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아, 참. 디아나.”
“네?”
“그러고 보니 혹시 내가 한창 앓을 때쯤 병문안이라도 왔었어요? 꿈에서 언뜻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거든요.”
그의 말을 들은 케이든과 디아나의 어깨가 나란히 움찔거렸다.
케이든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디아나 쪽을 향했지만, 디아나는 순간적으로 큰 소리를 낼 뻔한 것을 참느라 그 시선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겠지.’
엘리엇이 한창 앓을 때는 플뢰르가 1황자궁의 출입을 모두 제한했을 때였다. 케이든과 디아나조차도 1황자궁을 섣불리 드나들 수 없을 때.
하지만 저 말을 내뱉는 엘리엇의 얼굴은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 또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니, 정말 지나가듯 꺼낸 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자신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착각일 것이라 답을 내뱉으면 되는 일이었다.
디아나가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웃음을 띠려던 차였다.
케이든이 한발 먼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섭섭합니다, 형님. 제가 얼마나 말을 많이 걸었는데 정작 제 목소리는 기억 못 하시고.”
“안 그래도 네가 한 번씩 시간 내서 병문안 올 때마다 그렇게 말이 많았다고 플뢰르가 알려주더구나.”
“너무하십니다, 1황자비 전하. 그걸 말씀하시다니.”
“아하하.”
케이든의 너스레에 엘리엇과 플뢰르가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게 공기를 짓누르던,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던 긴장감이 흐트러졌다.
케이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아무튼, 착각이겠죠. 원래 꿈에서는 정말이지 뜬금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도 한다지 않습니까. 그렇지, 디아나?”
그가 웃는 얼굴로 디아나를 돌아보며 의견을 구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던 디아나가 황급히 그러한 기색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으셨던 시기를 제외하면 1황자궁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전하.”
디아나가 그리 말하며 시선을 살짝 내리깔자 엘리엇이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어?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단순히 착각인지 궁금해서 꺼냈던 말이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하여간 왜 괜한 말을 꺼내서 디아나 기를 죽이고 그래요. 나쁜 사람 같으니.”
“잘못했습니다, 부인.”
플뢰르가 엘리엇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며 툴툴거렸다.
엘리엇은 곧장 밀려나는 척을 하며 하하 웃었다.
엘리엇이 던진 물음에 관련한 화제는 슬슬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큰 추궁 없이 화제가 넘어갔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디아나는 웃으며 플뢰르와 함께 엘리엇을 놀리고 있는 케이든을 힐긋 일별했다.
그녀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
[아무튼, 착각이겠죠. 원래 꿈에서는 정말이지 뜬금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도 한다지 않습니까. 그렇지, 디아나?]
그리 말하던 케이든의 태도가 어딘지 마음에 걸렸다.
‘착각……일까?’
엘리엇의 물음은 엄밀히 말하자면 디아나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디아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그녀를 변호하고 나섰다.
마치, 디아나가 엘리엇의 물음에 당황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디아나, 그러다가 상처 나겠어.”
그때 케이든이 자상하게 속삭이며 엄지로 디아나의 이에 짓눌린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디아나가 놀라 돌아보자 그가 빙긋 웃고는 손을 뗐다.
그녀는 가까스로 미소를 띠었다.
“……고마워요, 케이든.”
“별말씀을.”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이는 케이든의 얼굴은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다정해 보였다.
그러니 그녀가 지금 느끼는 이 찜찜함 역시 그저 착각에 불과하겠지.
디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으나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불안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찻잔을 집어 들어 차향을 맡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저 멀리서 시종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1황자 부부와 3황자 부부가 나란히 놀란 얼굴을 하며 시종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분명 그들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말라 명해둔 참이건만.
저렇듯 황급히 뛰어와야 할 일이라면 시급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일행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이윽고 티테이블의 지척에 다다른 시종이 숨을 몰아쉬며 애써 몸을 바로 세웠다.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윅스빌 영지에 변종 마물이 출현했습니다……! 각 연대장은 지금 즉시 회의실로 모이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입니다!”
지난번 핀들레이 영지에 이어, 윅스빌 지방에서 변종 마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이었다.
* * *
이번에 출현한 변종 마물의 수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으나, 그 종류가 다양하고 각 종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출현했다.
하여 황제는 옐링 공작이 이끄는 제2연대를 황궁에 남기기로 하고, 윅스빌 공작의 제5연대는 행여 마물들이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주변을 경비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연대로 하여금 변종 마물을 토벌하라 명령했다.
2황자 페란트의 죽음으로 비어버린 제3연대장과 총사령관의 역할은 핀들레이 공작이 임시로 맡게 되었다.
핀들레이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지역을 나누었다.
“서쪽의 변종 마물은 제3연대가 처리하겠습니다. 동쪽과 남쪽의 변종 마물은 수가 적지는 않으나 개체 하나하나가 약한 편이라고 하니 모두 1황녀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온기 없는 눈이 케이든을 향했다.
케이든은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했다.
“북쪽의 변종 마물은 그 수가 많지 않으나, 처음에는 그 기세와 힘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다만 기세가 좋은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하게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대지 속성 중급 정령사가 있는 제4연대에서 맡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초반만 잘 방어해내면 큰 피해 없이 사냥할 수 있겠군.”
“예, 그렇습니다. 혹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그럴 리가 있겠나. 합리적인 판단이네.”
케이든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빙긋 웃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곧은 눈썹이 티 나지 않게 슬쩍 구겨졌다.
‘뭔가 더한 수작을 부릴 줄 알았는데.’
핀들레이 공작과 레베카는 명백히 케이든의 정적이었다.
그가 저들 사이에 끼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목덜미 양쪽으로 칼날이 들어와 있는 것과 별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핀들레이 공작이 총사령관을 맡았으니, 그가 케이든을 가장 위험한 마물이 있는 지역으로 보내도 딱히 항명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핀들레이 공작은 오히려 초반을 제외하면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변종 마물이 서식하는 지역으로 케이든을 배치했다.
‘아주 위험한 녀석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전공은 대개 토벌한 마물의 수로 따지니……. 1황녀의 전공을 올리려는 수작 정도인가.’
케이든을 티 나지 않게 암살할 수 있는 이런 경우는 그렇게까지 흔치 않았다.
그리고 핀들레이 공작과 레베카는 그런 기회를 놓칠 인간들이 아니었고.
‘우선은…… 경계를 완전히 놓지는 말아야겠군.’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수작질이 없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케이든은 경계심을 모두 거두지 않은 채 회의에 임했다.
그리고 회의가 파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 숙여 묵례해 보이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한편 케이든이 지도가 펼쳐진 테이블 앞을 떠났음에도 레베카는 자리를 지켰다.
핀들레이 공작이 지도를 갈무리하다가 그녀를 돌아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레베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숨통을 죄이는듯한 시선을 직시하며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무슨 꿍꿍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