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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45)

119화

타닥-

불꽃이 튀는 소리가 찰나 몸집을 부풀렸다가 잠잠히 가라앉았다.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리고 있는 디아나의 얼굴 위로 주홍색 불빛이 어른거렸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끝이 움찔 떨렸다.

“…….”

이윽고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리더니 눈꺼풀이 들리며 청보랏빛 눈이 드러났다.

디아나는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 몽롱한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한 번에 몰아닥쳤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그저 제가 손에 쥐여드리는 것을 누리시면 됩니다.]

늦은 밤.

불안함에 케이든의 뒤를 따르게 했던 힐라사와 무프가 급하게 돌아와 핀들레이 공작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려왔다.

디아나는 그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뮈젤을 비롯한 윙즈 길드원들을 이끌고 토벌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칫하면 레베카와 핀들레이 공작의 눈에 띌 수도 있었으나, 본능적인 불안이 그녀의 발길을 끊임없이 재촉했다.

그리고 제4연대가 담당했다는 북쪽 숲에 다다랐을 때.

[남은 마력 전부 끌어모아서 황궁과 각 연대장에게 이 상황을 전해! 그리고 빠져나가라!]

[주군!]

[아아악! 안 됩니다!]

디아나는 문자 그대로 심장이 곤두박질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목격한 적 없던 괴이한 변종 마물.

그것이 핀들레이 공작의 짓이라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공작에 대한 살의가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절벽 조각, 마물들과 함께 추락하려 드는 케이든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뮈젤, 뒤처리 좀.]

[……알겠습니다. 다만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뮈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그녀의 답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마물을 도륙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상처를 노려라!]

[상처를 공격하면 더는 재생하지 않는 모양이야!]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

이번에 나타난 변종 마물에게서도 어둠 속성 정령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혹시나 했는데. 다른 이들의 공격을 일체 무시하던 마물들이 어둠 속성 정령의 힘에는 상처를 입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을 빠져나가게 하려고 케이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들 일은 없을…….

[당신이 왜 여기……! 당장 물러나, 디아나!]

“……!”

그때 마지막 기억의 조각도 제자리를 찾았다.

케이든의 외침에 굳어진 직후 절벽이 산산이 부서졌고, 정신을 잃기 직전 급하게 힐라사를 최대로 불러내어 추락의 충격을 줄였던 것까지 떠올린 디아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케이든은?’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녀는 케이든을 찾는 동시에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쓰러져 있던 곳은 전체적인 모양새로 보아 아무래도 나무 오두막 같았다.

멀지 않은 곳의 벽난로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살짝 돌리자 누군가 머물렀던 곳인지 낡은 가구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상자들이 몇 점 보였다.

“일어났어?”

이제는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처럼 다정한,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디아나는 어깨를 흠칫 떨고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직후 경악했다.

“세상에.”

케이든은 오두막 한쪽, 달이 휘영청 떠오른 창문 옆쪽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곳곳에 핏물이 배어난 붕대가 그의 상체를 온통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것을 본 디아나가 기겁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처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붕대로 손을 뻗던 그녀는 볼을 간질이는 숨결을 느끼고는 멈칫했다.

“…….”

“…….”

디아나는 시선을 상처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선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얼굴을,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이 지금 케이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 무서웠다.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

디아나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무는 순간이었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랗고 마디가 굵은 손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피라도 나면 어쩌려고.”

살짝 아랫입술을 누르는 손길에, 이에 짓눌려 있던 연한 살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빠져나왔다.

커다란 손이 더없이 부드럽게 디아나의 얼굴을 감쌌다.

디아나는 차마 그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케이든이 이끄는 대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시선을 비롯한 오감이 전부 그에게 사로잡힌 듯한 기분이었다.

달빛이 비스듬히 드리운 케이든의 얼굴은 담담했다.

검은 눈 역시 마찬가지였던지라 디아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케이든의 입술이 달싹였다.

디아나는 다가올 말이 두려워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픈 곳은 없어?”

“……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디아나는 제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싶어 반쯤 넋을 놓고 케이든을 응시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케이든의 눈은 그 순간에조차 염려를 담고 디아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말을 이었다.

“몸은 괜찮아?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서 쓰라렸을 텐데.”

“…….”

“그래도 큰 상처는 없어서 다행이야, 그대.”

케이든이 말을 맺으며 말갛게 웃었다.

그 웃음이 그 어떤 호통과 분노보다 충격적이었다.

꽉 막혀 있던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막을 새도 없이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디아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케이든의 손 위로 겹쳤다.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더듬거렸다.

“왜…….”

“…….”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

“왜…… 나를…….”

변함없이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보는 거예요.

덤덤하게 말을 내뱉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말을 맺는 데 실패했다.

디아나는 볼 안쪽을 짓씹으며 눈물을 그치려 애썼다.

케이든이 언제부터 제가 감추던 일들을 눈치챈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그를 속였다는 사실이었다.

‘도움’이라는 탈을 쓴, 그러나 자칫하면 케이든의 세력마저 휘말릴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비밀.

디아나는 그런 비밀을 들켰음에도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핑계는 많았다.

회귀라는 것을 그 누가 쉽사리 믿어주겠나.

어둠 속성 정령에 관한 증거도 없는데 섣불리 능력을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건 디아나가 케이든을 속인 일에 대한 변명이 되어주지 못했다.

디아나가 케이든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털어놓지 못한 건 결국 회귀 전, 그녀가 그를 죽음까지 몰고 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두려웠기 때문이었으므로.

물론 케이든과 디아나는 처음부터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상대에게 꼭 모든 것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다시 회귀 직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디아나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좋아해.]

[좋아해, 디아나.]

그 눈빛이, 목소리가, 마음이 좋아서.

케이든이 제게 진심이 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수록,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결국 그가 제게 주는 애정이 욕심나 입을 다문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케이든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이 상황이 오히려 고역이었다.

그가 차라리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면 이해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저 웃었다.

한결같이, 어쩌면 어제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그 다정이 디아나를 한없이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때 케이든이 손을 움직여 디아나의 볼을 적시던 눈물을 닦아냈다.

그가 은은한 달빛과도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전부터 항상 내게 무언가 죄라도 진 사람처럼 굴곤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

“하지만 디아나. 나는…….”

내내 평온하던 케이든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일그러졌다.

그가 디아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렷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내게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면 좋겠어.”

“아…….”

디아나가 신음을 흘리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케이든은 그녀의 손톱이 제 손을 파고드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설핏 웃었다.

“그러니까 말해줘. 들을게.”

“…….”

“그대가 이렇게 해야 했던 이유가 뭔지 듣고 싶어. 알게 해줘.”

“…….”

“부디 그대를 더 알게 해줘, 디아나.”

이후로 한동안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위로하듯 디아나의 볼을 엄지로 스치듯 쓸기만 했다.

그 햇살 같은 마음은 기어코 누군가의 마음을 옥죄고 있던 사슬을 끊었다.

내내 달싹이기만 하던 디아나의 입술이 마침내 천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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