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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45)

112화

기겁한 케이든이 곧장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디아나의 시체가 아닌, 검은 먼지구름 같은 것 위로 안전하게 뛰어내리는 디아나의 뒷모습이었다.

휙!

그때 케이든의 등 뒤로 유로가 창을 훌쩍 뛰어넘었다.

땅바닥에 착지한 검은 늑대가 디아나를 태운 채 숲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그제야 온몸을 옥죄던 실에서 벗어난 엘판드가 그르렁거리며 케이든의 뒤로 다가왔다.

<쫓아간다!>

엘판드가 창턱을 훌쩍 뛰어넘었다. 케이든 역시 이를 악물고 창턱에 한 발을 올리던 차.

“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음에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형님?”

케이든이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엘리엇이 미간을 찡그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식은땀이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배어나는 것을 보니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흥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 들었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지를 조사해.]

“반지……라고?”

허황한 말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찜찜했다.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린 채 엘리엇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손을 뻗어 엘리엇의 결혼반지를 확인하는 순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마력?’

엘리엇이 손에 끼고 있는 반지에서 엷지만 분명한 마력이 느껴졌다. 얼굴을 굳힌 케이든이 엘리엇의 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살폈다.

그러자 손가락과 닿는 반지 안쪽, 그중에서도 보석의 뒷부분이 검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

케이든이 이를 까득 악물었다.

엘리엇은 결혼 후 씻을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손에서 결혼반지를 빼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다 보니 황궁의 역시 감히 엘리엇의 손에서 반지를 빼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엘판드, 돌아와. 경비병!”

지금은 저자를 쫓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독을 조사해 엘리엇을 살려내는 것이 먼저였다.

작게 엘판드에게 명령을 내린 케이든이 문밖을 향해 고함쳤다.

그러자 궁 곳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기겁한 얼굴로 뛰어왔다.

“누구냐!”

“……3, 3황자 전하?”

“전하께서 어찌 이곳에…….”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무기를 겨누던 경비병들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가 형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지금 당장 황궁의를 불러와! 1황자 전하의 중독 원인을 알아냈다!”

“예?”

“아, 알겠습니다!”

경비병들은 케이든의 말에 제 귀를 의심했으나, 평소 1황자를 제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그의 성정을 알았기에 이내 군말 없이 뛰어갔다.

어둠에 잠겨 있던 1황자궁에 곧 하나둘 불이 밝혀졌다.

케이든은 혹시 몰라 반지를 손수건에 감싼 후 활짝 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

여러 가지 정황상, 아마도 그의 주변 인물일 가능성이 큰 D. 옵스큐르.

그리고…….

[……디아나는 정령사도 아닌데, 말도 안 되지.]

조금 전. 분명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확실히 강한 힘을 다루던 D. 옵스큐르와 닮은 누군가.

반지를 쥔 케이든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때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차림새의 황궁의가 허둥지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3황자 전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가 되어서야 케이든은 창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가슴 한편이 스산했다.

* * *

사락-

흰 손가락이 달콤해 보이는 밀크 캐러멜색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둑한 방 안. 소파 옆 바닥에 무릎을 꿇고 레베카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밀라드가 황홀한 듯 엷은 한숨을 내뱉었다.

“1황녀 전하…….”

그가 나른한 음성을 내며 레베카를 올려다보았다. 몽롱하게 풀린 청보랏빛 눈동자가 무언가를 갈구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레베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내 입술이 맞닿고 혀가 섞이며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하…….”

밀라드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더니 이윽고 그가 손을 뻗어 레베카의 목을 휘감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레베카의 살갗에 닿기 직전.

입술을 떼고 상체를 바로 한 그녀가 엄지로 제 입술을 훑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서…….”

밀라드는 그 목소리에 가까스로 이성을 차리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레베카가 잘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의 귓불을 은근히 어루만졌다.

“서즈필드 자작의 몸이 요즘 영 좋지 않다고?”

“예.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 것이니, 달리 치료할 방법도 없고요. 요즘엔 침대를 잘 벗어나지 못하십니다.”

“그거 안타까운 일이로군. 결혼식을 더 미루기엔 곤란한데…….”

그 말에 나른한 얼굴로 레베카의 손길을 즐기던 밀라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가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레베카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하? 그, 그게 무슨…….”

“영식도 알지 않나. 제국법상 결혼식에는 반드시 양가의 가주가 참석해 그들의 결혼을 인가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 혼인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현 서즈필드 가문의 주인인 자작이 몸이 좋지 않다니, 한동안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테고. 나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혼인을 올릴 생각이 없어.”

“저, 전하!”

레베카가 서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밀라드가 다급하게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레베카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연푸른 눈이 싸늘한 기색으로 그를 응시하자 한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그때 레베카가 돌연 빙긋이 웃었다.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군. 그저 농이니 걱정하지 마.”

그녀가 몸을 낮춰 밀라드의 볼을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물론 불안을 덜 수 있다면 좋겠지. 이를테면…… 영식이 가주가 되어 다른 이의 인가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던가.”

“…….”

그 말을 들은 밀라드의 눈빛이 조금씩 침잠했다.

그것을 확인한 레베카가 속으로 입꼬리를 늘여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전과 달리 더없이 상냥하고 가벼운 음성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뭐, 이것도 다 쓸데없는 불안일 뿐이니 말이네. 자작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야. 그리 믿어야지.”

“……예. 그러시길 저도, 바랍니다.”

그리 대답하는 밀라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언제나 장자인 그를 뒷전으로 두고 3황자 케이든, 그리고 사생아 디아나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서즈필드 자작의 모습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어린아이로 남아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 생각이 밀라드의 마음에 한줄기 음산함을 꽃피웠다.

레베카는 그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 하게 하려는 듯 더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자작의 쾌차 선물을 골라야겠네. 영식도 도와줄 텐가?”

* * *

3황자 케이든이 1황자 엘리엇의 중독 원인을 밝혀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를 뒤흔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지만…… 독극물인 것은 확실합니다. 독에 마력이 섞인 터라 빛의 중급 정령사도 온전히 해독해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황궁의는 1황자의 반지 안쪽에 묻어 있는 정체불명의 독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가 낸 해결책은 빛의 중급 정령사의 기운을 불어넣은 포션을 천에 적셔 반지가 있던 자리에 대어 조금씩 흡수시키는 것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반지를 몸에서 떼어놓자 엘리엇의 몸을 헤집던 마력은 곧 사라졌고, 그 덕에 그의 몸은 정령의 기운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엘리엇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뢰르와 황후는 그날 눈가가 짓무르도록 눈물을 흘렸다.

1황자가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는 하나 그의 성품이 바르다는 것은 제국민들 모두가 알았다.

사람들 대부분은 1황자가 목숨을 건졌음에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엘리엇을 살려냈다 칭송받는 케이든은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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