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45)

114화

“……!”

디아나는 코앞에서 반쯤 뜨인 채 나른히 저를 응시하는 검은 눈을 발견하고 숨을 멈추었다.

“……케이든?”

그녀는 망설이다가 속삭임에 가까운 부름을 내뱉었다.

분명 케이든은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이 몽롱해 제대로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잠꼬대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

케이든은 여전히 초점이 불분명한 눈으로 디아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망설이던 디아나는 바짝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신경 쓰여 그를 깨우기로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케이…… 흡.”

그러나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케이든이 언젠가의 디아나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케이든이 디아나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머리를 감쌌다.

언뜻 다정해 보이는 손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물러나게 두지 않겠다는 집착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읏…….”

디아나의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순식간에 혀가 뒤얽히며 몸으로 전해지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가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놀라 바짝 긴장했던 몸이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로 인해 점차 느슨하게 풀렸다. 서서히 얼굴로 열이 오르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물러나야…… 하는데.’

아직 한 조각 남은 이성이 제 존재를 주장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디아나는 케이든을 거절했다. 그에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말라며 선을 그었고, 케이든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만약 케이든이 지금 이성을 되찾는다면, 그는 곧장 그녀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고 제 행동에 대해 사과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힘겹게 손에 힘을 주어 케이든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외려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그에게 더욱 바짝 다가가려 애썼다.

사실은,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눈을 감은 채 케이든과 입을 맞추던 디아나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끝내 그녀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깨지 마요.’

자정이 되어 마법이 풀렸다는 어느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당신이 완전히 눈을 뜨면 우리는 다시 애매한 웃음을 머금은 채, 적당한 거리를 지켜 서로를 대하겠지.

그러니 아주 잠시만.

비록 이것이 당신의 기억에선 잊혀질 찰나의 신기루일지라도.

‘닿고 싶어.’

이렇게나마 케이든을 제 안에 가둬두고 싶었다.

“…….”

그때.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은 채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핥고 깨물며 탐하던 케이든의 눈꺼풀이 슬쩍 올라갔다.

그의 눈은 아까와 달리 혼몽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또렷했다.

그는 디아나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달빛에 반짝이는 눈물을 가만히 시야에 담았다.

케이든의 눈매 역시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는 가만히 내리감긴 디아나의 눈꺼풀을 응시하며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왜 우느냐고 물으면 분명 놀라겠지.’

그리고 묻지 않아도 그는 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흐…….”

케이든의 한 손이 디아나의 허리를 더듬어 올라가 그녀의 등을 쓸었다.

그 손길에 디아나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듯 가까이서 몸을 맞대고, 살을 쓰다듬고, 숨을 섞다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반지.]

[……뭐?]

[반지를 조사해.]

그날.

엘리엇의 방에 찾아온, 아마도 D. 옵스큐르일 정령사가 디아나였다는 것을.

‘왜?’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이라도 디아나의 어깨를 붙잡고 다그쳐 묻고 싶었다.

어째서 정체를 숨겼느냐고. 그가 바보처럼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허둥대는 꼴이 우습지는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홀로 고통을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고, 당신이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당신이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라요.]

한편으로는 그 모든 말들이, 웃음이, 마음이. 지금도 필사적으로 그에게 닿으려 하는 몸짓이.

전부 꾸며낸 거짓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케이든은 디아나의 눈물을 닦아 이 꿈을 깨트리지 않기로 마음먹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저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막을 헤매다가 빗방울을 맞은 사람처럼 갈급하게 그녀의 숨을 탐하고 타액을 훔쳤다.

그렇게 그들은 하룻밤만이라도 꿈속에 고여있기를 택했다.

16589039397783.jpg 

* * *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리엇.”

엘리엇이 찻잔을 든 채로 아련하게 케이든과 디아나를 번갈아 보자 플뢰르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자 엘리엇이 미안하다며 싱긋 웃어 보였다.

“농담입니다, 농담.”

하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그의 말이 그저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맞장구치지는 못했다.

오늘은 엘리엇이 마침내 황궁의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은 날이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황후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곧장 케이든과 디아나를 찾아온 참이었다.

그렇게 1황자 부부, 3황자 부부는 정원에 테이블을 펼치고 간단한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엘리엇은 쓰러지기 전보다 조금 야위긴 했지만, 이제 더는 시체처럼 창백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온통 뒤덮어가던 보랏빛 멍도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달칵.

속상해하는 플뢰르를 달랜 엘리엇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덤덤한 부름을 내뱉었다.

“케이든.”

“예, 형님.”

“고맙다.”

“…….”

그 말이, 목소리가 더없이 무거웠다. 얼마만큼의 진심이 담겨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케이든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허벅지 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플뢰르와 디아나 역시 조용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엘리엇이 뒤늦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인데, 분위기를 너무 칙칙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저야말로 무사히 털고 일어나주셔서 감사하죠.”

그러자 케이든도 결국 웃는 얼굴로 그의 말에 응수했다.

그 반응에 엘리엇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그를 본 플뢰르와 디아나의 얼굴에도 웃음이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금 이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비어있는 왼손 약지가 어색한지 반지가 있던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반지가 문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결혼반지인데 버리기는 좀…….”

“시끄러워요. 그게 뭐 적당히 닦으면 사라질 얼룩인 줄 알아요? 그냥 새로 맞추는 게 안전하다니까요.”

“하지만, 플뢰르…….”

“그래서 보석은 그대로 살려서 새로 제작하기로 했잖아요. 정말이지.”

플뢰르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엘리엇이 쓰러진 원인은 반지 안쪽을 새까맣게 물들인 독 때문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꺼림칙하다며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 반지가 플뢰르와의 결혼반지라는 이유만으로 반지를 세척하여 다시 끼겠다고 우겼다.

하마터면 아들과 남편을 동시에 잃을 뻔한 황후, 그리고 1황자비인 플뢰르가 그 말을 듣고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결국 플뢰르는 엘리엇을 다그치듯 설득하여 결혼반지에 박혀 있던 보석만 빼내어 새로이 반지를 맞추겠다고 했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래도 추억이 깃들었던 물건인데 불에 태우기까지 한다니 마음이 좋지 않은 모양인지 자꾸만 비어있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또 한 차례 말을 꺼냈다가 플뢰르에게 호되게 혼이 나고, 시무룩해 있던 엘리엇이 문득 고개를 들어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 참. 디아나.”

“네?”

“그러고 보니 혹시 내가 한창 앓을 때쯤 병문안이라도 왔었어요? 꿈에서 언뜻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거든요.”

그의 말을 들은 케이든과 디아나의 어깨가 나란히 움찔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