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네 존재 자체가… 내겐 별 볼 일인데.”
테렌스의 섬세한 손끝이 그녀의 오른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네 눈빛과 표정, 말투, 성격. 전부 내겐 별 볼 일이야. 내 삶을 통틀어 너만큼 특별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하하, 그런가요….”
“여기도, 여기도, 여기도… 특별하고 아름다워. 이 모습을 나만 안다는 건 내 삶에 더없는 특권이야.”
“…가, 간지러우니까 그만해요.”
밀어를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발레리의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래. 오늘도 마음껏 정복해 봐.”
테렌스는 발레리의 허리를 감아 허벅지 위에 앉혔다.
발레리는 그 위에 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입술을 시작으로 점점 넓은 부위가 포개졌다.
거친 숨결이 수백 번씩 오갔다.
그녀가 테렌스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내질렀을 땐 이미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레리.”
“네.”
“침대에서 말고, 평소에도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나?”
“둘만 있을 땐 그럴게요.”
테렌스는 옆에 누운 발레리의 짧은 흑발을 손갈퀴로 빗겼다. 발레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손길을 음미했다.
사실 그는 발레리가 공대조차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가식 한 꺼풀 없는, 한 점 거리낌 없는 사이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녀와 가장 가까운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 점에서 여전히 켄드릭 프레이저는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질투가 더 심한 쪽은 나야.”
“흠, 그런가요.”
“난 아직도 그자가 신경 쓰인다.”
“…켄드릭이요?”
발레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테렌스는 줄곧 그의 존재를 거슬려 했었다.
“얼마 전에 네가 술에 취해 그자에게 업혀 들어갔단 말을 들었어. 며칠 잠도 안 올 정도로 분하더군.”
“아하하… 그날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얼마 후 께름칙한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 사건은 테렌스가 영영 몰랐으면 했다.
“혹시 그자도 우리 사이를 알고 있나? 듣자 하니 우리가 발코니에 있을 때 널 찾았다던데.”
“…뭐, 대충 눈치챈 것 같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어디 떠벌리고 다닐 애도 아니고요.”
“발설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알아요. 안심하셔도 돼요. 저 걔한테 아무 생각 없으니까….”
발레리는 말끝을 맺다 말고 스르륵 잠들었다. 그녀는 몹시 피곤했다. 오늘도 대부분의 유희를 주도했기에.
꿈속에서 뭔가를 먹고 있는 건지, 잠든 발레리는 입을 계속 오물거렸다. 테렌스는 꼬물대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널 매일 품고 싶은데. 계속 욕심만 늘어나는군.”
테렌스는 잠든 연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입가에 깊은 보조개가 어렸다.
연인이 같은 이불 속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다.
한 달 내내 살인적인 일정으로 들볶던 건국제도 끝났다.
테렌스는 눈을 감았다. 이 평화로운 밤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간절히 바라며.
***
—테렌스, 나 자주 보고 싶죠?
—당연한 말을.
—그럼 침실 창문은 열어 두세요. 도둑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어요. 안 들키고 만나려면 이게 최선이니까.
테렌스는 발레리의 당부에 따라 침대 옆의 창문은 절대 잠그지 않았다.
이후 발레리는 정기 밤손님이 되어 하루걸러 침실을 찾아왔다.
테렌스는 매일 밤 와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발레리는 힘들다고 했다.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무한대는 아니라며.
그는 힘들면 잠만 자고 가라고 말했다.
—저 가만둘 자신 있어요?
발레리의 물음에 테렌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프리다의 검술 수련에 대한 정기 보고 시간은 따로 잡지 않기로 했다. 발레리가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베갯머리에서 들려주었으니까.
그리고 수일 후.
새벽같이 집무실로 출근한 테렌스는 커피를 마시며 결재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레이븐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일찍 나오셨군요, 전하. 끼리도 안녕.”
“…네 멋대로 이름 붙이지 마라.”
테렌스의 책상 위에는 언제부턴가 정체불명의 코끼리 봉제 인형이 자리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난데없이 등장한 인형이었다. 레이븐은 그 정체가 늘 궁금했으나 무뚝뚝한 상관은 질문에 답해주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 테렌스는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출근했다. 집무실 책상에 두고 종일 일하다가, 퇴근할 때 침실로 데려가 껴안고 잤다.
레이븐은 그를 극구 말렸다.
—전하, 나이 반오십에 무슨 애착 인형입니까. 다 큰 성인이 그러고 다니면 이상한 소문납니다. 그냥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에 정착을 시키세요.
마침내 코끼리 인형이 둥지를 튼 곳은 바로 이곳, 집무실 책상이었다. 테렌스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리다.
아직 이름이 없는 이 인형은 고단한 업무도 잊게 해주는 활력소였다.
테렌스는 일에 집중하다가도 주기적으로 인형에 시선을 뺏겼다. 그럴 때마다 입꼬리가 느릿느릿 상승곡선을 그렸다.
지금도 딱 그러고 있었다. 레이븐은 상관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턱 끝을 문질렀다.
“참 이상합니다.”
“…아직 안 나가고 있었나?”
“그 아가씨랑 잘되신 것 같은 느낌인데, 왜 통 만나질 않으세요? 플라토닉 노선이에요? 아니면 뭐, 펜팔 같은 거 하시나?”
테렌스는 답하지 않았다. 플라토닉보단 에로스에 가까운 밀회지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전하, 그렇게 웃으실 때마다 전 극도의 공포감을 느낍니다. 또 상사병에 걸리신 건 아닌지….”
“이만 나가 봐.”
닥치고 사라지란 말이었다. 레이븐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눈알을 굴리며 밖으로 나갔다.
쿵쿵.
“화, 황제 폐하 드십니다.”
문밖에서 레이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아닌 아비의 방문이었다.
테렌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가 곧바로 들어왔다. 가벼운 차림이었다. 근처를 산책하다 잠시 들렀다고 했다.
“…프리다에게 구혼장이 또 왔다. 이번엔 진짜 일흔여덟 번째구나.”
“프리다가 내년에 떠나는 걸 아는데도, 구혼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테렌스가 의아해하며 황제에게 물었다.
“갈라반트 대륙의 아스란 제국 2황자다.”
“나이가 좀 어리지 않습니까.”
“딱 스물이다. 초상화를 보니 여태 청혼한 놈 중에 제일 낫더구나. 자기는 황위에 관심이 없으니, 프리다와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다고 하더군.”
“…프리다의 발표 내용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군요.”
황제는 아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미 거절 답신을 했지만, 청혼 멘트가 마음에 들었다. 초혼에다 젊은 나이인 것도 좋았고.
“문득 궁금해지더구나.”
“무엇이 말씀입니까.”
“…그 마왕 놈이 어떻게 생겼을지 말이다. 지상의 예의를 아는 자였다면, 이렇게 초상화부터 보내지 않았겠느냐.”
마왕이라면 오벨론, 즉 프리다의 정혼자 이야기였다.
칼레바니아에서 그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최고 집행관, 이른바 마왕에 등극한 건 엘로이스 황제가 나라를 건국하기 직전이었으니, 거의 700년이 되어간다.
테렌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초상화를 한번 요구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곧 그믐날이니 창가에 서신을 내놓으시지요. 거절당해도 손해 볼 거 없지 않습니까.”
“흠… 그리해 봐야겠다. 근데 테렌스, 안색이 좋아 보이는구나.”
아들의 낯빛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의외였다. 분명 건국제 내내 바쁜 일정에 시달렸고, 지금 일도 적지 않을 터인데.
“…그렇습니까.”
“대신들이 그러더군. 건국제 폐막 회의 때 네가 웃는 걸 봤다고.”
“제가 말입니까?”
내가 그랬나. 테렌스는 얼떨떨했다. 웃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따금 발레리를 떠올렸던 게 표정에 드러났나 싶었다.
“그 하마는 무어냐?”
황제가 책상에 놓인 인형을 가리켰다. 황제 쪽에선 인형의 커다란 회색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마가 아니고… 코끼리입니다.”
대답하는 테렌스의 입꼬리가 슬슬 말려 올라갔다.
아들이 웃고 있었다. 볼우물까지 만들면서.
황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테렌스, 너….”
“네, 폐하.”
아차, 또 정신을 빼놓고 웃어버린 모양이었다. 테렌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얼굴빛을 바로 했다.
“혹시 어디 아픈 게냐? 건국제 때 너무 무리하는 듯하더니….”
“아뇨, 아닙니다. 멀쩡합니다.”
웃었다고 아픈 사람 취급을 받다니. 그동안 얼마나 안 웃고 살았던 거지. 테렌스는 과거를 잠시 돌이키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황제는 아들의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우뚝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아들 테렌스는 예의상의 웃음조차도 지을 줄 모르던 놈이었다.
“쟤가 인형을 좋아했었나….”
***
—도둑도 아니고.
발레리는 테렌스의 말을 여전히 마음에 담고 있었다. 별 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 내가 도둑이 아니면 뭐야. 맞는 소리 했는데 뭘. 황실 보검 들고 튈 거고, 나중엔 함께했던 기억도… 혼자 가져갈 거잖아.”
방에서 홀로 잠을 청할 때마다, 발레리는 저 자신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 좋자고 하는 연애였다. 마음대로 시작하고, 마음대로 끝맺고, 마음대로 그 흔적을 지워버릴.
테렌스와의 밤은 갈수록 황홀해졌다.
발갛게 익은 눈가. 귓가를 데우는 뜨거운 숨. 쾌감에 마취된 듯 넋 놓은 표정. 겹칠수록 잘 맞는 몸. 점점 그에게 중독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톡톡했다.
새벽빛을 맞으며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나면, 딱 그만큼의 죄책감이 후유증으로 따라왔다.
“어쩌자고 시작한 걸까.”
아마도 파국으로 끝날 관계였다.
열심히 올려도 언젠가 불에 타 폐허가 될 건물이고, 곧 파도가 몰아칠 해변에 쌓아 놓은 모래성이었다. 손끝으로 톡 건드리면 처음부터 끝까지 맥없이 쓰러질 도미노였다.
다 안다. 끝을 알면서도 발레리는 애욕 앞에서 매번 무너졌다.
사람이 갖고 싶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전 처음 품어보는 감정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죄책감에 끙끙 앓다가도 한나절이 지나면 어김없이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그리웠다.
호수처럼 청청한 그의 눈동자가. 너른 품에서 물씬 나는 특유의 살 냄새가. 이곳저곳에 와 닿는 찰기 있는 입술이. 귓가에 바짝 속살거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안으면 안을수록 더 깊은 갈증이 일었다.
‘어차피 끝날 사이인데 너무 빠지지는 말자.’
이런 다짐은 소용없어진 지 오래였다.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황태자궁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테렌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발레리에게 제 왼팔을 베여 주며 이렇게 물었다.
—매일 밤 찾아와줄 순 없겠나?
굳이 관계하지 않아도, 옆에서 자는 모습만 지켜보면 안 되겠냐고.
솔직히 발레리는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 밤을 그에게 투자할 순 없었다.
이러려고 들어온 황궁이 아니었다.
그의 품 안이 안온해질수록, 발레리는 늘 본분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이러나저러나 그녀의 본업은 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