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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145)

102화

[연지곤지]

키에에엑!

디아나는 찢어질 듯한 비명에 등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러자 지치지도 않고 그녀를 쫓아오는 마물이 보였다.

‘근처에 인기척은 없는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들어갈까.’

그녀는 허공에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덩이를 뛰어넘었다.

슬슬 달리는 것도 한계이긴 했지만, 마물을 처리하다가 괜한 사람의 눈에 띌 바에야 조금 더 인적이 없는 곳까지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디아나는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피해 숲 깊이 들어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가 적당한 장소를 찾아낼 때까지 다른 마물을 추가로 마주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가볍게 숨을 몰아쉰 디아나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마물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그녀를 향해 도약했다.

디아나는 마물의 입 안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녀의 눈이 일순 짙은 보랏빛으로 변했다.

‘유로.’

서걱-

디아나의 손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일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나타난 보랏빛 선이 마물의 목을 단번에 날렸다.

사슴을 닮은 변종 마물의 눈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형형했다.

디아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물의 머리가 허공으로 빙그르르 날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팍-!

어디선가 날아온, 한 뼘 정도 되는 작고 짧은 화살이 마물의 오른쪽 눈을 맞췄다. 아직 보랏빛 기운이 감도는 눈이 크게 뜨였다.

‘무슨……!’

온몸의 피가 식어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디아나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녀 못지않게 놀란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호오.”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어서 철컥, 하고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화살을 쏜 장본인은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손목에 차고 있던, 기이한 형태의 작은 활이 눈에 띄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도 마력의 양이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지네.”

“…….”

“정령사였나, 3황자비? 워낙 순식간이어서 그런가, 어느 속성의 정령사인지는 모르겠다만.”

화살을 쏜 사람은 4황비, 미애나 블루벨이었다. 그녀가 흥미로운 눈으로 디아나를 응시했다.

‘……설마 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짧은 사이에 누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디아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침묵하다가, 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4황비 전하.”

미애나는 그것이 달리 대답을 바란 부름은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말없이 디아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디아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최대한 음산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지금 숲은 변종 마물들로 인해 아수라장이죠.”

“…….”

“이런 상황에서 4황비 전하 하나쯤 불운한 사고를 당했다고 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을까요?”

디아나가 말끝에 방긋 웃으며 미애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미애나는 순간적으로 살기를 느낀 것인지 반사적으로 그만큼 물러났다.

퀭한 인상의 미애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디아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네가 정령사라는 걸 비밀로 해달라는 거야?”

“네.”

“싫다고 하면 죽이려고? 난 죽어도 딱히 상관없는데.”

“…….”

이렇게 드러내놓고 ‘싫다’는 답변이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디아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그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4황비가 별안간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았어.”

“……네?”

“비밀로 해주지. 대신 다음에 내 연구실에나 한번 놀러 와. 무슨 정령사인지도 알려주면 좋고.”

디아나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미애나는 진심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젓더니 가버렸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디아나가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야…… 하나?”

합리적으로는 당장 4황비를 쫓아가 그녀가 마물에 죽임당한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 안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4황비가 디아나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4황비 아닌가.

아를라스의 공주이자 가장 뛰어난 마도 학자였던.

그러나 지금은 아를라스와 발하나스의 우호 관계를 증명하는 수단이자, 발하나스의 여러 마도구 제작을 전담하고 있는…….

괴짜 4황비.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디아나가 문득 탄식했다. 4황비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굳어 있던 머리가 뒤늦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4황비 미애나는 아를라스와 전 대륙을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마도 학자이다.

마도 학자란 마력을 중점으로 이 세계의 여러 신비한 힘을 연구하는 직업. 그들의 연구 대상에는 ‘정령’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둠 속성 정령에 대한 연구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어둠 속성 정령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면 만들면 되지 않나.

건국 신화 탓인지, 정령과의 계약이 가능한 것은 오직 발하나스 제국인 뿐이었다.

그래서 아를라스 왕국인은 대개 발하나스 제국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편이 정령을 연구하기에 더 효율적이니까.

디아나는 4황비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관계가 될 수도 있겠어.’

아무튼, 4황비의 일은 일단락된 것 같으니 슬슬 숲을 벗어나야 했다. 뒤를 쫓아오던 마물도 처리했고.

긴장이 풀려 한숨을 푹 내쉬던 디아나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얼굴에 멈칫했다.

‘케이든.’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조건 반사처럼 불안감이 밀려왔다. 디아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케이든의 것으로 들리는 비명은 없었긴 한데.’

고민은 짧았다. 디아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무프의 결계로 모습을 숨긴 채 숲 안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단,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면 숲 밖으로 내보낸 플뢰르가 기절하려 들지도 모르니 빠르게 케이든을 찾아보고, 정 만나기 힘들겠다 싶으면 나중을 기약하고 숲을 벗어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디아나는 케이든이 무사한지만 확인하겠다는 마음으로 빠르게 숲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 괜찮으려나.’

최근 심리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외려 전보다 날아다니는 듯 보였던 케이든의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디아나가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고 발길을 돌리던 차였다.

“……습니까?”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대화가 청각을 자극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했다.

‘누구지?’

디아나는 목소리 주인의 얼굴이 떠오를락 말락 해 미간을 찡그렸다.

차라리 전혀 모르는 목소리였다면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 묘하게 귀에 익은 음성이었던지라 신경이 쓰였다.

결국 디아나는 찝찝함을 해소하기 위해 수풀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무프의 결계로 모습을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혹시 몰라 수풀 너머로 몸을 숨긴 채 그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직후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다 무슨 상황……이지?’

수풀 너머는 뱀을 닮은 변종 마물의 사체로 빼곡했다.

그 근처에는 밀라드가 흙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기절해 있었고, 그의 곁에 레베카와 핀들레이 공작이 마주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 *

시간을 되돌려, 디아나가 그들을 발견하기로부터 얼마 전.

쉬이익!

뱀 형태의 변종 마물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레베카에게 달려들었다. 그 앞을 검을 든 밀라드가 가로막으며 외쳤다.

“1황녀 전하! 위험하니 제 뒤로……! 윽!”

밀라드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가, 뱀이 검에 이빨을 박아넣자 당황해 신음을 흘렸다.

레베카는 그런 밀라드의 뒤통수를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거슬리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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