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사람들 대부분은 1황자가 목숨을 건졌음에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엘리엇을 살려냈다 칭송받는 케이든은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다.
“…….”
케이든은 제 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겹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덕분에 보고를 하러 왔다가 상관이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바람에 파트라슈만 멀거니 서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참다못해 슬그머니 입을 뗐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황후 폐하께서 고맙다며 주시겠다는 선물을 거절하신 게 이제 와 후회되시는 건…….”
“아니다.”
“에이, 저한테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물론 1황자 전하께서 무사하신 건 기쁘지만, 쪼금은 아쉬웠…….”
“그런 거 아니라고.”
“…….”
장난이라도 쳐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던 파트라슈는 그 목소리가 더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진짜 그만두고 싶다.’
이유를 말 안 해 줄 거면 저렇게 무게나 잡질 말던가!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러기엔 최근 오른 봉급이 너무 아까웠다. 파트라슈는 속으로만 열심히 꿍얼거렸다.
그때 내도록 침묵하던 케이든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디아나는?”
“지금쯤 방에 계실걸요. 아, 오늘이 저기서 주무시는 날이었던가요?”
“……그래.”
케이든이 반 박자 느리게 대꾸했다. 그것을 본 파트라슈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선물이 아니라 3황자비 전하였군.’
솔직히 말해 최근 디아나와 케이든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을 파트라슈 또한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싶지만, 하루 대부분을 케이든의 곁에 붙어 지내는 파트라슈는 사랑에 푹 빠져 언제라도 달려 나갈 것 같던 케이든이 급작스럽게 가라앉은 것만으로도 이상을 감지했다.
하지만 파트라슈는 케이든이 고민에 잠긴 이유가 디아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외려 말을 아꼈다. 그가 잠잠히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지.’
괜히 더 감정이 깊어지는 것보다, 이렇듯 어색함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둘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아니라면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너무 아플 테니까.
“그럼 보고는 내일 마저 하겠습니다. 이만 들어가 쉬십시오. 그럼.”
파트라슈는 서류를 주섬주섬 끌어모아 품에 안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빠르게 문밖으로 몸을 쏙 빼내어 사라졌다.
“……아.”
케이든은 머리가 복잡했던 탓에 한발 늦게 파트라슈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작게 탄식한 그가 이내 한숨을 삼키며 마른세수를 했다.
‘더 늦어지면 걱정하겠지.’
케이든은 망설임 끝에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물증은 없고, 심증일 뿐이다. 심증만으로 디아나를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는 것뿐일 터다.
케이든은 애써 태연한 미소를 가장하고는 디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막 씻고 나온 듯 편한 차림으로 빗을 집어 들던 디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물감이 물 위로 번지듯,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퍼지는 모습이 조용히 시야에 박혀 들었다.
“오셨어요?”
케이든은 잠시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디아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할 즈음이 되어서야 그가 발을 떼어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머리 빗으려는 거지?”
“아, 네. 오늘 벨라가 몸이 좋지 않아 보여서 일찍 보냈거든요.”
“내가 할게. 이리 줘.”
케이든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디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그녀는 희한한 것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선선히 빗을 넘겨주었다.
“이상하게 전부터 제 머리카락에 유독 관심이 많으시네요.”
“예쁘잖아.”
케이든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디아나를 대신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담백한 말이었다. 하지만 찰나나마 디아나의 호흡을 앗아 가기는 충분했다.
디아나는 황급히 숨을 들이쉬어 빨라지려는 심장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놓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식하지 말자. 일일이 의식하는 티를 내면 어색해질 거고, 그러면…….’
이 잠깐의 평화마저 깨질지도 몰라.
눈을 한번 꾹 내리감았다가 뜬 디아나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그녀가 픽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 정도로 정성을 들였는데 안 예뻐졌으면 벨라가 통곡했을 거예요.”
“뭐, 차이가 있는 건 맞지만 처음 봤을 때도 예뻤어. 그보다 아프지는 않아?”
“네? 네.”
“다행이야. 괜히 해 주겠다고 나섰다가 일만 늘리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아, 귀 뒤에 점 있었구나.”
“정말요? 처음 알았어요.”
“응. 귀엽네.”
대화를 주고받을수록 디아나가 느끼는 당혹스러움도 커졌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눈만 끔벅였다.
‘……뭐지?’
케이든이 내뱉는 모든 말에는 예쁘다, 귀엽다, 이런 것들이 하나씩 꼭 들어가 있었다. 이제는 낯간지러움을 넘어 두려울 정도였다.
마치 정신이 다른 데로 가 있어서 말을 절제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는 사람처럼…….
‘……그건 그거대로 민망한데.’
디아나가 고민에 빠진 사이. 빗질을 끝낸 케이든이 빗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고는 웃었다.
“됐다.”
“아,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뭘. 그보다 오늘 형님과 1황자비 전하를 뵙고 왔다고 들었는데, 피곤할 테니 얼른 자자.”
그 말에 디아나의 어깨가 순간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러한 기색을 감춘 그녀는 태연한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래, 잘 자.”
그러나 다음 순간. 케이든이 디아나를 일으켜 그녀를 침대 쪽으로 살짝 떠밀고는 소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디아나가 당황해 입술을 달싹였다.
“케이든? 왜 그쪽으로…….”
“아, 아무래도 혼자 자다가 옆에 누가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케이든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디아나는 케이든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난처하게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아니,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같이…….”
그때 케이든이 다정한, 그러나 말문을 막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직이 말했다.
“디아나.”
“…….”
“나도 정말 괜찮아.”
디아나의 입술이 틈 없이 다물렸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케이든이 한발 늦게 덧붙였다.
“눈치 주는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대가 나를 신경 쓰느라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게 더 미안할 것 같아서 그래.”
“…….”
“잘 자, 디아나.”
“……네.”
디아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 짜내 대답했다.
그러자 케이든이 그녀를 위로하듯 한 번 더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디아나의 시야에는 셔츠에 감싸인 널찍한 등만이 가득 찼다.
그 이후. 디아나는 멍하니 침대로 올라가 누웠지만 한참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가만히 호흡하던 그녀는 문득 귓가를 울리는 고른 숨소리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잠들었던 케이든의 몸이 어느새 바르게 돌아와 있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케이든이 깨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잘 자네.’
최근 케이든이 3황자궁으로 돌아와 밤을 보내는 날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디아나로서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케이든의 잠든 모습이었다.
디아나는 소파 옆 바닥에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고개를 기대었다.
[아, 귀 뒤에 점 있었구나.]
[귀엽네.]
그때 케이든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새삼 그도, 자신도. 아직까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해졌다.
짧게 고민하던 디아나가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케이든의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귀 뒤…….’
그녀가 손을 뻗어 케이든의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내려던 차였다.
휙!
“……!”
눈 깜짝할 사이에 양 손목이 붙들렸다. 얇은 잠옷만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가슴이 틈 없이 맞닿았다.
디아나는 코앞에서 반쯤 뜨인 채 나른히 저를 응시하는 검은 눈을 발견하고 숨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