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자비 없는 월요일이 또 찾아왔다.
검술 수업을 위해 석실로 내려가는 길.
발레리는 다시 돌아온 일상이 녹슨 쳇바퀴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버텨내야 할까. 기름칠 없이 뻐근하게 돌아가는 이 느낌을.
“보고 싶었어요, 발레리.”
석실 문이 열리자마자, 프리다는 언제나처럼 가벼운 포옹과 달콤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저도요. 간밤에 안녕히 주무셨죠?”
발레리는 담백하게 화답했다.
오전 수련은 별일 없이 끝났다. 정신없이 땀을 흘리다 보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발레리는 언제나처럼 프리다와 켄드릭을 마주 보며 음식을 들었다.
그녀의 말수가 적어진 탓에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의 식사였지만.
후식으로는 푸딩이라는 게 나왔다.
밀가루에 달걀과 우유, 크림, 설탕을 넣어 만든 음식이었다.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를 흐물흐물한 제형이었다.
발레리는 손바닥만 한 접시를 들고, 푸딩을 한 스푼 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첫 느낌은 촉촉하고 시원했다.
곧이어 탱글탱글한 촉감의 무언가가 혀끝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잔잔하게 밀려드는 달콤함과 고소함에 눈이 절로 감겼다.
‘이 감촉…. 뭔가 익숙한데.’
최근에 느껴본 어떤 것과 굉장히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떠올렸다.
그러고 있자니 너무나도 쉽게 생각났다.
며칠 전 정신없이 물고 빨던 그것이.
타액으로 흠뻑 젖어 말캉거리던 테렌스의 입술.
바로 그 느낌이었다.
설탕 시럽을 머금은 듯 다디단 연홍색 입술을, 다시 맛볼 날이 오기는 할까.
아니, 그럴 일은 없겠지.
아마도 앞으로 계속.
“발레리?”
“헉, 발레리, 왜 그래?”
순간 켄드릭과 프리다가 크게 놀라며 발레리의 이름을 불렀다.
“왜요?”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호명에, 발레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직 목 뒤로 넘기지 못한 푸딩의 끝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켄드릭은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내 발레리를 향해 척 내밀었다.
입 주변에 뭐가 묻었나 보네.
손수건을 건네받은 발레리는 무심한 얼굴로 입가를 쓱쓱 닦아냈다.
“발레리, 거기 아니에요.”
“네?”
“눈…. 눈 밑에 닦으라고요.”
프리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두 눈을 가리켰다.
‘눈? 눈은 갑자기 왜….’
발레리가 벙찐 얼굴로 가만히 멈춰 있자, 급기야 켄드릭이 그녀의 옆자리로 와서 털썩 앉았다.
켄드릭은 발레리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어 쥐더니 그녀의 눈 밑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다소 투박한 손놀림으로 눈가와 뺨을 쓱쓱 닦아주었다.
아끼는 물건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이.
“내가 살다 살다 너 먹다가 우는 건 또 처음 보네. 눈에 뭐라도 들어갔어?”
“울어? 내가?”
그녀는 켄드릭이 쥔 손수건 끝을 만져봤다.
옅은 물기가 느껴졌다.
아래 속눈썹에도 손가락을 대봤다. 마찬가지로 젖어 있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푸딩의 맛에 너무 심취했던 걸까.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뭐야, 발레리. 너 지금 눈물 또 맺혔는데? 진짜로 우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응? 아…. 푸딩이…. 너무 맛있어서…. 으흑…. 맛있어서 그러나 봐…. 끄윽….”
발레리가 느닷없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고작 푸딩이 맛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심각한 눈으로 지켜보던 켄드릭과 프리다는 얼른 시선을 교환했다.
‘켄드릭, 발레리가 왜 이러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녀님.’
켄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프리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숙여 발레리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켄드릭도 그녀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난 이런 위로받을 자격 없는데. 발레리는 돌연 메스꺼움을 느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두 사람의 손길을 천천히 떼어냈다.
“저 괜찮아요.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요즘 좀 기분이 들쭉날쭉해서 이래요.”
“…그런 때가 있을 수 있죠. 근데 발레리, 무슨 다른 일 있는 건 아니죠? 안 그러던 사람이 이러니까 너무 걱정돼서요.”
“발레리.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꼭 이야기해. 도움은 안 돼도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한 차례 밀어냈는데도, 두 사람은 끝끝내 다시 다가와 발레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들의 위로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다.
간신히 눌러 담은 울음이 또다시 솟구치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만.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황녀님, 오후 연습 바로 시작하실까요?”
발레리는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이들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녀는 얼른 연무장으로 달려가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다. 가슴이 찔려 흠집이 난 가죽 갑옷 대신, 조끼 형태의 사슬 갑옷을 입었다.
다소 무겁기는 했지만, 민첩성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프리다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연무장에 들어왔다.
“발레리, 힘들면 오후엔 나 혼자 연습해도 되는데….”
“전혀 안 힘들어요, 황녀님. 그럼 오전에 배우신 찌르기 동작 응용해 보시겠어요?”
그렇게 오후 수련이 재개됐다.
프리다는 어제보다 시야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발레리가 일부러 비워두는 공간을 능숙하게 찾아내 그 쪽으로 유효타를 넣으려 애썼다.
속도를 좀 더 높여도 되겠구나. 발레리는 어제보다 한 단계 빠른 동작으로 프리다를 밀어붙였다.
대련 중에 가끔 시야가 흐려지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눈구멍만 작게 뚫려 있는 양철 투구가 이렇게까지 고마운 날이 올 줄이야.
완벽히 감출 수 있어 행복했다.
황녀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을 떠올리며, 또다시 짠물로 범벅이 돼버린 얼굴을.
***
프리다와의 검술 수업과 춤 연습, 그리고 저녁 식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온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젠 순간순간이 어깨를 수직으로 짓누르는 기분이다.
눈 밑이 가뭇해진 발레리는 나선형 계단을 한 단 한 단 밟아 올랐다.
“발레리.”
속이 시끄러웠다.
“발레리!”
뒤에서 불리는 제 이름조차 못 들을 정도로.
“야, 발레리!”
발레리는 커다란 손아귀에 어깨를 붙들리고서야 뒤를 돌아봤다.
켄드릭이었다. 그는 빈 접시로 가득한 쟁반을 애써 한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불러 세우기 위해.
“아, 어…. 왜?”
“왜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다녀?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미안. 왜 불렀어?”
발레리의 물음에 켄드릭은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술 한잔하자. 나 좋은 데 알아.”
어두운 층계를 비추는 촛대 불빛 아래, 그의 녹안이 감람석처럼 빛났다. 언젠가 이 눈동자를 도둑질하듯 남몰래 흘끗거리던 때가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너 황녀님 검술 연습 봐드려야 하잖아.”
“아니, 오늘은 일찍 가라고 하셨어.”
“…그렇구나.”
술이라.
그래, 술이라는 게 있었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술이라면 좋은 마취제가 될지 몰랐다.
죄책감에 쥐어 짜이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는.
그리고 켄드릭도 이제 퇴근이라니.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 그럼. 빨리 주방에 접시 갖다 주고 와. 동쪽 게이트에서 기다릴게.”
“알았어, 발레리. 조금만 기다려!”
켄드릭은 살짝 비켜난 발레리를 성큼성큼 앞질러 올라갔다.
접시가 겹겹이 얹힌 무거운 쟁반을 든 채로, 그는 층계를 한 번에 두 칸씩 디디기 시작했다.
“야, 한 칸씩 밟아! 접시 깨진다!”
그녀는 벌써 한참을 앞서가서 보이지 않는 켄드릭을 향해 소리쳤다.
“알았어!”
켄드릭의 경쾌한 대답이 위쪽에서 들려왔다.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바로 잦아들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별 망설임 없이 대부분 따랐다.
발레리가 하는 말이라면.
***
켄드릭을 따라 들어간 술집은 황성 시내 중심가에 있는 가장 큰 펍이었다.
한 번에 족히 이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하고 쾌적했다.
발레리는 사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맥주 축제 때 테렌스와 함께. 당시엔 사람이 하도 미어터져서 대기할 엄두가 안 나 돌아섰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라 그런지 한산한 편이었다.
왁자지껄하던 그때와는 분위기도 달랐다.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매장 분위기는 깔끔했다. 질서정연하게 놓인 원형 테이블은 바니시를 칠해 반들반들 윤이 났고, 모든 의자에 등받이와 쿠션이 달려 있었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자니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성 점원이 다가왔다.
점원은 둘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이 자리 어떠실까요, 손님.”
“네, 좋습니다.”
점원은 유독 켄드릭을 보며 생글거렸다.
‘아 참, 얘 남자한테도 인기 있었지….’
발레리는 잠시 테렌스의 호위 마법사인 레이븐을 떠올렸다. 그도 켄드릭을 볼 때마다 가끔 넋 놓는 표정을 하곤 했으니까.
그녀는 푹신한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살짝 노곤해졌다.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여기가 좋은 데냐? 참 너답게 양지에 있는 집을 데려오네.”
발레리는 켄드릭에게 핀잔을 줬다. 이렇게 대중적인 펍은 별로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 참, 넌 좀 음침한 데를 좋아하지. 그래도 술집이 크고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여기 바비큐가 정말 맛있거든.”
켄드릭은 카운터 뒤로 보이는 오픈형 주방을 가리켰다.
굵은 쇠꼬챙이에 꽂힌 돼지고기가 빙글빙글 돌며 익고 있었다. 고기 표면이 바직대며 맛있게 타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리는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흠씬 들이마셨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흐음…. 좋은 고기인 것 같긴 하네.”
“하하, 냄새만 맡아도 사이즈 나오지? 여기 정말 맛있어. 단장 주최 회식은 늘 여기서 할 정도였다니까.”
“그래. 술도 어디 맛있는지 보자.”
켄드릭은 나무판자로 만든 메뉴판을 들어 주류 부분을 살폈다. 와인부터 맥주, 위스키까지 웬만한 주종은 다 있었다.
“음, 브랜디로 할까?”
“뭘 그렇게 비싼 걸 마셔. 그냥 진 시켜. 빨리 취해버리게.”
“아냐, 이왕 너랑 온 거 좋은 술 먹고 싶어.”
켄드릭은 기어코 브랜디 한 병을 시켰다.
안주로는 바비큐와 함께 감자튀김도 주문했다.
“아 맞다. 너 휴가 왜 안 갔냐? 황녀님께서 너 휴가 주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발레리는 지난주 프리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켄드릭에게 물었다.
“안 간다고 말씀드렸어.”
“왜?”
“굳이 휴가 갈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퇴근은 저녁 먹고 바로 하라고 하시더라. 야간 연습은 이제 혼자 하실 수 있다고.”
“…휴가 안 가는 대신에 퇴근이 빨라진 거구나.”
“그런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