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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3/145)

103화

‘거슬리는군.’

레베카는 애써 한숨을 삼키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나름 평화로웠던 사냥대회는 갑자기 튀어나온 변종 마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밀라드와 함께 사냥대회에 참가했던 레베카도 변종 마물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숲속에 울려 퍼지는 비명을 인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뱀 형태의 변종 마물에게 둘러싸였다.

[이, 이게 무슨……! 1황녀 전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밀라드는 그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머리를 치켜드는 뱀 형태 마물의 앞을 막아섰다.

그 딴에는 레베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선 것이겠지만, 밀라드는 애초에 뛰어난 기사도, 정령사도 아니었다.

그가 마물을 막아서겠다고 설치다가 다칠 뻔한 것을 레베카가 막아준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참자.’

레베카는 당장에라도 밀라드의 뒷덜미를 잡고 그를 끌어내고 싶었지만, 다시 예전과 같은 세력을 회복하려면 아직은 밀라드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밀라드를 통해 얻게 될 서즈필드 자작가의 부가 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되니까.’

레베카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밀라드가 어느 정도 설치게 두었다가, 마물이 그의 목덜미를 깨물기 직전 그를 잡아당겼다.

“위험하네, 영식.”

“어……!”

레베카는 다급한 표정을 가장하여 밀라드를 마물로부터 구하는 동시에 그의 뒷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밀라드는 그 즉시 기절했다.

이렇게 해두면 밀라드를 구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그와 부딪친 것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레베카는 입 안으로 혀를 쯧 차고는 뒤늦게나마 검을 휘둘렀다. 흰 불꽃이 검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주위를 휘감았다.

키이익!

키익……!

레베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 없이 자신을 포위한 변종 마물들을 도륙할 수 있었다.

애초에 밀라드가 앞에서 설치지만 않았다면 상황은 훨씬 빠르게 종료되었을 것이다.

“……하필 걸려도 이런 멍청한 게 걸려서는.”

레베카는 마지막 마물까지 처리한 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어진 밀라드를 발끝으로 한번 툭 찼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검을 없앴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숲 밖까지 옮기느냐인데.’

레베카는 밀라드를 좀 더 확실히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와 단둘이 사냥대회에 참석할 것을 자처했다.

그래서 주위에 수행원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른 귀족들 역시 제각기 변종 마물을 만나 흩어진 것인지 근처에서 이렇다 할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정령들에게 운반하라고 하면 싫어하겠지.’

대개 정령들은 계약자의 감정에 동화된다. 겉으로야 다정한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다지만, 레베카의 내심으로는 밀라드를 탐탁지 않게 여기니 정령들 역시 밀라드를 운반하는 일을 내키지 않아 하리라.

정말 발목을 잡고 끌고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레베카가 한숨을 삼키던 때였다.

그녀는 숲 저편으로 언뜻 스쳐 지나가는 인영을 발견했다.

‘핀들레이 공작?’

레베카는 그가 핀들레이 공작임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공작의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혼자서 밀라드를 운반하는 것보다는 둘이서 운반하는 것이 나으리라.

게다가 공작은 레베카를 황위에 올리려 하는 인물이니, 이 정도 일은 도와줄 것이다.

‘수행원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웬일로 혼자서 들어오셨지?’

레베카는 미약한 의문을 품고 핀들레이 공작을 붙잡기 위해 발을 떼었다. 공작이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이길 얼마.

레베카는 나무 사이에 멈춰 서있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고 입술을 뗐다.

“공…….”

하지만 그녀는 이어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작의 곁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작이 숲에서 빠져나가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공작의 앞에서 땅에 무릎을 대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레베카는 본능적으로 기척을 죽이고는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청년의 어깨너머로, 작은 우리에 갇혀 날뛰는 생명체가 보였다. 연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마물?’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언뜻 강아지처럼 보이는 형태의 마물이었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분이 다른 동물과 섞인 듯 기괴했다.

청년은 마물의 몸에 얇은 바늘로 무언가를 밀어 넣고 있었다.

캥! 캥!

마물이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울음을 토했으나 청년은 무표정했다. 마치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어봤다는 듯 무던한 태도였다.

그것은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는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베카가 무언가 기이함을 감지하고 공작을 부르려던 순간.

삽시간에 움직임을 멈춘 마물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직후 마물의 몸이 갑작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와지끈, 소리가 나며 우리가 처참히 부서졌다.

크아아악!

순식간에 ‘변종 마물’의 형태가 된 마물이 포효를 내지르며 공작과 청년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이 낭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공작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이번에도 실패인가?”

“……예.”

“……그래.”

레베카가 제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지 못하고 눈을 의심하는 사이. 핀들레이 공작과 청년 사이에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공작은 싸늘한 눈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청년은 희게 질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죽어야지.”

레베카가 이성을 차린 것은 공작의 검이 청년의 목을 베어낸 순간이었다.

“아.”

레베카는 청년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짤막한 탄식을 뱉었다.

그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떤 공작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듯 형형한 얼굴이던 그가 레베카를 알아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1황녀 전하?”

그의 얼굴에 찰나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혀를 쯧 차고는 검을 휘둘렀다.

검날에 묻어 있던 피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흙바닥에 삼켜졌다.

공작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혼자 계십니까. 전하의 덜떨어진 약혼자는…… 설마 죽이셨습니까?”

핀들레이 공작은 말을 잇다 말고 설마 하며 물었다. 그 말에 레베카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더듬더듬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쪽에 기절시켜 두어서…… 혹 수행원과 함께 오셨다면 옮겨주실 수 있을지 여쭤보려 했습니다만.”

“잘하셨습니다. 덜떨어지긴 했어도 서즈필드 자작가는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요. 오페라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을 빼앗아 오기 전까지는 되도록 죽이지 마십시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왜……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레베카는 공작이 능청스레 화제를 돌리려는 데 휩쓸리려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조금 전의 일은 대체 뭐였습니까, 외조부님?”

그 물음에 공작은 외려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무얼 하긴요.”

“…….”

“당연히,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치우고 있죠.”

“……예?”

레베카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의 광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청년이 바늘로 밀어 넣은 무언가로 인해 마물이 ‘변종 마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녀를 돕는 일이라니?

레베카가 울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언제 외조부님께 그런 일들을 대신해달라고 했습니까. 그런 건 제가 마땅히 할 일…….”

“바로 그 할 일을 제대로 못 해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최근 전하의 상황을 보십시오. 제가 전하께서 어련히 잘하시리라 믿고 손을 놓았더니, 돌아온 결과가 어땠는지요.”

“…….”

“그런데도 정말로 전하께서 제 도움 하나 없이, 이보다 더 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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