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45)

120화

[연지곤지]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당신은 과거에 죽었어요. 저도 당신이 참수당했던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요.”

“…….”

“그리고 눈을 떠보니 5년 전으로…… 돌아와 있었고요.”

믿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과거를 거슬러 왔다니.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막상 늘어놓고 보니 정말 하잘것없는 이야기였다.

잘못된 믿음을 가졌고, 결국에는 그 믿음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어찌 보면 흔하디흔하다고 할 수도 있을 얘기.

그 비루한 이야기를 케이든은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머뭇거리며, 그러나 꿋꿋이 이야기를 마친 디아나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과연 케이든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영원히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야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디아나가 케이든의 그러한 다짐을 얕본다거나, 경시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닌 죽음에 관련한 일이다.

영원한 끝. 삶의 종식.

지금은 시간이 되돌려져 없었던 일이 되었다 한들, 디아나가 그릇된 믿음과 욕심으로 케이든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는 일은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영원히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만한 일을 알게 되었음에도 이전과 같이 상대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이들이 평범하지 않은 것이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일말의 불편함이나마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달랐다.

케이든이 이전과 완전히 같지 않은 온도로 자신을 바라보아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가슴은 그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디아나.”

그때 낮은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디아나는 죄인이 된 것처럼 덤덤히 시선을 내린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케이든은, 언제나 그랬듯이 또 한 번 디아나의 예상을 빗겨 갔다.

“미안해.”

“……네?”

그 말에 고개를 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애처롭게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디아나가 눈으로 목격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 파르르 떨리는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마도 칼날이 파고들었을 바로 그 자리를.

“많이 억울하고, 또…….”

“…….”

“무서웠을 텐데.”

케이든의 목소리는 물에 잠긴 듯 먹먹하게 젖어 있었다.

그 표정이, 음성이. 우습게도 전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을 자아냈다.

디아나의 얼굴과 무릎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저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디아나 본인조차도 제 과거는 단지 어리석었던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마땅히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라고.

그러나 케이든은 디아나의 손에 죽임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만을 걱정했다.

“미, 흐, 미안, 해요…….”

디아나의 잇새에서 미처 막지 못한 사과와 흐느낌이 새어 나가자 케이든이 한층 더 절박한 손길로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아니야, 내가. 내가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디아나를 끌어안은 케이든의 손과 팔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디아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디아나의 이야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케이든은 오히려 디아나의 말을 믿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 그건 동정보다는 연민과 사랑에 가까웠다.

‘좋은 기억이었을 리가 없지.’

하나뿐인 믿음에 배반당하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음까지 겪어야 했던 그 시간과 공포를 그가 헤집어놓은 꼴이었다.

이런 이야기인 줄 알았다면 듣지 말 것을. 그런 의미 없는 후회마저 들었다.

케이든의 사과를 들은 디아나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가 울음 사이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 놓고…….”

잠시 숨을 삼킨 디아나가 끝끝내 제 마음의 밑바닥까지 긁어내어 입 밖으로 토해냈다.

“감히 당신을 마음에 품어서. 그래서 미안해요.”

속삭임에 가까운 음성이었으나 케이든에게는 천둥보다도 크게 들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우는 디아나를 달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당황해 그녀를 제 품에서 떼어냈다.

케이든이 디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방금…….”

“네?”

“방금, 뭐라고…….”

디아나는 그의 말에 잠시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듯 감추는 것 하나 없이 누군가에게 제 모든 속내를 꺼내놓는 것은 그녀 역시 처음이었기에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어색함과 불편함조차 케이든을 향한 마음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녀가 눈물 젖은 눈으로 설핏 웃으며 고백했다.

“좋아해요, 케이든.”

“…….”

“어쩌면 당신을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쭉.”

디아나 서즈필드는 언제나 누군가의 ‘무엇’이었다.

레베카에게는 유능한 부하. 서즈필드 자작에게는 이용할 패.

하지만 케이든의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단지 ‘디아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제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은근슬쩍 말을 붙인 적은 있으나 그조차 사실상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필연이었다.

“…….”

한편, 케이든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고백에 외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디아나를 바라보던 그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달싹였다.

“……죄책감 때문에.”

“아니에요.”

“그럼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아니라니까요.”

디아나가 칼같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케이든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결국 디아나가 토라진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든을 노려보았다.

“혹시 케이든이야말로 저를 거절하려고 일부러 모른 척 구는 건,”

“절대 아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케이든이 태산마저 잘라낼 듯한 단호함으로 대꾸했다.

디아나는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그 웃음에 케이든 역시 그녀를 따라 바람 빠진 듯한 웃음을 흘리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으…….”

“……아! 상처!”

케이든이 반사적으로 상처가 있는 곳을 내려다보자 디아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디아나는 정신을 잃은 사이 자신이 깔고 누웠던 후드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찾아내 손에 쥐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지체 없이 붕대의 매듭에 손을 대었다.

“붕대 좀 풀게요.”

“뭐 하려고?”

“건국제 행진 날, 상처 치료해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혹시 몰라서 그때 사용하고 남은 포션을 들고 왔거든요. 쓰일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안타까운 어조로 말끝을 흐린 디아나가 케이든의 상체에 감긴 붕대를 풀어 내렸다.

그녀는 그가 오두막에서 찾아낸, 그럭저럭 깨끗한 붕대 일부를 잘라내 포션에 적시고 그의 상처를 살살 닦아냈다.

‘아, 아문다.’

일전에도 한번 보았지만,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모습을 보는 건 여전히 신기했다.

디아나는 신기한 눈길로 상처를 살피다가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하지만 정작 환자인 케이든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읏…….”

디아나의 손끝이 맨살 위를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던 케이든의 잇새로 끝내 막지 못한, 상당히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갔다.

그에 멈칫한 디아나가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보았다.

붕대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귓가와 목덜미를 온통 붉게 물들인 채 욕망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저만을 시야에 담고 있는 남자의 모습.

그것을 보는 순간 배 속에 훅 불길이 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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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묘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조금 가빠진 숨을 애써 억누르며 웃었다.

“상처가…….”

그러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어지던 말은 직후 밀고 들어온 말캉한 살덩이에 밀려 자리를 잃었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이성이 툭, 끊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는, 갈급한 손길이 서로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뭉개지듯 맞닿으며 혀가 얽히고 타액이 오갔다.

오두막 한구석에는 그나마 모양새 정도는 갖춘 침대가 있었지만, 거기까지 자리를 옮길 정신도 없었다.

케이든의 힘에 조금씩 밀려나던 디아나는 끝내 바닥에 등을 붙이게 되었다.

옷자락이 엉망으로 벌어지고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찬 공기에 얼어 있던 손끝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디아나…….”

“하, 흣…….”

온몸에 입술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끊이지 않던 신음은 어느새 불규칙적인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케이든의 등이 쉼 없이 꿈틀거렸다.

그 위로 이따금 디아나의 손톱이 파고들며 생채기를 남겼지만 쓰라리지도 않았다.

“아……!”

디아나가 어느 순간 비명과도 같은 흐느낌을 흘리며 케이든의 목에 매달렸다.

그의 목을 휘감고 있는 흰 팔이 바르르 떨렸다.

케이든은 그 후로도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숨을 몰아쉬며 디아나의 위로 푹 엎어졌다.

빠듯한 충족감이 두 사람을 온통 휩쓸었다.

케이든이 손을 움직여 디아나의 눈가로 흐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요.”

디아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화답했다.

닦아낸 보람도 없이 그녀의 눈가로 새로운 눈물이 긴 자국을 만들어내며 주륵 흘러내렸다.

그것을 닦아내던 케이든의 입술이 자리를 옮겨 다시 디아나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디아나 역시 눈물을 그치고 있는 힘껏 그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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