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패트!”
쿵!
파트라슈가 고통스럽게 눈가를 부여잡으며 땅으로 쓰러졌다.
마물이 재차 몸을 늘여 그런 파트라슈를 공격하려던 찰나, 남은 마력을 긁어모은 안타르가 간발의 차로 그를 보호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주변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으아악!”
“이, 이게 대체……!”
불 속성 정령사와 바람 속성 정령사들이 케이든의 명에 따라 최대한 마물을 불태워 없애고자 했으나, 두 속성의 정령사를 제외한 이들에게도 마물은 공평히 달려들었다.
게다가 불 속성과 바람 속성 정령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타 속성 정령사들은 마물로부터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휘두르거나 마물을 공격해야 했고, 그때마다 마물의 수는 미친 듯 늘어났다.
‘상처를 내면 내는 대로 수가 늘어난다니, 무슨 이런 괴물이……!’
쿠웅!
케이든은 이를 악물고 검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 충격에 마물 일부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잠시간 기사들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허둥댔다.
하지만 이것은 잠깐 시간을 버는 용도일 뿐이었다.
불과 바람을 피한 마물들은 다시 땅으로 떨어졌고, 기사들의 공격을 받아 그 수를 늘렸다.
처음에 열 마리 남짓이던 마물의 수는 어느덧 제4연대 기사들의 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사방에 고통스러운 비명이 난무했다.
‘마력이…….’
아무리 방대한 마력을 지닌 케이든이라 한들, 계속되는 전투는 착실히 그의 마력을 갉아먹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일그러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배님, 정신 잃으시면 안 됩니다! 선배님!”
안타르는 파트라슈를 감싼 채 필사적으로 방어벽을 만들려 했으나 이미 한 차례 마물과의 전투로 마력이 고갈된 상태였기에 그의 방어벽은 형편없이 깨어졌다.
그들 외에도 부상으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기사, 마물에 맞서며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한 기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느리게 박혀 들었다.
패색이 역력한 광경.
일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케이든이 품에 지니고 있던 오페라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죄다 뜯어냈다.
투둑!
“안타르!”
케이든이 목소리를 높이며 손에 쥔 장신구들을 던졌다.
퍼뜩 고개를 든 안타르가 제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것들을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한발 늦게 물었다.
“전하? 이게 무슨……!”
“남은 마력 전부 끌어모아서 황궁과 각 연대장에게 이 상황을 전해! 그리고 빠져나가라!”
“케이든 전하! 안 됩……!”
케이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안타르가 기겁해 외쳤으나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마력을 끌어모아 다리에 집중시킨 케이든이 땅을 박찼다.
순간 나무 꼭대기에 다다를 정도로 높게 뛰어오른 그가 그대로 마물의 홍수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주군!”
“아아악! 안 됩니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기사들이 울부짖으며 케이든을 향해 뒤따르려 했다.
그러나 몸집을 부풀린 금빛 검이 마물과 기사들 사이의 땅을 깊게 갈랐다.
콰앙!
굉음 뒤로 쿠르릉, 불길한 소리가 뒤따르더니 케이든이 밟고 선 땅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피 한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살다 보니 마력이 고갈되는 날도 다 있군.’
케이든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단순했다.
제4연대에서 가장 강한 그가 쓰러진다면 나머지 기사들 역시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마물들을 붙잡고 시선을 끌 동안, 다른 이들이 수도와 각 연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어떻게든 이 변종 마물들을 없앨 방법을 찾는 편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살려 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삐이익! 삐이이익!
땅이 갈라진 탓에 기사들에게 접근할 수 없어 허둥지둥 대던 마물들이 주위의 유일한 인간인 케이든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검을 세게 틀어쥐자 디아나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아른거렸다.
‘……?’
나는 또다시 디아나에게 상처를 주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자조하던 케이든은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미간을 좁혔다.
머릿속에 언뜻 떠오른 기억이 더없이 낯설었다.
어쩐지 지금보다 가라앉은 모습의 디아나가 웃으며 울고 있었다.
[사실 저도 전하가 싫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다면…… 그러면 지금의 우리는 조금 다른 모습일 수 있었을까요.]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케이든이 혼란스러워하던 때였다.
시야 한구석에서 새카만 인영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들은 부상을 입고 쓰러진 기사들을 향해 다가가더니 다급한 손길로 그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정령의 힘으로 케이든이 갈라놓았던 땅을 붙들려 애썼다.
“무슨…….”
아무리 보아도 다른 연대에서 이 상황을 알고 지원을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케이든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컹!
그때 보랏빛 눈을 지닌 검은 늑대 한 마리가 갈라진 틈을 뛰어넘어 케이든이 있는 곳에 착지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마물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안 돼!”
마물들을 공격하면 그 수를 늘릴 뿐이다.
늑대를 말리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던 케이든은 다음 순간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삑! 삐익!
늑대가 물어뜯은 마물들은 전처럼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마물들이 당황해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어느새 나타난 검은 고양이 몇 마리와 먼지가 뭉친 공처럼 보이는 것들이 마물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삐익!
그 순간 궁지에 몰린 마물 하나가 케이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늑대가 물어뜯은 상처 위를 금빛 검이 길게 가로질렀다.
서걱!
그러자 놀랍게도 아까와 달리 마물이 반으로 갈라져 땅으로 툭 떨어지더니, 더는 재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제4연대의 기사들이 멀리서 외쳤다.
“상처를 노려라!”
“상처를 공격하면 더는 재생하지 않는 모양이야!”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
늑대가 날뛰고, 희망을 찾은 기사들은 지금껏 몸을 사린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공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저 늑대는.’
케이든은 본능적으로 마물의 상처를 헤집기 위해 검을 휘두르다가 문득 눈앞에서 날뛰는 늑대가 굉장히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직후.
탁.
온통 검은 옷 일색의 인영들 사이에서 누군가 틈을 넘어왔다.
케이든은 검은 후드 아래로 보이는 가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당신…….”
아무리 약점을 찾아냈다고는 하나 아직 안전하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마물의 수는 여전히 그가 밟고 있는 땅을 빼곡히 뒤덮을 정도로 많았고, 잠깐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런 곳에, 그가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잃고 싶지 않은 이가 발을 들였다.
이성을 날리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당장 물러나, 디아나!”
케이든은 자신이 디아나의 정체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하고 절규하듯 외쳤다.
그가 조금 전보다 더욱 난폭하고 사납게 검을 휘두르며 어떻게든 마물들을 모조리 도륙하려 애썼다.
한편, 케이든의 곁으로 다가가려던 디아나는 그의 외침을 듣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잠시였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혹시, 하는 의심이 든 적은 있었다.
이를테면 케이든이 엘리엇의 물음에 한발 먼저 답을 건넸을 때와 같이.
하지만 이렇듯 케이든의 입으로 직접 그 의심을 확인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콰르릉!
그때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 정령사들의 힘으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땅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케이든과 디아나 사이로 쩌적, 소리와 함께 한 번 더 큰 금이 그어졌다.
“어, 어……!”
“안 돼!”
절벽 조각을 붙잡고 있던 길드 윙즈의 정령사들이 당황하며 마력을 끌어올렸으나 역부족이었다.
삐익!
혼란을 틈타 다 죽어가던 마물 한 마리가 석상처럼 굳어진 디아나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마물을 밟고 몸을 날린 케이든이 디아나를 감싸며 몸을 돌렸다.
콰득!
“……!”
“케이든!”
케이든이 저를 끌어안는 감각에 이성을 되찾은 디아나의 비명은 땅이 무너지는 소음에 묻혔다.
두 사람의 몸이 피를 흩뿌리며 암석들과 함께 절벽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