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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75)화 (75/173)

75화

테렌스는 이날 혼자서 채플을 찾았다. 따뜻한 종이봉투를 왼손에 든 채로.

그 안에는 바게트와 잘게 썰린 토마토, 미트볼, 작은 포크 두 개가 담겨 있었다.

그는 굳이 동행하겠다는 레이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왔다. 발레리를 만나러 올 때마다 곁에서 흘금대며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게 심히 거슬려서다.

그런데 발레리가 보이지 않는다. 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테렌스는 그녀의 방 옆에 있는 기도실로 들어가 벽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가 훌쩍 넘었다. 수업이 끝난 지 한참 지났을 시각이었다.

직접 석실에 내려가 볼까 하는 고민이 들 때쯤, 키 작은 철문이 삐그덕 하고 열렸다.

기다리던 얼굴이 나왔다.

“어, 일찍 오셨네요?”

“…네가 늦은 것 같은데.”

“아 그러네요, 죄송해요.”

“괜찮아. 어서 들어가자.”

테렌스의 재촉에 발레리는 복도로 나와 방문을 열었다.

발레리는 방 안에 첫 발을 들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지뢰라도 밟은 것마냥.

그리고 무언가를 툭 걷어차는 동작을 했다.

뒤따라 들어가려던 테렌스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했다.

“갑자기 왜 발길질을 하지?”

“하하, 먼지 덩어리가 큰 게 굴러다니네요.”

발레리는 저번처럼 테렌스를 책상 의자에 앉혀 놓고 정면에 서서 보고를 시작했다. 말할 때마다 그녀는 이따금씩 책상 밑을 힐끔거렸다.

“…아, 그리고 오늘은 심장을 찔렸어요.”

“뭐?”

테렌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발레리에게 다가갔다. 어딘가 다친 걸까. 그는 그녀의 녹갈색 군복 표면을 열심히 살폈지만, 딱히 핏자국이랄 건 없었다.

“아니 아니, 제 몸이 아니라 가죽 갑옷이 찔린 거예요. 다음 주부터는 좀 무겁겠지만 쇠로 된 걸 입고 할까 해요.”

“그래. 다치지 않으려면 그게 좋겠다.”

보고는 금방 끝났다.

발레리는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잡지 못한 채 수시로 움직였고, 한 발 물러난 거리에서 좀체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이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 맞추는 사이 아니었나. 테렌스는 갑자기 쑥스러운 듯 쭈뼛대는 발레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어색해하는 느낌이 들지? 내가 뭘 잘못했나?”

“아뇨. 잘못한 거 없으세요.”

“그럼 이제 입 맞춰도 되는 건가?”

“왜 저번부터 자꾸 허락을 받으세요? 그냥 하고 싶으면 하세요.”

발레리는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툴툴거렸다.

수줍은 듯 고개를 슬쩍 돌린 발레리의 모습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테렌스는 얼른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품속에 갇힌 발레리는 눈살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왜 안 해요? 입 맞춘다면서.”

“아, 해야지.”

발레리는 눈을 감았다.

테렌스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폭신하게 누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졌다. 가벼운 버드키스였다. 나비가 꽃잎에 살포시 앉았다가 날아가는 것처럼.

“하아…. 그러지 말고 좀 더 길게요.”

“…그래.”

테렌스는 발레리의 이마, 콧잔등, 입술, 양 볼, 턱 끝에 차례대로 입술을 내렸다.

그가 입 맞춘 자리마다 불긋불긋한 열꽃이 피어올랐다.

발레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익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양손 주먹 안에 진땀이 한가득 고였다.

오늘은 왜 이리 부끄러워하는 거지.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테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난히 빨갛게 달아오른 발레리의 얼굴이 낯설었다.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스킨십이었다.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었을 뿐인데, 발레리는 침을 꼴깍 넘기며 양 볼을 붉혔다.

마치 이런 접촉이 처음인 것처럼.

신선했다. 언제나 스킨십에 적극적인 발레리가 수줍음을 타는 모습은.

테렌스는 은은하게 미소하며 그녀의 감긴 눈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곳에 닿지는 못했다.

발레리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뒤로 뺐기 때문이다.

“…왜 자꾸 뽀뽀만 해요?”

투정 섞인 목소리였다.

얼굴은 여전히 터질 듯 화끈거렸지만.

“싫은가?”

테렌스의 단골 질문에 발레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허리춤을 감싸 안고 있는 테렌스를 올려다보기 위해.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또랑또랑했다.

“전하.”

“응.”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요.”

“…그래.”

“우리 말이에요.”

지금 너와 나를 ‘우리’로 묶은 건가.

테렌스는 입가에 보조개를 띄웠다. 그녀가 쓴 대명사에 기분 좋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발레리는 눈 맞춤을 피해 그의 어깨너머를 내다봤다.

그녀는 수차례의 심호흡 끝에 어렵사리 홍조를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 좋아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뭐?”

테렌스의 얼굴에서 온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서로 좋아하지 말자니.

적어도 그에게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말을…. 대체 왜 하는 거지?”

“저는 누구 좋아하고 그럴 생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전하도 이 관계를 가볍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테렌스는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왼손과 오른팔을 차례로 풀었다.

발레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반 발짝 물러섰다.

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주시하며, 테렌스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익히 알았던 사실이 뼈아프게 와닿았다.

그녀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쌍방향이 아니었다. 첫 입맞춤으로 조금이나마 통했다 여긴 건 착각이었다.

마주 댄 입술로 온기는 나눠졌겠지만 가슴의 온도는 서로 달랐을 것이었다. 이쪽이 애틋한 설렘으로 다가갔다면, 저쪽은 외로움에서 기인한 충동으로 임했다고 하니.

발레리는 확실히 얘기했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정식 연인이 아니라 잠시 몸을 맞댈 사람이라는 걸.

‘…그렇다면 방금 내 입맞춤은 네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겠구나. 욕정이 아니라 애정이 담긴 것이었으니.’

하지만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모두 엎질러져 바닥에 스며버린 물이었다. 더 이상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조금 어렵긴 하겠죠? 이렇게 만나다가 정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발레리.”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녀를 바라보는 테렌스의 두 눈에 애틋한 원망이 서렸다.

“…만에 하나 좋은 감정 생기면, 서로한테 말 안 하고 각자 정리하기로요.”

지금은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서로를 마음에 품게 되더라도, 그걸 확인할 길을 원천 차단하자는 건가.

테렌스의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왼손을 가로로 들어 두 눈을 가렸다. 혈색이 다 빠져 창백해진 그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넌 여태…. 내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이런다고 생각했나?”

그의 날 선 물음에 발레리는 침묵했다.

“…….”

불안정하게 떨리는 그의 목울대를 지켜보면서.

테렌스는 눈을 가렸던 왼손을 뻗어 발레리의 팔목을 감싸 쥐었다.

다시 드러난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서로 마음을 숨겨서 우리가 얻는 게 뭐지?”

“더 얻을 게 있나요?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잖아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셔츠 깃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두 입술이 거칠게 맞부딪혔다.

그녀는 곧바로 깊은 곳까지 침범해 왔다.

테렌스는 입천장 쪽으로 맹렬히 파고드는 그녀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다.

발레리는 그의 마른 입안을 온통 적셔놓고 나서야 입술을 거뒀다.

“이렇게요.”

“…하아.”

테렌스에겐 잠시 숨 돌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발레리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침대에 밀어 앉혔다.

그녀는 테렌스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두 번째 키스를 시작했다.

그의 어깨를 더듬던 발레리의 손은 점점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전례 없는 과감한 터치에 테렌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곧이어 셔츠 단추가 그녀의 손에서 하나둘씩 풀려나갔다.

발레리는 훤히 드러난 그의 목선을 입술로 훑어 내렸다.

테렌스의 서늘한 체향이 폐부에 깊숙이 빨려들었다. 머스크 향이었다. 은은하고 포근하면서도 어딘가 관능적인.

언제 맡아도 새로운 향을 흠씬 들이마신 뒤, 발레리는 몽롱해진 두 눈을 반쯤 열었다.

그녀는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화들짝 놀라 동작을 멈췄다.

그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아….”

테렌스는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어질해지는 아찔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전율하며.

연푸른 눈동자가 물기 어린 빛을 냈다. 촉촉이 젖은 테렌스의 눈가를, 발레리는 엄지로 살살 타이르듯 문질렀다.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자고. 그녀는 눈빛으로 그를 달래며 젖은 입술을 또다시 헤집었다.

발레리의 주도 하에 키스는 점점 격해졌다. 테렌스의 어깨가 서서히 뒤로 밀렸다. 그의 뒤통수가 침대에 닿았다.

그녀가 맨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으.”

테렌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발레리의 입술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발레리는 그새 마지막 남은 그의 셔츠 단추까지 모두 풀어냈다.

그녀가 거친 손바닥을 옷 안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테렌스의 왼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가쁜 숨을 쌔근덕대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만해.”

“왜요? 진도 뺄 생각 없어요?”

“없어.”

“…아래 계신 분은 생각이 다른 것 같은데.”

발레리는 테렌스의 바지를 힐끔 내려다봤다.

“내 의지가 아니다.”

“…우리 이러려고 만나는 거 아니었나.”

그녀의 볼멘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테렌스는 눈을 질끈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그녀와 엇갈린 방향으로 달리고 있음을 실감할수록.

정염이 사그라들자 어렴풋했던 통증이 실체화됐다. 체온을 나누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쓰라릴 줄이야.

“…외롭다.”

테렌스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네?”

“네가 이러니 내가 외롭다.”

“뭐가 문제예요? 계속하면 되잖아요.”

“아니. 이런 걸로는 결코 풀리지 않아.”

“…….”

“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룻밤을 보낸다고 외로움이 해소되진 않을 거다. 잠시 잊을 수 있을진 몰라도.”

차갑게 식은 테렌스의 시선이 그녀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언젠가 그의 눈빛이 얼음송곳 같다고 생각했을 때처럼.

이제 흔들리기 시작한 건 발레리의 눈동자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린 지금 서로의 껍데기만 핥고 있으니까.”

“…껍데기?”

“그래. 껍데기.”

“…….”

“마음 없이 몸만 겹쳐서 해결되는 건 없어. 너도 모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테렌스의 냉정한 말투에 발레리는 고개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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