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45)

94화

“혹시 케이든 전하랑 무슨 일 있었어요? 분위기가 좀 묘해 보이던데.”

디아나는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조금 당황한 눈으로 플뢰르를 응시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디아나는 자신이 나름대로 케이든과의 어색함을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플뢰르가 작게 웃고는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너무 놀란 얼굴 할 필요 없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모를걸요? 황후 폐하도 그렇고, 엘리엇도 그렇고.”

“아…….”

“그냥, 내가 디아나를 많이 좋아해서 자주 바라보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긴장 풀어요.”

플뢰르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디아나는 당황한 와중에도 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조금 뭉클해졌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케이든과의 어색함을 눈치챈 사람이 나타나다니 큰일이었다.

플뢰르는 디아나와 케이든이 계약 결혼을 한 상태이며, 약 반년 후 이혼할 예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부부가 어떻게 결혼 생활 내내 한 번도 싸우지 않겠느냐마는…… 당장은 둘러댈 핑계도 없는데. 고백을 받아서 어색해졌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

디아나는 난처하게 눈을 굴리며 핑계를 고민했다.

플뢰르는 걸음마저 멈춘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자 플뢰르의 얼굴에 조금씩 의아함이 떠올랐다. 디아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그러나 직후, 의외의 사람이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밀라드 서즈필드가 1황자비 전하, 3황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아……. 또 보네요, 서즈필드 영식.”

어느 순간 그들의 앞까지 다가와 있던 밀라드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플뢰르는 어색하게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인사를 마친 밀라드가 상체를 바로 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디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가문의 일과 관련하여 3황자비 전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무슨 수작이지?’

디아나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의심했다. 청보랏빛 눈에 옅은 경계가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밀라드는 사생아인 디아나를 경멸했다.

케이든이 본격적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후로는 그러한 기색이 더욱 심해졌다.

그런 밀라드가 이렇게 다정하고,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데 수상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외려 그편이 이상하겠지.

‘혼자인 걸 보면 레베카가 시켰다거나, 그런 걸까?’

……뭐, 어찌 되었건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설령 저것이 레베카의 부름일지라도 모르는 척 따라나서야 옳았다.

“좋아요, 오라버니.”

디아나는 재빨리 무구한 미소를 띠며 밀라드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뱉을 때는 팔에 약간 소름이 돋긴 했지만. 밀라드 앞에서는 아직 순종적인 이복동생인 것처럼 연기해야 했다.

밀라드의 곁에 나란히 선 디아나가 플뢰르를 돌아보며 안타깝게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미안해요, 플뢰르. 금방 돌아올게요.”

“……괜찮겠어요? 같이 가줄까요?”

플뢰르가 탐탁잖은 얼굴로 밀라드를 일별하며 속삭였다.

그녀 역시 디아나가 가문에서 썩 좋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자란 사생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플뢰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밀라드의 팔을 붙잡았음에도, 자신을 염려하는 그 모습에 미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알았어요. 대신 정말 금세 돌아와야 해요?”

플뢰르는 디아나의 양손을 꼭 잡고 당부하듯 속삭인 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플뢰르를 못마땅하게 흘겨보던 밀라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에서 날을 거두며 생긋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3황자비 전하? 근처를 가볍게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될 듯싶은데.”

“좋은 생각이에요.”

디아나는 밀라드와 함께 천천히 플뢰르에게서 멀어졌다. 오솔길을 따라 얼마간 걸으니 점점 인기척이 사라졌다.

밀라드는 사람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주위를 살펴 지켜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거칠게 디아나의 손을 내쳤다.

귀공자 같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경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밀라드는 디아나가 잡았던 제 옷을 툭툭 털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재수 없긴. 누가 1황자의 비 아니랄까 봐, 사람을 눈으로 비웃고 깎아내리는 데는 도가 텄어.”

디아나는 그 말이 플뢰르를 향한 것임을 깨닫고 황당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플뢰르가 밀라드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제게 해코지를 할까 싶은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를 비웃거나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도련님?”

디아나는 밀라드가 플뢰르나 엘리엇을 험담하는 것을 더 듣고 싶지 않아 웃는 얼굴로 말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뒤늦게 잊고 있던 본론을 떠올린 듯 아, 하더니 별안간 디아나의 양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읏.”

디아나는 양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작게 신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밀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3황자가 수상한 낌새를 보이지는 않더냐?”

“……네?”

“그래, 혹시라도…… 반역이라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생각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거다.”

밀라드는 모종의 기대감마저 서린 눈으로 디아나를 추궁했다.

뜻밖의 말에 당황했던 디아나는 이내 그의 말이 ‘3황자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말해라’는 뜻임을 깨닫고 티 나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레베카가 시킨 일은 아닌 것 같네.’

레베카나 루드비히였다면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굴 게 아니라, 은근슬쩍 대화를 유도해 그녀의 입으로 반역 사실을 실토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디아나는 애써 짜증을 감추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역이라뇨? 3황자 전하께서 그런 일을 벌이실 리가 없잖아요.”

“아니, 잘 생각해봐. 분명 한 번쯤은 그런 속내를 네게 내비친 적이 있을 텐데?”

“그런 적은 없었…….”

“‘모든 것은 서즈필드의 영광을 위해.’”

“…….”

“네가 한 말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디아나.”

밀라드가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그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저 편한 대로 곡해하는 것도 참 능력이다 싶었다.

속으로 짧게 혀를 찬 디아나가 무구하게 웃었다.

“저는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오라버니. 3황자 전하께서는 언제나 제국과 황실에 충실하셨는걸요.”

“젠장.”

밀라드는 디아나가 일부러인지 아닌지 넘어올 기색을 보이지 않자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그녀의 어깨를 내팽개쳤다.

디아나는 그 행동으로 잠시 비틀대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섰다. 밀라드에게 붙들렸던 어깨가 멍이라도 든 것인지 아프게 욱신거렸다.

밀라드는 그럼에도 죄책감 하나 없는 얼굴로 요구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3황자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네가 말했던 것처럼 가문에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 할 것 아니냐.”

디아나는 순간적으로 ‘순종적인 사생아’ 연기를 하던 것도 잊고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말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이야 3황자가 네게 영원을 속삭인다지만, 그 마음이 과연 얼마나 갈지 누가 알겠느냐? 괜한 사탕발림에 넘어가 집안일을 그르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설마 아이를 가진 건 아니지?”

밀라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디아나를 노려보았다. 그 물음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