿈인가.
—퍼펑!
머리 위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졌다. 발레리는 서 있던 자리에서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으어억! 뭐야!”
곧이어 성냥을 긋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 멀리서 촛불 하나가 보였다.
“발레리,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해요, 발레리!”
석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문지기 마법사 다섯 명이 지팡이를 들고 다시 천장에 광구를 띄웠다.
이제야 눈앞의 광경이 제대로 드러났다.
켄드릭과 프리다가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촛불을 하나하나 밝히고 있었다. 촛불 개수가 점점 늘어 큰 초가 둘, 작은 초가 셋이 됐다.
“생일 축하해요, 로빈슨 양.”
마법사들도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한마디씩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깜짝 놀랐잖아요.”
발레리는 놀란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치며 진정시켰다.
예상보다 큰 반응에 켄드릭은 낄낄대며 웃었다. 프리다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하나, 둘, 셋을 세더니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둘 다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음정이 틀리지 않아 들을 만은 했다.
발레리는 멋쩍게 웃으며 감사의 의미를 담아 손뼉을 쳤다.
“하하하, 감사해요. 제 생일은 어떻게 아시고….”
“내가 황녀님께 말씀드렸어. 오늘 너 생일이라고.”
범인은 켄드릭이었다. 이놈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할까.
“하나뿐인 스승님 생일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순 없잖아요. 자, 얼른 초 불어요!”
프리다가 환하게 웃으며 발레리의 얼굴 앞에 케이크를 가져다 댔다.
발레리는 얼떨떨해하며 촛불을 후 불었다.
꺼진 촛불 위에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일까.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아, 정말.
왜 눈앞이 자꾸 흐려지는지 모르겠다.
울면 안 되는데.
이번 생일만큼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보내자고.
마침 가을비도 내리니까, 두목과 단원들을 떠올리면서 자축해 보자고.
방금 그렇게 다짐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는데.
왜 날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뭐야, 울어?”
“발레리, 왜 또 울어요?”
“아으, 눈에서 땀이 나서….”
발레리는 거친 군복 소매로 눈시울을 벅벅 훔쳤다.
켄드릭과 프리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가왔다.
“땀 같은 소리 하네.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
“그래요, 발레리. 감동해서 우는 거면 괜찮으니까 마음껏 울어요.”
프리다는 발레리를 꼭 안아주었다.
그 작은 품에서 발레리는 무한한 따스함을 느꼈다.
발레리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왜 자꾸만 이곳이 소중해질까.
난 분명 여기서 떠나야 하는데.
떠날 때까지 불과 몇 개월 남지도 않았는데.
왜 미련이 생길 짓만 어리석게 골라서 하고 있는 건지.
의뢰 대상인 황녀에게는 분에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있고.
그 오라비인 황태자와는 여러 번 밀어낸 끝에 결국 연인 사이가 되었다.
소꿉친구인 켄드릭도 여전히 그녀를 따스히 바라봐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이 황궁에는.
가장 슬픈 건, 이들에게 보답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들, 너무…. 정말 고마워요. 이걸 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프리다는 손수건을 꺼내 발레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입술을 뗐다.
“발레리.”
“흐윽…. 네?”
“내겐 발레리 자체가 선물 같은 존재예요.”
“…….”
“발레리가 없었으면, 난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꿨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까지 검을 다룰 수 있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걸요.”
프리다는 한때 발레리가 없는 자신을 상상했었다.
‘아마 그랬으면 난…. 신탁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순순히 마왕비로 팔려갔을 거야. 오벨론한테 검을 들고 맞선다는 상상조차 못했겠지.’
“황녀님, 그건….”
“고개 들고 나 봐요.”
발레리의 젖은 눈동자가 프리다를 향했다. 황녀의 눈은 언제나처럼 보석 같은 광채를 띠고 있었다.
“발레리, 난 보답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오히려 내가 받은 게 더 많아요. 건강해졌고, 힘도 세졌고, 실력도 늘었고, 또….”
프리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처음이었어요.”
“네…? 뭐가요?”
“지금 이 공간에서 행복하다고 느낀 거요. 지하에 갇혀 살기 시작하면서, 소리 내서 웃은 것도 처음이에요. 모두 발레리 덕분이었어요.”
프리다는 발레리의 품에 더 깊숙이 안겨들었다.
“알다시피 그전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거든요. 술에 절어서 지내던 때도 있었고.”
“술이라뇨?”
“나 사실 알코올 중독자였어요. 문지기들한테 주문하면 웬만한 건 다 가져다주니까, 하루에도 몇 병씩 달라고 했어요. 잔뜩 취해서 몽롱해지면 내 처지가 좀 잊히는 것 같아서.”
어느덧 켄드릭은 나가고 없었다.
아마 두 여인이 대화할 시간을 마련해 주려 조용히 자리를 피해준 듯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내가 뒤늦게 중독인 게 밝혀진 뒤엔 전부 회수해 갔어요. 그거 알아요? 석실엔 술 반입 금지인 거.”
“아뇨, 몰랐어요.”
“말이 길어졌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나 발레리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요.”
깜짝파티를 열어준 것도 모자라 선물까지 주겠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황녀님, 저는 그런 거 받을 자격이 없어요.”
“소원.”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알다시피 나 발언권 되게 세거든요. 아버지랑 어머니 전부 내 말이라면 못 들어주셔서 안달일 정도예요.”
이 와중에 귀가 솔깃해지는 건 뭔지.
발레리는 자괴감을 느꼈다.
잠시 잊고 있던 임무 내용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서.
제게 한없는 신뢰와 우정을 보내 주는 황녀를, 그녀는 여전히 임무 목표물로 보고 있었다.
‘여행 떠나시기 전에, 저와 의뢰인 앞에 같이 가달라고 하면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시겠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고작 나 하나 믿고 따라와 달라는 게 과연 합당한 부탁일까.
황녀를 데리고 석실을 나가겠다고 하면, 황제와 황후는 과연 허락해 줄까.
‘…안 된다고 하더라도, 얘기는 꺼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 외에는 이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탈출할 방법이 안 보이니까.
발레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황녀님.”
“…음? 소원 생각났어요?”
“지금 말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언제요?”
“머지않았어요. 황녀님께서 충분히 강해지셨다고 판단이 되면, 그때 말할게요.”
황녀가 부탁을 꼭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확률이 높지 않을 걸 짐작하면서도.
‘황녀님, 저는 납치라는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아요. 동행해서 지켜 드리고 싶어요. 제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음, 얼마나 강해져야 강해졌다고 판단할 건데요?”
프리다는 그녀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저 문밖의 문지기 기사들이요. 저 중에 열 명이랑 대련해서 이기시면 돼요.”
“기사들 다 합하면 일흔 명쯤 될 텐데, 그중에 열 명만 이기면 된다는 거죠?”
“더 이기셔도 상관없어요.”
프리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 속에서 강한 승리욕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