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왜 그러니? 어디가 안 좋니?”
황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테렌스의 심기를 살폈다.
“아닙니다. 대사에게는 그냥 모른다고 하시면 됩니다. 아마 프리다가 건너 건너 고용한 사람일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할게.”
“더 용건이 있으십니까?”
사무적인 태도로 용건을 묻는 아들을, 황후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를 대하는 테렌스의 태도는 언제나 이랬다. 낳아준 어미가 아니라 일국의 황후를 대하듯 했다.
용무가 있어야만 대화가 성립되는 관계였으니.
황후 레베카의 청록색 눈동자에 우울한 빛이 어렸다.
나중에 아내가 될 여인에게도, 이렇게 딱딱하게 대하는 건 아닐까.
아니, 누군가를 아내로 삼을 생각은 있는 걸까.
여자를 품을 수 있기는 한 걸까.
그 어려운 질문을 오늘은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테렌스. 네게 줄 게 있다.”
황후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가지고 왔다.
작은 보석함이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봐.”
수수한 반지였다.
보석이 박혀 있어야 할 자리에, 플래티넘으로 된 작은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테렌스는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엘로이스 황제의 반지 아닙니까?”
“맞아.”
엘로이스의 반지. 칼레바니아 황후들이 대대로 며느리인 황태자비에게 물려주는 반지였다.
아들인 황태자를 통해서.
말하자면 아들에게 청혼할 때 쓰라고 주는 반지였다.
역대 황후들은 정혼자와의 결혼이 임박한 황태자에게 이 반지를 건넸다.
하지만 테렌스는 정혼을 한 여인이 없었다.
“이걸 왜 지금 주십니까.”
반지를 받아든 테렌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테리.”
황후는 테렌스를 정답게 불렀다. 아주 어릴 적 불렀던 애칭으로.
“…네, 어머니.”
호칭에 적응하지 못한 테렌스의 대답은 다소 늦게 돌아왔다.
“좀 갑작스럽겠지만, 네 지향을 물어도 괜찮겠니? 아무래도 후사를 보려면….”
또 이 질문인가.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테렌스는 울컥하는 심정을 누르며 분명히 대답했다.
“후사를 걱정하셔야 할 지향은 아닙니다.”
황후는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리며 안도했다.
사실 그녀는 남성을 좋아한다는 대답도 들을 각오가 돼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 후사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여인을 품게 해야 한다는 점이 우려됐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넌 언제나 신중하고 합리적이니, 반려를 선택할 때도 그러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예?”
”그래도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와 네 아내 사이에.”
황후는 눈시울이 벌게진 채 아들의 얼굴을 애처롭게 응시했다.
갑자기 무슨 사랑 타령이신지.
영문을 모르는 테렌스는 어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에이바가 떠나고 나서 깨달은 거야.”
“공녀 이야기는 왜….”
“애정 없는 결혼은 상처만 남는다. 황권은 네 아비와 내가 잘 다져놓을 테니, 정략은 신경 쓰지 말아라. 네가 사랑하고, 널 사랑해 주는 여인을 만나렴.”
네가 어릴 적, 내가 주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쏟아줄 수 있는 그런 여인을.
꽁꽁 얼어붙은 네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따뜻한 난롯불 같은 여인을.
프리다가 아픈 손가락이라는 핑계로, 어린 널 충분히 돌보지 못했단다.
그 책임을 며느리 될 여인에게 떠넘기게 돼 미안하지만, 네 가슴속의 빈 곳을 내가 채워주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어.
하지만 테렌스, 널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란다.
이 말조차 네가 듣기 버거워할 것 같아서 꺼내기가 어렵구나.
황후는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들을 억누르며 눈물을 삼켰다.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어.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긴다면 자유롭게 청혼하라는 뜻이야.”
“어머니.”
“…응?”
테렌스가 반지를 왼손에 꽉 쥔 채 이렇게 물었다.
“정말 사랑, 그거 하나면 됩니까?”
한없이 낮게 깔리는,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황후는 따스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렌스는 손바닥을 다시 펴고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레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적어도 반대는 안 하시려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연인의 의사였다.
발레리는 연애에 앞서 이런 조건을 내걸었었다.
—미래는 생각하지 말기. 이를테면 결혼이라든가.
아마 지금 당장 이걸 준다면, 그녀는 거부할 공산이 크다.
설득한다 해도 과연 통할까. 연인이 되는 과정조차 꽤 힘들었는데.
반지를 관찰하는 테렌스의 눈 밑에 잠시 그늘이 드리웠다.
“…위에 덮개는 왜 있는 겁니까?”
“모르겠어. 아마 보석을 보호하는 용도인 것 같은데…. 엘리엇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안 열리더라. 대장장이에게 맡길까 하다가, 반지가 손상될까 봐 그냥 포기했어.”
“그렇군요.”
테렌스는 반지를 케이스에 담아 재킷 안쪽에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황후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저 초상화,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
“저기, 켄드릭.”
퇴근하는 길, 어두운 나선형 계단을 오르던 켄드릭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뒤에서 들린 건 발레리의 목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발레리가 멋쩍은 얼굴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한동안 이들은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발레리가 테렌스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부터.
프리다와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켄드릭은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버림받은 새끼 사슴처럼 애처롭고 슬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내가 화내서 뭐 하겠어. 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켄드릭의 목소리는 체념한 듯 맥이 없었다. 약간의 원망기도 서렸다.
‘그래, 풀렸을 리 없지.’
발레리는 그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나랑 얘기 좀 해.”
만물이 온기를 잃어 가는 11월의 밤.
한때 푸르렀던 채플 후원의 잔디는 황갈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표면이 닳아 반들반들해진 참나무 벤치는 만지면 시릴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발레리는 그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켄드릭과 나란히 앉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복잡한 속에서 뿌연 입김이 흘러나와 밤하늘을 잠시 적셨다.
켄드릭은 분수대 위 조각상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영 어색한 분위기였다.
발레리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상처받았다.
건국제 무도회 당시 첫 춤을 추며, 켄드릭은 이렇게 말했었다.
—발레리, 나 오늘만 기다렸어.
—뭘?
—너한테 제대로 고백하려고.
그 말을 매몰차게 무시해 놓고, 다른 남자와 홀연히 사라져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왔으니.
‘하, 내가 상처 준 게 맞는데. 너한테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이미 줘버린 상처를 무를 길은 없었다.
할 일은 사과뿐이었다.
“미안해.”
“…괜찮대도.”
“아니, 내가 잘못한 거 다 아는데, 근데 너랑 예전처럼…. 지내고 싶은 건 욕심일까?”
발레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물었다.
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염치없는 걸 알면서 하는 발언이었다.
“발레리.”
“응?”
“난 언제나 예전과 같아.”
켄드릭은 시원스럽게 미소했다. 꽉 다물렸던 입이 익숙한 궤적을 따라 폭넓게 벌어졌다.
이전과 같은 웃음이긴 했지만, 녹안은 여전히 슬픈 빛을 띠었다.
“…켄디.”
그게 발레리의 죄책감을 깊이 파고들었다.
“날이 춥네. 발레리, 오랜만에 대련해서 땀이나 뺄까? 검을 하도 안 썼더니 실력이 녹스는 것 같아.”
켄드릭은 벤치에서 일어나 어깻죽지를 휙휙 돌렸다.
발레리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일정 거리를 두고 서서 허리의 검을 뽑았다.
발레리는 한 박자 빠르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켄드릭은 전과 달리 초반부터 본 실력을 발휘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육중한 풍압이 느껴질 정도였다.
발레리는 그의 기세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작고 날랜 프리다만 상대하다가 다부진 기사와 겨루자니 완력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언제나 켄드릭은 발레리보다 한 수 위였다. 애초에 프레이저 검술의 정통 계승자인 데다 체격 조건도 우월했다.
정공법보다는 잔기술을 써서 상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실력이 녹스는 것 같다더니, 순 엄살이었네.’
이렇게 잡생각이 들어서려는 찰나.
졌다.
발레리의 목에 칼끝이 드리워졌다.
“…항복.”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고 양손을 들었다.
켄드릭은 곧바로 검을 집어넣으며 이렇게 제안했다.
“발레리, 우리 이제 매일 대련할까? 퇴근하고 나서.”
“바라던 바야. 나도 실력이 자꾸 정체되는 것 같았는데 잘됐네.”
발레리는 강해지고 싶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황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러려면 프리다와 함께 지하에서 수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발레리는 틈날 때마다 혼자 후원에 나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수준에서 더 성장하려면, 실력이 더 나은 사람과의 대련이 필요했다.
그리고 켄드릭만큼 좋은 상대는 없었다.
“…발레리, 예전처럼 진 사람이 이긴 사람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하자.”
켄드릭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과거 그들은 주로 엉덩이로 이름 쓰기, 코끼리 코 10바퀴 돌기, 굴욕적인 상황극 하기, 딱밤 때리기, 하루 동안 경어체 쓰기 등을 벌칙으로 내걸었었다.
이제야 옛날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발레리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그러자.”
“오늘은 내가 이겼으니까 내 부탁 들어줘.”
“뭔데?”
켄드릭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안아줘.”
“…야.”
“1분만.”
발레리의 표정이 굳자, 켄드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가 짐작하는 의도가 틀렸다는 듯이.
“그냥 친구로서 안아달란 거야. 1분이 너무 길면, 30초만.”
어렵진 않지. 친구로서라면.
발레리는 후, 하고 앞머리에 바람을 불었다.
그녀는 켄드릭의 품에 들어가 몸통을 감싸 안았다.
켄드릭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생각보다 포옹이 깊어져 당황했지만, 발레리는 입술을 깨물며 딱 30초만 버티기로 했다.
켄드릭은 두 눈을 감았다.
‘…네 하룻밤 상대, 하나도 부럽지 않아. 나는 정말 천천히 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