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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01)화 (101/173)

101화

황궁 중앙 게이트 앞에 펼쳐진 광활한 광장.

이곳엔 황녀의 마지막 인사를 보러 온 수만 명의 백성으로 이미 북새통을 이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광장을 꽉꽉 메운 백성들은 언제나처럼 나뭇가지를 흔들며 황녀를 응원했다.

모든 가지 끝에는 푸른 리본이 달려 있었다. 프리다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닮은 색상이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황궁 중앙 게이트는 상당히 높은 성벽 아래 위치했다.

황제 부부는 그 꼭대기에 설치된 발코니에 먼저 올라 있었다.

그들은 구름같이 모인 인파를 내려다보았다.

“작년의 두 배는 되는 것 같군.”

“…무도회 때 프리다가 발표한 서신이 파급력이 컸나 봐요. 기사가 크게 나기도 했고.”

부부의 모습은 아직 백성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황궁 마법사들이 인적을 감춰 주는 베일을 쳐 놨기 때문이다.

“후우, 내 딸이지만 정말 발칙해. 우리 모르게 그런 내용을 발표하다니.”

“혹시나 못 돌아오면 백성들에게 행방을 설명해야 하니까… 여행이라는 핑계를 댄 거겠죠….”

“황후, 우리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 근데 요놈들 왜 아직 안 올라오지?”

마침 프리다와 테렌스는 호위 마법사들과 함께 게이트 뒤쪽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어요.”

“어어, 이제 왔니, 프리다.”

“호위 인력이 워낙 많아서 동선이 좀 꼬였습니다.”

테렌스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황태자와 황녀까지 발코니에 이르자 황궁 음악대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단순하면서도 씩씩한 멜로디. 칼레바니아 찬가였다.

음악이 끝났다.

중앙 게이트 앞을 굳건히 지키던 병사들은 뒤돌아 경례한 뒤 다시 경계태세를 취했다.

드디어 황궁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들어 발코니를 가리던 베일을 소멸시켰다.

그러자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짠, 하고 등장했다.

부부는 맨 앞으로 더 나아와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들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었다. 황제는 한 손에 쥔 홀을 번쩍 들었다. 그 끝에는 군주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는 황금 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군중들의 박수갈채와 함성이 높다란 가을 하늘을 찌를 듯 울려 퍼졌다.

황제 부부가 인사를 마친 뒤, 테렌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도회 때만큼이나 화려한 흰색 제복을 입은 채, 그는 왼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테렌스의 등장에 다소 음역대가 높은 함성이 터져 나와 광장을 뒤흔들었다. 특히 여성들이 열광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발레리는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고 군중 속에 합류해 있었다.

그녀는 진작부터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 인파 속에 놓인 건 처음이었다.

“으으, 고막 찢어질 것 같아.”

발레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테렌스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눈부신 백금발 아래 반듯하고 정갈한 이마가 보였다. 황태자라는 지위를 빼놓고 보더라도, 용모가 수려하고 기품 있는 남자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이렇게 열광하는 건 당연한 일 같았다.

다만 그는 웃지 않았다. 과거에 질리도록 보았던 그 냉엄한 얼굴이었다.

“…예전엔 나도 저 얼굴밖에 몰랐었는데.”

테렌스의 얼굴에 후광이 겹치는 듯한 착각에, 발레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 보조개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내 몸 곳곳에 입 맞추던 남자가 과연 맞는 건지.

가까이서 보는 테렌스와 멀리서 보는 테렌스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무도회 때도 발레리는 그에게서 위화감을 느꼈었다. 이렇게 대중들 앞에 선 모습은 더더욱 낯설기만 했다.

발레리는 씁쓸히 웃었다.

“일단 확실한 건, 나는 저 사람 옆자리에 더럽게 안 어울린다는 거야.”

인사를 마친 테렌스는 뒤로 빠졌다.

백성들은 가슴 위에 두 손을 꼭 모은 채 다음 사람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던 인물.

무려 백오십 년 만에 황실에 태어난, 칼레바니아 황실의 진귀한 보배.

프리다는 웨딩드레스를 사각거리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성스러운 자태가 드디어 대중 앞에 드러났다.

백성들은 순백색 드레스에 감싸인 프리다를 보며 함성을 멈추었다.

거대한 광장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수만 명이 동시에 말을 잃고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황녀의 모습은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다.

프리다는 찬란하게 미소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흔들어 보였다.

이제야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고 목 놓아 함성을 터뜨렸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광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 부부와 테렌스가 등장했을 때의 함성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음량이 많았다.

흡사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으아아악! 황녀니이이임!”

옆에 선 남자의 고함에 발레리는 정말 기함할 뻔했다.

발레리는 픽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풋, 테렌스는 황녀님에 비해 인기가 좀 떨어지는 편이었네.”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웨딩드레스 차림보다는 프리다의 건강한 모습이 더 반가웠다. 모두가 그녀의 앙상하게 마른 몸을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프리다의 몸은 멀리서 봐도 이전과는 달랐다.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고, 살이 올라 생기가 돌았다.

달라진 황녀의 모습에 백성들은 끊임없이 열광했다.

“황녀님! 건강해 보여요!”

“여행 잘 다녀오세요!”

“여행 끝나면 꼭 돌아오셔야 해요!”

“좋은 분 만나세요!”

저 높이 있는 프리다에게 가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백성들은 저마다 덕담을 건넸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

프리다는 촉촉해진 눈을 사랑스럽게 휘며, 바닥에 놓인 꽃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주먹에 가득 쥔 꽃잎을 광장을 향해 힘껏 흩뿌리기 시작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재회의 희망을 담아.

‘다들 여기까지 나와 주어서 고마워요. 언젠간 다시 볼 일이 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게요.’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있던 황궁 마법사들은 황녀가 뿌리는 꽃잎이 고루 날리도록 마법으로 바람을 쏘았다.

환희에 찬 백성들의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팔랑거리던 분홍색 꽃잎 한 장이 발레리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굳은 의지를 다졌다.

“황녀님의 그 미소, 제가 꼭 지켜드릴 거예요. 저도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강해질게요.”

***

여신 축일의 깊은 밤.

발레리는 황태자궁 외벽을 가뿐히 타고 올랐다. 연인의 침실이 2층 높이에 불과한 건 행운이었다.

삐걱.

살짝 건드려본 창문 경첩이 반가운 금속음을 냈다.

안 잠겼네. 좀 놀래켜 볼까.

발레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창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테렌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옷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테이블에 기름등 하나를 켜고서.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발레리는 창틀에 앉아 그의 독서 장면을 몰래 구경했다.

“안녕하셨어요?”

테렌스는 쭈뼛 놀라 책을 덮었다.

방금 들린 건 분명 발레리의 목소리였다.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환청까지 들리다니. 정말 단단히 빠져—”

“환청 아닌데요. 진짜 저예요.”

테렌스는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가 겉옷 단추를 풀며 다가오고 있었다.

연청색 눈동자 한가운데 동공이 멍하니 벌어졌다.

정말이지 그녀는 신출귀몰이었다. 지난번에 뛰어내렸던 그 창문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왔다.

“대체… 어떻게 창문으로 올라온 거지? 도둑도 아니고.”

도둑.

방금 도둑이라고 한 건가.

본업을 간파당한 발레리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콧마루에 땀이 구슬구슬 맺혔다.

어떡하지. 나 도둑인 거 티 많이 났나. 걸릴 땐 걸리더라도 문으로 들어올 걸 그랬나.

발레리는 열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으로 그녀는 핑곗거리를 찾았다. 오늘 황태자궁 경비는 정말 철통같았다. 담은 용케 넘었으나 건물로 잠입할 길은 창문뿐이었다.

그리고 2층 정도면 도둑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올라올 수 있는 높이 아닌가. 

“도, 도둑이라뇨… 그냥 안 들키고 들어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것뿐인데요….”

정곡을 찔린 발레리는 울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테렌스는 조금 전 자신의 언사를 돌이켰다. 왜인지 도둑이라는 표현에 속이 상한 것 같았다.

테렌스는 얼른 머릿속에서 그녀를 달랠 말을 찾았다.

“도둑 맞지. 내 마음을 훔쳤으니까.”

“풉, 뭐래 진짜.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발레리는 울상을 풀고 금방 헤실거렸다. 식상한 표현도 그의 입에서 나오니 듣기는 좋았다.

그녀는 테렌스의 맞은편 의자에 겉옷을 벗어 걸었다.

“근데 말이에요, 전하. 여자들한테 인기가 꽤 좋으시더라고요?”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지. 질투라도 하는 건가?”

“그럼 안 하게 생겼어요? 손 흔드실 때 여자들 함성이 어휴… 귀청 폭발하는 줄 알았어요.”

발레리는 귀 막는 시늉을 하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테렌스는 입술을 감쳐물고 웃음을 참았다. 발레리가 이런 엉뚱한 부분에서 질투심을 보일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질투가 본인의 몫인 줄로만 알았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발레리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니 속이 퍽 유쾌했다. 이제야 쌍방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푸하하….”

결국 웃음이 터졌다.

“왜 웃으시는데요? 인기 많아서 행복하세요?”

“…발레리, 질투할 거 없어. 황태자라고 하면 다들 환상이 있으니 그러는 거지. 알고 보면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내잖아.”

“으음, 별 볼 일 있으시던데. 우리 나머지 대화는 저쪽에서 해볼까요?”

발레리가 히죽히죽 웃으며 테렌스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침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쌀쌀한 가을밤, 그들은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의 몸을 뭉근히 덥혔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몸에서 제 흔적이 사라질세라 또다시 새로운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지분거리자 발레리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으, 목에는 하지 마세요.”

“왜?”

“손수건 매고 다니는 거 귀찮아요.”

“스카프 사 줄까?”

“군복에 무슨 스카프를 매요!”

발레리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쿵 내려쳤다. 테렌스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사실 저, 오늘 좀 기분이 이상했어요.”

“왜?”

“저 오늘 광장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었잖아요.”

“음, 그런데?”

“저 높이 보이는 황태자랑 제가 이러는 사이라고 생각하니까, 묘한 정복감이 들더라고요? 사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전하가 아니라 저잖아요.”

테렌스가 동작을 멈췄다. 그는 발레리에게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봤다.

“발레리.”

“…네?”

발레리는 본인이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품속을 뜨겁게 파고들던 테렌스가 갑자기 정색하니 덜컥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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