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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04)화 (104/173)

104화

자색 불꽃을 머금은 심지 아래로, 검은 촛농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퍼렇게 녹슨 촛대 밑면에는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굳은 촛농이 수많은 돌기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까만 얼룩이 덕지덕지 붙은 촛대가 수백이었다. 그 위로 검실거리는 불빛들은 주위를 최소한으로 밝혔다.

창문 하나 없는 사방의 벽은 불규칙한 모양의 검붉은 광석으로 뒤덮여 울퉁불퉁했다.

지상에 밤이 찾아오면 한쪽 천장 위에는 지옥 불을 풀무질할 숨구멍이 열렸다. 

와이어 숲에서 바람이 들어오면 모든 촛대가 불춤을 추었다. 그럴 때마다 어두운 벽면은 장기 내벽이 꿀렁이는 것 같은 음산한 착시를 일으켰다.

지하세계.

이곳은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었다.

굳이 나누자면 지옥이 있었고, 지옥이 아닌 부분이 있었다.

지옥에서는 망자들이 불에 타며 신음했고, 지옥이 아닌 곳에는 고요한 법정과 집행관들의 개인 공간이 존재했다.

법정에서 가장 높은 의자엔 최고 집행관이 자리했다.

보랏빛 광택이 흐르는 가파른 계단을 스무 번 디뎌야 그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

등받이가 웬만한 장정의 키만큼이나 높았다.

그 의자에는 한 사내가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갈색 피부를 지닌 거구의 남자였다. 짧게 깎은 은발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곤두섰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금안 위로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많아야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엔 수백 년 묵은 권태가 가득했다.

오벨론.

그는 다부진 상체 위에 집행관을 상징하는 띠를 대각선으로 둘렀다. 띠의 어깨 부분에는 여신 시에나의 눈꽃 문양 인장이 자리했다.

신의 권한을 일부 위임받았다는 표식이었다. 집행관인 그는 중죄를 저지른 망자들의 재판관 역할도 겸하며 그들의 처벌 수위를 결정했다.

오벨론의 정면에는 제1 집행관 바일론이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하게 서 있었다.

커튼처럼 길게 드리운 은발이 허리춤까지 오는 사내였다. 그의 새카만 망토 위에도 같은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황제 엘리엇의 편지를 유심히 읽던 오벨론의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초상화라.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오벨론 님.”

바일론은 청력이 없었다. 그의 진홍색 눈동자가 오벨론의 입 모양을 집중해서 해독했다.

“흠, 내 모습이 인간 눈엔 어찌 보일지 궁금하긴 한데….”

“황제의 요구를 들어주실 참입니까?”

“장인 되실 분이 아니더냐. 얼굴을 알려 달라니 뭐, 알려 주긴 해야지.”

문제는 초상화를 누가 그리느냐였다. 이곳엔 살아있는 인간이 출입할 수 없었다. 영역을 침범한 게 발각돼 강제로 끌려와 구금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림 그릴 줄 아느냐, 바일론?”

“그럴 리가요. 예술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흠, 지금 잠자는 자들 중에 그림쟁이가 있으려나?”

바일론은 10여 년 전 잡혀 들어온 침입자의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숲에서 붓 들고 덤비려던 놈이 하나 있긴 합니다.”

“이따가 잠깐 깨워 보아라. 다 그리면 내가 다시 재워놓을 테니.”

“알겠습니다. 재료는 바로 구해 오겠습니다.”

아직 숲으로 난 숨구멍이 열려 있었다.

어느새 까마귀로 변한 바일론은 그 위로 유유히 날아올랐다.

그가 사라지자 오벨론은 황제의 서신을 다시 훑었다.

황제의 편지 내용은 언제나 첫머리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왕 오벨론은 보시오.」

“…마왕이라. 이런 거창한 호칭은 매번 왜 붙이는지 모르겠군.”

“저흰 마물이라 불리는데요. 그나마 마왕이 낫지 않습니까.”

오벨론의 혼잣말에 대답한 이는 제2 집행관 스텔론이었다.

여성의 외관을 한 스텔론은 흰 살결과 새카만 단발머리가 대비를 이루는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기척 없이 다가와 한 단 낮은 곳에 위치한 오른쪽 의자에 배석했다.

“…처음엔 조롱인가 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황제도 모르진 않을 터인데. 살아있는 인간에겐 상처 하나 못 입히고, 햇빛 아래선 숨도 못 쉬는데 마왕은 무슨.”

오벨론은 씁쓸히 자조하며 의자 아래에서 석판을 꺼냈다.

“저도 가끔 답답하긴 합니다. 산 자들은 무장해제하고 재워두는 게 전부니까요. 근데 답신을 벌써 하십니까?”

스텔론이 물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상자에서 종이와 깃펜을 꺼내 상관에게 건넸다.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내 신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황녀의 초상화를 달라고 하시렵니까?”

“그래. 얼마나 남았더라, 내 신부가 온다는 날이.”

스텔론의 기다란 손가락이 차례로 접혔다.

“다섯 달 남짓일 겁니다.”

“…재판 좀 하다 보면 금방 지나갈 시간이구나.”

다섯 달이든, 오 년이든 팔백여 년을 살아온 오벨론에겐 비슷한 단위처럼 느껴졌다.

“참 궁금하단 말이야. 내 신부가 제 발로 올지, 아니면 남의 발을 빌어서 올지.”

“전 후자에 겁니다. 황녀를 데려온다는 자가 이미 황궁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흠…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오벨론은 순식간에 답신을 완성했다.

그는 답신이 놓인 석판을 한쪽에 치워놓고 오른쪽에 놓인 거대한 수정구를 잡았다. 그 옆에는 기다란 쇠못이 한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럼 재판 바로 시작하지. 다음 망자 올려 보내라 해라.”

쇠사슬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제3 집행관 젤론이 망자 하나를 끌고 오고 있었다. 흰자위가 싯누런 반라 상태의 깡마른 남자였다.

젤론은 망자를 법정 한가운데 세워두고 옆으로 물러났다.

오벨론은 심드렁한 얼굴로 망자에게 물었다.

“지옥불 맛은 좀 어떻더냐?”

“흐으…, 하아…, 이제 그만….”

망자의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감 속에 진동했다. 그의 몸은 지옥불에 담겼다가 나왔다기엔 화상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나오자마자 피부가 바로 재생된 탓이었다.

“미지근한 정도로만 지졌는데 엄살은.”

오벨론은 피식 웃으며 수정구를 툭툭 두들겼다. 그 속에서 망자가 생전에 저지른 범죄 장면이 고스란히 재생됐다.

“피해자 중에…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있구나. 죄질에 비해 너무 곱게 살다 죽었어.”

“…그, 그게, 너무 딸 같아서.”

오벨론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찍 내뱉었다.

“뻔해. 너무 뻔해. 재미없는 놈들한테는 맛보기로 옷부터 입혀줘야지, 안 그래? 헤슬론.”

“네, 오벨론 님.”

포니테일을 한 고양이상의 집행관이 즉시 대답했다.

“가져와.”

오벨론의 명령에 제4 집행관 헤슬론이 불에 달궈진 쇠 갑옷을 가져와 망자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망자는 조금도 저항할 수 없었다. 헤슬론의 마력이 그의 근육을 모두 굳혀놨기 때문이다.

“으… 으어어어… 으어억! 자, 잘못했…!”

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살 타는 냄새가 났다. 하지만 살이 탄 자리엔 또 다른 새살이 순식간에 돋아났다. 덕분에 고통의 세기는 최대한으로 유지됐다.

“…잘못인 걸 알면 저지르질 말았어야지. 이 말도 벌써 몇 억 번은 한 것 같은데.”

오벨론은 수정구 옆에 놓인 그릇에서 대못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대못 끝이 용암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시끄러우니까 먼저 목구멍에 하나 박고. 명치랑 사타구니, 양쪽 겨드랑이에 하나씩. 딱 다섯 개만 박겠다.”

“허어….”

“죽으면 다일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내 덕에 사후 처벌은 꽤 체계적으로 돌아가서.”

“으으으…! 으어어억!”

망자의 신음은 그치지 않았다. 목덜미가 굳어 고개를 저을 수조차 없었다.

오벨론은 커다란 손으로 대못 다섯 개를 집어 든 채 계단을 한 단씩 내려왔다.

“허으으….”

망자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시뻘건 못 끝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헤슬론.”

“네.”

“묶어.”

헤슬론이 검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자 십자 모양의 형벌대가 올라왔다. 그녀의 손짓 한 번으로 망자의 사지가 그 위에 순식간에 묶였다.

어느새 갑옷은 시뻘건 쇳물이 되어 망자의 몸을 타고 흘렀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극한의 통증이 찾아왔다. 꽉 악문 어금니가 으드득 갈렸다.

까맣게 녹았던 망자의 피부는 거짓말처럼 재생됐다.

오벨론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망자의 몸을 세심하게 살피며 못이 박힐 자리를 손끝으로 하나하나 짚었다.

그의 한쪽 손아귀엔 어느새 집행관의 망치가 들려 있었다.

“인간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 뭐 그것도 꽤 아프긴 하겠지만, 잠깐에 불과하잖아.”

탕.

“고통은 영원해야 제맛인데. 안 그래?”

침묵 속에서 고통의 향연이 시작됐다.

***

“전하, 에이바 볼드윈 공녀가 찾아왔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 들려왔다.

테렌스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소파로 향했다.

아마 공녀는 작별 인사를 하러 왔을 것이다.

썩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인사는 얼굴을 마주 보며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들어오라고 해.”

에이바는 무도회 이후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중앙궁 서관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황후의 시녀 일을 그만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비 자리에 더는 욕심이 없다는 신호였다.

문이 열리고 에이바가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수수한 회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화장기도 없었고,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은 채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앳된 얼굴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희 꽤 오랜만이죠?”

“잘 지냈나? 공작저로 돌아간다고 들었는데.”

“네. 짐 다 싸 놓고 왔어요.”

에이바는 테렌스의 맞은편에 사뿐히 앉았다.

“…무도회에서 춤춘 그 흑발 아가씨,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 아가씨랑 만나시는 거죠?”

“그건 공녀가 알 바가 아니고.”

“뭐, 이젠 궁금하지도 않은걸요.”

에이바는 어깨를 한 번 으쓱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줄 서려고 온 거예요.”

“줄?”

“아직 아버지, 아니 볼드윈 공작 마음에 안 들죠?”

“…또 그 얘기인가.”

공녀는 과거에도 한 차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전하께서 수상히 여기고 조사하고 계신다는 거 알아요. 꼬리가 안 잡혀서 답답하셨을 거예요.”

“…….”

테렌스는 답하지 않았다.

의도가 불분명한 질문엔 침묵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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