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전하께선 우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죠. 혹시 비 전하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움찔.
파트라슈의 말에 케이든이 순간적으로나마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움찔했다.
그것을 본 파트라슈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와, 세상에. 찍어본 건데 예상외로 정곡을 찔렀나 보네.
“설마 진짜였습니까?”
“……아니?”
“방금 대답하기 전에 망설이셨는데요?”
“아니, 아닌데? 사이 좋은데? 그래서 계약이 끝나면 서로 웃는 얼굴로 보내주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
“……제기랄.”
결국 케이든은 자폭했다. 그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잠시 얼어 있던 파트라슈가 이내 측은한 얼굴로 케이든의 어깨를 도닥였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되지도 않는 위로하지 말고 닥쳐…….”
“사실 전하께서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 나면 서즈필드 자작은 도움이 아니라 짐이 맞으니까요.”
케이든이 수치스러움에 앓는 소리를 흘렸으나 파트라슈는 굴하지 않았다. 그가 꿋꿋하게 토닥임과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3황자비 전하께서 계약을 끝낼 시기가 오면 이혼을 바란 건 본인이라고 알리겠다 하셨으니, 저희 측 귀책 사유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좋은…….”
“패트, 그만.”
하지만 다음 순간. 케이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남김없이 가셨다. 그가 제 어깨를 토닥이던 파트라슈의 손을 잡아채며 무표정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 표정과 음성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읽은 파트라슈가 입을 합 다물고 슬그머니 손을 물렸다.
케이든은 말없이 파트라슈가 두드렸던 제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본래 늘 무표정이던 사람이 웃는다거나, 늘 웃던 사람이 무표정이 되면 무서운 법이다.
대부분 미소 띤 얼굴이던 케이든이 표정 없이 있으니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파트라슈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케이든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케이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많이 화나셨나? 이번에야말로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은 발언을 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가?’
안절부절못하는 파트라슈의 생각과는 다르게, 케이든은 그의 말을 듣고 새삼 우울해하느라 그런 것뿐이었다.
‘내가 디아나와 이혼하게 된다면…… 지난번 투도크 백작 같은 사람이 늘어날 텐데. 그래도 디아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가?’
황태자가 된 그가 디아나와 이혼한다면, 아마 그들의 결별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이들이 넘쳐날 것이다.
일개 황자인 지금에도 그가 입지를 넓혀가자 그의 옆자리를 디아나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정말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도 괜찮아?’
사실은 디아나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 ‘괜찮게 하겠다’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 저렇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내가 다른 이의 옆에 서도 아무렇지 않냐고.
“……하.”
또다시 우울의 늪을 파고 들어가던 케이든이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 행동에 파트라슈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그는 보좌관의 반응 하나하나를 신경 써 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케이든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쓰디쓴 웃음을 흘렸다.
‘마음을 접겠다고 해놓고, 또 이런 구질구질한 가정이나 하고 있군.’
접기는 무슨. 지금도 정신을 놓기만 하면 실시간으로 영토를 불리려는 마음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케이든이 울컥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구고, 다시 피식피식 자조를 흘리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파트라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궁의께 상담 예약을 잡아둘까요?”
“…….”
“하하! 저, 저는 저쪽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우승하셔야죠, 암요!”
케이든이 말없이 파트라슈를 노려보았다. 찔끔한 파트라슈가 일부러 소리 높여 웃고는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케이든은 파트라슈를 쫓아가서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길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만뒀다. 그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매긴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냥이나 하자.’
마음을 접는 문제와 별개로, 디아나와 플뢰르가 숲에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경 쓰였다.
두사람이 위험한 사냥감이 없는 숲의 초입에 있다고 해도 초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케이든은 빠르게 우승을 확정 짓고 디아나에게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냥감을 물색했다.
주변을 돌아다니길 얼마. 그는 숲 저편에서 그처럼 어슬렁대는 늑대를 발견하고 곧장 움직임을 멈췄다.
‘한 발로는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케이든은 눈을 굴려 손에 든 활을 힐긋 일별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건 상당히 큰 활과 화살이었지만, 한 발만으로 깔끔하게 늑대를 잡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고민 끝에 케이든은 늑대의 머리를 노리기로 했다. 사냥감의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사냥한 이를 표시하는 마도구 도장을 찍어야 하는 파트라슈는 머리가 꿰뚫린 늑대를 보고 질색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중히…….’
케이든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다행히 늑대는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땅을 파헤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손의 떨림이 멎는 아주 짧은 순간, 케이든은 활시위를 놓았다. 활이 매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쐐액- 퍽!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살이 늑대의 머리에 명중했다. 늑대는 작게 캥,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즉사했다.
‘됐다.’
주먹을 쥐던 케이든은 다음 순간, 늑대에게 꽂힌 화살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깜박였다.
그는 분명 늑대의 머리를 노리고 화살을 쏘았고, 명중했다.
그렇다면 늑대의 옆구리를 관통한 저 화살은 누구의 것이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아쉬워라.”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케이든이 고개를 돌리자 그와 비슷한 자세로 서 있던 루드비히가 활을 내리며 빙긋이 웃었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제 차지였을 텐데요.”
“…….”
별다를 것 없는 말이긴 했으나 어조가 이상하게 의미심장했다.
케이든은 입 안으로 혀를 쯧 찼다. 그가 화살을 먼저 맞춘 것 같긴 하지만, 루드비히가 아쉽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아하니 괜히 사냥감을 두고 실랑이가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루드비히와 오래 얼굴을 맞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사냥감은 널렸으니까. 케이든은 애써 합리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화살은 동시에 박혔어. 그렇지만 저 늑대는 자네가 가져가는 게 좋겠네.”
“……양보입니까?”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그런 거고. 아니면 자네의 화살이 조금 더 먼저 맞은 것으로 하던가.”
케이든은 그렇게 말을 맺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루드비히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정확히 세 걸음을 떼었을 때.
“대체 무엇이 전하를 그렇게 바꿔놓은 걸까요?”
불쑥 들려온 말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루드비히를 돌아보았다.
“뭐?”
루드비히는 잠시간 말없이 케이든을 응시했다. 연푸른 시선이 꼭 케이든을 머릿속에서 낱낱이 해부하고 있는 것처럼 집요하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루드비히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가 제자리에 선 채로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만약 사냥제가 열린 것이 몇 달 전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전하께서는 절대로 제게 사냥감을 양보하지 않으셨을 테죠.”
“…….”
“대체 무엇이…… 전하를 이렇게 여유롭게 바꿔놓은 걸까요?”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케이든이 루드비히의 자문이 묘하게 섬뜩하다고 생각하는 차.
“조심……!”
그는 루드비히의 등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마물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