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어느덧 찾아온 10월의 그믐날 새벽.
남녘에서 올라온 짙은 흑운이 황궁의 밤하늘을 꽉 틀어막았다. 빈틈이 조금도 없었다. 실눈썹같이 깡마른 그믐달은 그대로 질식할 듯 묻혀버렸다.
중앙궁 정원 한구석의 웅크린 사자상 위에도 암흑이 드리웠다. 발레리는 새카만 작업복을 입고 그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금 황궁 내 유일한 광원은 황제의 침실 창문이었다.
발레리는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황제는 뭘 하는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잠 되게 없으시네. 설마 밤새는 건 아니겠지….’
발레리는 가는눈을 하고 하품을 길게 뿜었다.
그녀는 찔끔 고인 눈물을 닦아내다 흠칫 눈을 고쳐 떴다. 창문에 인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제였다. 그는 창가에 무언가를 올려놓은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창을 닫았다.
“뭐야. 뭘 내놓은 거지?”
등불이 꺼졌다. 이제야 자려는 모양이었다.
발레리는 자루에서 야광석 주머니를 꺼내 시야에서 암흑을 걷었다.
어느새 중앙궁 옥상에 오른 그녀는 단단히 곱드린 밧줄을 허리에 묶었다.
이 정도면 3층까지 내려가겠지. 길이를 가늠한 그녀는 각 층의 창틀을 천천히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조금 전 닫힌 황제의 침실 창문에 접근하려는 순간.
—푸드득!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커다란 까마귀가 창가로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어우 씨 깜짝이야!’
발레리는 자지러지게 놀라 창틀을 잠시 놓쳤다. 밧줄이 없었다면 그대로 낙하였다. 엉겁결에 비명까지 지를 뻔했다.
까마귀는 창가에서 무언가를 집어 물고 남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발레리는 창틀에 올라 벌떡대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작업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마터면 걸릴 뻔했다. 소리를 참아 준 목구멍에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어휴, 저 까마귀는 대체 뭐야? 황제가 창틀에 까마귀밥이라도 놔둔 건가….”
그녀는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며 허리의 밧줄을 풀었다.
다행히 황제는 창문을 잠그지 않았다. 발레리는 최대한 경첩 소리가 안 나도록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녀는 충분한 틈이 나오자마자 몸을 쓱 집어넣고 침실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바로 창문을 닫았다. 바깥바람이 찼다. 갑작스레 온도 변화가 생기면 잠자는 부부가 깰 수 있었다.
‘황태자궁 침실의 두 배는 되네. 두 명이 쓰는 데라 그런가.’
발레리는 딱정벌레처럼 바닥에 몸을 딱 붙였다.
그리고 허리춤의 야광석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감싸 빛의 세기를 줄였다.
‘야광석은 너무 밝아. 물러서 가루도 많이 떨어지고… 반딧불이가 좋은데 하필이면 날씨가 추워져서.’
발레리는 늪지대의 악어처럼 엉금엉금 기어 금고 쪽으로 다가갔다. 금고로 보이는 철제 가구는 세 개였다. 큰 거 하나, 중간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작은 금고는 검이 못 들어갈 크기니까. 중간 것부터 열어 봐야지.’
허리춤의 가죽 벨트에서 그녀는 가장 가느다란 락픽을 빼냈다. 그 날카로운 끝으로 자물쇠 윗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평소에 금고를 자주 열어보는 건지, 풀기 번거로운 감전 마법은 걸려있지 않았다.
엄지 끝으로 열쇠 구멍을 쓸었다. 생각보다 컸다. 좀 더 두꺼운 걸로 쑤셔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한 단계 더 굵은 락픽으로 바꿔 들었다.
자, 슬슬 집어넣어 볼까. 발레리의 입꼬리에 긴장감과 흥분감이 섞인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막대 두 가닥이 작은 구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달그락거리는 희미한 금속음이 들렸다. 그녀는 여문 손끝에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에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엘리엇, 자요?”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일곱 걸음쯤 뒤, 그러니까 침대에서 난 소리였다. 여자 목소리…. 아마도 황후일 것이다.
‘하, 갑자기 왜들 깨고 그러세요.’
발레리는 열쇠 구멍에서 락픽을 빼낸 뒤 설설 기어 큰 금고 뒤에 몸을 숨겼다. 겨드랑이에 끼웠던 야광석 주머니는 아예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눈앞이 확 어두워졌다.
“으음… 무슨 일이지, 레베카.”
황제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에이바가 이달 말에 공작가로 돌아간다네요.”
“…나도 공작한테 서신 받았어. 에이바도 테렌스 그놈이 눈길조차 안 주는데 자존심 상했겠지.”
볼드윈 공녀가 황후의 시녀 일을 그만둔다는 소리였다.
“에이바가 생각보다 담담하더라고요. 자기도 테렌스한테 별 기대 없었다고.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다 미안하더라고요….”
“…배배 꼬인 제 아비와 달리 화통한 성격이라 마음에 든 아이였는데, 아쉽게 됐어. 그 집에서 그나마 괜찮게 자란 자식이잖아.”
“그러게요. 에이바를 며느리로 데리고 있으면, 공작도 귀족 회의에서 반기를 덜 들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말이에요.”
발레리는 어둠 속에서 잠자코 대화를 엿들었다. 테렌스의 결혼은 본인과 하등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그나저나 공녀가 황태자비 자리를 포기한다는 건 좀 의외네. 무도회에서 춤 안 춘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공녀는 발레리에게 돈을 쥐여주면서까지—물론 거절하긴 했지만—테렌스에게 정을 붙이려 했었다. 자기가 모르는 매력을 좀 알아봐 달라면서.
“…공작이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어. 내가 그 집 아들들 청혼 거절할 때는 이를 아주 부득부득 갈더니, 이번엔 오히려 잘 됐다는 듯이 딸을 빨리 돌려보내 달라더군.”
“하긴, 공작이 테렌스에게 혼담을 넣은 적은 없으니까요. 시녀로 들어온 것도 에이바 본인의 의사였고요.”
“아들하고 딸의 결혼은 다르니 그렇기도 하겠지. 아들이면 며느리를 가문에 들이는 거지만, 딸이면 다른 가문에 보내야 하는 거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돌아누운 모양이다.
“하아, 미치겠어, 레베카.”
“왜요?”
“건국제 기간에 접견하는 사신마다 하나같이 에둘러 묻더군.”
“뭐라고 묻던가요?”
“혹시 테렌스가… 남색가가 아니냐고 말이야. 그 소문 때문에 혼담이 잘 안 들어오나 싶기도 해. 이러다 남자 이름으로 구혼장이 날아오는 게 아닐지….”
남편의 말을 듣던 황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다.
누가 남색가라는 거야. 발레리는 어이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나가서 외치고 싶었다.
‘아니에요, 어르신들. 그분 여자 좋아해요. 정말 환장한다고요. 근데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그런 걸 떠나서 걱정이에요. 애가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안 열잖아요. 남녀 할 것 없이 다 선 그으면서 사무적으로만 대하고.”
“그렇긴 하지. 귀족가 영식들이 찾아와도 체스 한 번 안 두고 말이야.”
이불 걷어내는 소리가 부스럭, 하고 들렸다. 누군가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듯했다.
“엘리엇, 아무래도 내 잘못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애정을 못 받아서 줄 줄도 모르는 게 아닐까요. 프리다가 워낙 잔병치레가 많다 보니, 테렌스는 품에 안아준 적도 거의 없었어요.”
황제도 아내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토닥, 토닥. 이번에는 등 두들기는 소리 같았다.
“아니 레베카, 내 잘못이야. 고놈이 어릴 적엔 너무 울보여서… 요절하신 형님처럼 유약한 군주가 될까 봐 엄하게만 키웠어. 이렇게 감정표현도 못하는 목석이 될 줄도 모르고 말이야.”
둘의 대화는 이어졌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서로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았다.
발레리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도 서로를 탓하지 않는 부부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리고 고마웠다. 남들에게는 선을 긋는 테렌스가, 자신에게만큼은 마음의 문을 열어줬다는 게.
‘어르신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사람 마음 열 줄 알거든요. 다음번엔 아마… 좋은 여자분한테 마음 열 거예요.’
발레리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황제 부부는 다행히 동이 트기 전에 잠들었다. 황제는 코를 골았고, 황후는 이를 갈았다. 잠버릇도 참 훌륭한 앙상블이었다.
이제야 발레리는 야광석을 꺼내 금고 두 개를 차례대로 열어보았다.
그 안을 확인한 발레리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 오늘도 공쳤구먼.’
검은 무슨, 검 비슷한 막대 하나 없었다. 그 안에 있는 건 보석이 촘촘히 들어박힌 보관 너덧 개와 작은 패물함, 실크로 감싼 양피지 두루마리 따위였다. 갖가지 조약 문서 같았다.
창밖의 먹구름이 점차 걷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동이 트고 있었다.
‘어우 씨, 빨리 나가야지.’
날이 더 밝아지기 전에, 발레리는 부리나케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그자의 초상화, 어쩌면 받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빠, 난 그거 별로 안 보고 싶어.”
테렌스는 주말 아침부터 석실에 찾아와 있었다.
프리다는 오라비가 들고 온 소식이 달갑지 않았다. 홍차를 한 입 머금은 그녀는 언짢은 듯 볼을 부풀렸다.
“어떻게 생겼는지 안 궁금한가?”
“사람 같이 안 생겼을 것 같아. 나보다 팔백 살이나 더 먹었다잖아.”
사제들에게 듣기론 나이가 팔백을 넘었다고 했다.
오벨론.
지하세계의 최고위 집행관.
생전에 중죄를 저질렀으나 처벌받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사후 형벌을 내리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크세니아와 칼레바니아, 이스티아 등이 위치한 센토스 대륙의 망자들은 모두 그의 관할로 알려졌다.
프리다는 그가 험악한 범죄자들을 압도할 만큼 무시무시한 외모를 지녔을 거라 짐작했다. 마왕이란 칭호가 어디 괜히 붙었겠는가.
몇 달 전 발레리가 가져온 짚단 인형에 뿔 달린 마귀 얼굴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딱 그렇게 생겼으리라고 상상했으니까.
“그래도 그자의 얼굴을 알면, 좀 더 의지가 생길지도 모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난 어차피 오십 년쯤 뒤면 죽을 텐데, 인간을 아내로 맞아서 뭘 하겠다고.”
“에버렛 강 이남의 땅을 모두 내줬을 정도면, 네가 꼭 필요한 것 같기는 하다.”
“하아, 죽이기 전에 한 번 물어보고는 싶네. 팔백 살이나 어린 인간 데리고 뭘 하려는지.”
마왕비가 되면 지상에 더는 나올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망할 놈의 계약서에 그리 쓰여 있었다.
프리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영영 햇빛도 못 보는 삶을 살 순 없어. 절대로.’
굳은살 가득 박인 작은 손이 허리춤의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오빠, 나 이제 연습해야 해. 이만 나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