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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45)

95화

“설마 아이를 가진 건 아니지?”

밀라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디아나를 노려보았다.

그 물음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아.’

누군가 머리 위에서 찬물을 쏟아부은 듯한 기분이었다.

디아나는 밀라드의 말로 인해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 내려왔다. 케이든으로 인해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단숨에 정상 궤도를 찾아 가라앉았다.

디아나는 치맛자락 사이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슬슬 아이 얘기가 나올 때가 되었지.’

밀라드는 디아나가 아이라도 가졌다가는 가뜩이나 위태로운 제 처지가 더욱 흔들릴 테니 경계 차 물은 것이겠지만.

디아나는 그 물음 덕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서즈필드 자작이 케이든의 변심을 염려하여 아이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리라는 것.

그 사실을 상기하자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디찬 푸른빛으로 식어 내렸다.

디아나는 괴롭게 눈꺼풀을 내렸다.

‘받아주면…… 안 돼.’

애초에 디아나가 케이든과 1년 후 이혼하려고 마음먹은 절반의 이유는 레베카, 나머지 절반은 서즈필드 자작이었다.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은 더 나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저와 서즈필드 자작이라는 족쇄를 채워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작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디아나는 분명 서즈필드 자작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죽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즈필드 자작은 분명 디아나에게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썩 좋은 인간 됨됨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케이든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유만으로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은 레베카의 밑에 있을 때 질리도록 해왔으니까.

더 손쓸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여기서 잘라내야 한다.

그게 맞는데…….

“…….”

대체 왜 마음 한구석이 벌써 아려오는 걸까. 꼭 실연당한 사람처럼.

* * *

황족들의 여름 휴가는 사실상 휴가를 빙자한 정기적인 지방 시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별궁으로 내려온 김에 지방 영주들과 안부를 주고받는다는 핑계로 황족을 보내 그 지역을 감찰하는 것이다.

케이든과 디아나가 담당하게 된 곳은 월포드 남작령이었다. 그들은 호위인 안타르와 함께 남작저로 향했다.

마차가 남작저 앞에 멈춰 섰다. 케이든은 디아나보다 한발 앞서 마차에서 내리며 녹아내릴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 잡으시지요.”

“……감사해요, 전하.”

디아나는 사람들 앞이라는 것을 의식해 마주 미소를 보이며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남작저 앞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그들을 기다리던 월포드 남작, 그리고 그의 후계자라는 딸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3,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빛의 영광이 가득하시길.”

“빛의 영광이 가득하시길.”

“그대들에게도 빛의 가호가 있길. 고개를 들어도 좋아.”

케이든이 디아나의 리본을 바르게 매어 주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남작과 그의 딸이 한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특히 후계자라는 딸은 얼굴까지 붉혔다.

디아나는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을 움직여 케이든을 슬쩍 가렸다.

그녀가 한발 늦게 제 행동을 자각하고 아차, 했을 때는 케이든이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후였다.

케이든의 입꼬리가 놀릴 거리를 찾았다는 듯 슬그머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본 디아나가 재빨리 부정했다.

“아니에요.”

“뭐가?”

“그…… 아무튼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디아나.”

케이든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디아나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디아나가 양손으로 달아오른 볼을 애써 감추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의 애정행각에 민망해하던 남작이 조심조심 입을 움직였다.

“그보다 죄송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재료 하나가 말썽이라 식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아, 괜찮네. 어차피 장부부터 살필 생각이었으니까.”

“아, 그러시다면 곧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월포드 남작과 그의 딸, 로아나 월포드가 일행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월포드 남작은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끌려드는 여타 영주들과 다르게 빠르고 정확하게 케이든을 장부가 있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케이든은 그에 만족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감찰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 영주도 많은데 이렇듯 점잖은 자는 흔치 않았으니까.

이윽고 케이든은 남작의 협조적인 태도에 덩달아 의욕을 내비치며 장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그의 곁에 서서 조용히 사냥제 이후의 일을 궁리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처리한 거지?”

“아, 그건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장부를 살피던 케이든이 무언가를 질문하면 로아나 월포드가 가까이 다가서서 그 부분을 설명했다.

월포드 남작이 부인을 잃고 얻은 하나뿐인 딸인지라 각별하게 키웠다고 하더니 확실히 영리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디아나는 로아나가 장부를 살피는 케이든을 이따금 호감 어린 시선으로 힐끔거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공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신은 케이든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마음먹은 상황임에도 로아나를 의식하지 않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불편하게 자리를 지키던 디아나가 몸을 일으키며 케이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음, 케이든. 괜찮다면 저 먼저 바깥을 둘러보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안타르 경과 함께 갈게요.”

“아, 그렇게 해. 내가 미처 신경을 못 썼네. 미안.”

“아니에요. 그럼 일 마치고 천천히 오세요.”

디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인 후 안타르와 함께 남작저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응접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케이든과 로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디아나는 어두운 얼굴로 월포드 남작저를 벗어났다.

그녀는 과일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를 얼핏 스쳤다.

‘마음을 접기는 무슨.’

이런 공적인 업무조차 신경 쓰이는 자신이 한심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제 손으로 뺨을 찰싹 소리 나게 여러 번 내리쳤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디아나 서즈필드.’

그때 불현듯 양손에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디아나는 제 양손을 고정하듯 붙들고 있는 안타르의 손에 움찔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안타르 경?”

“……아.”

디아나가 당혹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안타르는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인 듯 외려 그녀보다도 더 놀라며 황급히 손을 물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다가 얼굴이 상하실까 하여 그만…….”

“그랬구나.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런데 이 정도로 얼굴이 상하지는 않을 테니 염려 말아.”

디아나는 그제야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한 양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얼굴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안타르는 디아나보다 두어 걸음 뒤에서 걸으며 계속해서 그녀를 살피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3황자비 전하.”

“응?”

“주제넘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디아나는 평소 묵묵히 곁을 지키던 안타르답지 않은 말에 의아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주제넘은 질문이라고까지 할 만한 물음이 있나?

‘……D. 옵스큐르와 관련한 물음일까?’

디아나는 안타르의 속내를 짐작하려는 것처럼 가만히 그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엷은 구름 낀 하늘 같은 푸른색의 눈은 지나치리만큼 고요해 그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르가 자신에게 해가 될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뭔데 그러나?”

“혹 로아나 월포드 영애가…… 신경 쓰이십니까?”

……아, 이런 질문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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