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마음 없이 몸만 겹쳐서 해결되는 건 없어. 너도 모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
발레리는 테렌스의 말에 전혀 반박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말을 인정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는…. 네 입술에 진심이 한 점이라도 묻어 있길 바랐다.”
“…네?”
“이런 허울뿐인 관계에 겁도 없이 뛰어든 이유다. 체온을 나누다 보면 네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이나마 풀리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지금 무슨 소릴….”
발레리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무릎에서 벗어나 뒷걸음질 쳤다.
테렌스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와 반 발짝 거리에 마주 섰다.
그는 눈을 반쯤 내리감았다. 몹시 애통한 얼굴로.
“하지만 이제 보니 정말 가망 없는 일이었구나. 너는 내 껍데기만 가져가겠다고 계속 못 박고 있으니.”
“아니 왜…. 왜 그런 쓸데없는 기대를 해요. 저는 처음부터 그러겠다고 했었는데….”
발레리는 홧홧해진 귀밑을 손등으로 식히며 말끝을 흐렸다. 새카만 눈동자가 큰 폭으로 흔들렸다.
테렌스는 왼손으로 제 가슴팍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 판막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힘줄이 내돋친 그의 손아귀가 셔츠 한쪽을 제멋대로 쥐어짰다.
“그래, 내 고백은 듣기 싫다고 하니 고이 넣어두지.”
지금 이 남자, 고백이라고 한 건가. 발레리는 마구잡이로 요동치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하려 애썼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군.”
“뭘….”
“난 마음에도 없는 여인에게 입 맞추는 취미 따윈 없다.”
테렌스가 말을 맺는 순간.
그의 왼쪽 눈동자에서 눈물 한 줄기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아….”
예고 없이 나타난 눈물에 발레리는 크게 동요하며 얼어붙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이토록 냉랭한 얼굴로 눈물을 떨굴 거라고는.
깜짝 놀란 발레리는 얼른 그의 눈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테렌스는 고개를 흔들며 손길을 거부했다. 그는 솟구치는 울음을 삼키며 통보했다.
“한동안…. 이곳에 찾아오지 않겠다.”
“…뭐라고요?”
발길을 끊겠다는 말에 발레리는 어깨를 움찔했다.
“이 관계에 대해 각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너도, 나도.”
“그럼 보고는….”
“그러지 않아도 하려던 말이야. 앞으로 한 달은 건국제 기간이라 보고받을 시간이 안 난다.”
테렌스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셔츠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금방 단정한 차림새를 되찾은 그는 발레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발레리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가 떨어졌다.
“…네가 날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담백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테렌스는 그녀의 방을 홀연히 떠났다.
***
문이 눈앞에서 닫혔다.
발레리는 망연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길 그리워했으면 좋겠다니.
그런 짓궂은 주문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에겐 주문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안 그래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생각나는 인간을…. 무슨 수로 더 그리워하라는 거야….”
그녀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지금 보니 마른세수가 아니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흥건하게 묻어나 있었으니까.
“난 또 왜 질질 짜고 있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눈물을 참지 않고, 나오는 대로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
서로 좋아하지 말자고.
그 말은 사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의 고삐를 억지로라도 잡아보고 싶어서.
어떻게든 너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선언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아흑, 젠장… 나한테 진심이면 어떡하라는 거야….”
그녀가 고백을 틀어막자, 테렌스는 제멋대로 진심을 토해놓고 가버렸다.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속마음을 전하는 건,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발레리는 바닥에서 한참을 훌쩍이다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눈물을 훔쳐낸 녹갈색 옷소매가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무작정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잊은 채.
“으흑…. 그냥 잠깐 즐기다가…. 싫증 나면 각자 갈 길 가자는 게 어려운 거야? 그게 그렇게 어렵냐고….”
어려운 게 당연했다.
눈에 들어온 이성을 유희 상대로만 대하는 일.
도적단 동료들, 그것도 일부만이 하던 짓을 무려 테렌스에게 바라고 있었으니.
“흐윽…. 누가 좋아해 달랬냐고….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마음 바란 적도 없는데…. 아흐흑….”
그녀의 울먹임을 고스란히 빨아들인 베갯잇은 금방 눅눅해졌다.
얼마나 더 울었을까.
발레리는 녹초가 된 몸을 힘겹게 뒤집어 정자세로 누웠다.
어느새 천장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깊은 밤이 들어서는 건 금방이었다.
기름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방 안을 밝혔다.
테렌스의 입술을 처음 맛봤던 그날처럼.
정말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입맞춤이었다.
맥주 축제의 들뜬 분위기와 반짝 피어난 호기심. 그 두 가지가 만나 갑작스레 발화한 불장난인 줄만 알았다.
“특이해서. 아니면 신기해서. 그것도 아니면 재미있어서 건드려본 줄 알았지….”
작위를 주겠다고.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자고.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잠깐의 일탈에 불과했던 키스를, 테렌스가 왜 그리 진중하게 수습하려 했는지.
타고나길 너무 진지한 인간이라 책임감에 압도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작위를 준다니. 정말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게 진심에서 우러난 거였다니.
진정 나 같은 걸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
“아니지, 발레리. 내가 아니잖아. 황태자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발레리 로빈슨이잖아.”
발레리는 도리질을 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은 벽돌색 입술에 깊게 팬 잇자국이 희멀겋게 남았다.
“뭐? 껍데기? 너야말로… 흐흑…. 내 껍데기만 좋아하는 거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 줄 알고….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흐윽….”
발레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까맣게 모르는 테렌스에게, 앞으로 안겨줄 수 있는 건 충격과 상처, 분노와 실망뿐이라는 것을.
그가 아껴 마지않는 여동생을 데리고 사라질 날이 야금야금 가까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
그런데 왜 자꾸 파렴치한 욕심이 명치끝에서부터 치솟는 건지.
입을 맞춘 뒤에는 그의 몸을 원했다.
그것뿐인 줄 알았다. 감정 없이 몇 번쯤 밤을 보내면, 점점 미련이 사라질 줄만 알았다.
이제 보니 그걸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심 다른 것도 탐내고 있었다.
테렌스가 이 적막한 방 안에 마음대로 던져놓고 가 버린, 티끌 한 낱 없이 투명한 진심을.
“나는 황궁에…. 사람 몇 명을 파탄 내려고 들어온 걸까.”
발레리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눈구멍에 고여 찰랑이던 눈물이 여러 줄기로 미끄러져 내렸다.
발레리는 또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었던 눈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황궁에 들어온 목적은 처음부터 프리다였고, 지금도 그것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다고.
테렌스. 그는 계획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그래. 너한테는 아무 관심 없었어. 생각할 시간? 그딴 거 필요 없이 바로 정리하자. 한 달이면 되겠지…. 아무것도 없는 황태자와 병사 사이로 돌아가려면.”
어쩌면 건국제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녀를 단단히 옭아매기 시작한 낯선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
어떻게 잠들기는 한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는 새벽빛이 부옇게 들어오고 있었는데.
하지만 눈꺼풀이 좀체 열리지 않았다. 위아래 속눈썹이 서로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어서.
발레리는 벌겋게 부은 눈을 양손으로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한낮의 햇살은 창문을 두 번 통과해도 여전히 밝았다. 책상 앞에 거꾸로 걸어 말려둔 스타티세 꽃다발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아 맞다…. 쪽지가 와 있었지 참.”
어제저녁 방문을 따고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발밑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했었다.
유력한 발신인은 둘이었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 아니면 펠런 두목 피어스.
둘 중 누구에게서 왔든 테렌스가 봐서는 안 될 내용일 게 뻔했다.
그래서 순간의 판단력으로 바로 쪽지를 걷어차 책상 밑으로 넣어버렸다. 테렌스의 호기심을 차단하기 위해.
이제 그 내용을 확인해야 할 텐데.
발레리는 쪽지를 다시 찾으려고 책상 앞에 엎드려 바닥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책상 서랍 밑쪽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발레리는 문간에 세워둔 검을 뽑아 책상 밑으로 넣어 휘저었다.
한데 뭉친 먼지 덩어리와 함께 쪽지 하나가 딸려 나왔다.
그녀는 쪽지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고서 종이를 천천히 펴 보았다.
「며칠 전부터 황성에 머무는 중. 8월 31일 화요일 밤 9시. 오스본 가 79번지 지하 술집 ‘클라우드 나인’ 주인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안내해 줄 것. ─ P」
P는 피어스의 약자일 것이고.
8월 마지막 날은 진작에 잡아 둔 피어스와의 중간 접선 날짜다.
“나 없을 때 케빈이 집어넣고 갔나 보네…. 근데 두목이 용케 황성까지 들어오셨구나. 황성 밖에서 보자고 하실 줄 알고 휴가 낼까 했었는데.”
피어스는 수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인물이었다.
워낙 얼굴이 널리 알려진 탓에 황성 시내를 활보하긴 어려웠다.
아무래도 술집 주인의 도움을 받은 듯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겠지 뭐. 얼굴 내놓고 다니기 힘드실 텐데 변장이라도 하고 오셨으려나….”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쪽지 밑에 그려진 약도를 자세히 살펴봤다.
기억을 되짚으며 위치를 가늠하다 보니, 퉁퉁 부은 눈이 번쩍 뜨였다.
왠지 낯이 익은 장소였다.
“뭐야 여기…. 오스본 가? 이쪽 골목길로 꺾어 들어가는 거면 황성 시내 뒷골목 구석자리인데.”
황성 시내 뒷골목. 그 근처에서 가본 술집이 하나 있긴 했다.
그것도 테렌스와 함께 갔었던.
“하, 오늘부터는 그 인간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두목도 도와주질 않으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