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혹 로아나 월포드 영애가…… 신경 쓰이십니까?”
……아, 이런 질문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디아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가 곧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녀가 난처한 얼굴로 속삭이듯 되물었다.
“혹시 티가 많이 났나?”
그 말에 안타르가 돌연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작게 고개를 내저은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제가…….”
그의 시선이 ‘내가 그렇게 생각이 얼굴에 많이 드러나는 성격은 아닐 텐데’하고 고민에 잠긴 디아나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옆얼굴이 시야에 소복이 담겼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이는 속눈썹, 옅은 분홍색의 입술.
그것들을 시선으로 좇은 기간이 긴 탓에, 이제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듯했다.
안타르는 디아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을 맺었다.
“……알아차렸을 뿐이지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좇게 된다.
그게 생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닌, 마음이 시켜서 하는 행동이라는 걸 그도 디아나를 보며 깨달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주제넘은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그쳐도.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보면 그는 언제나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곳인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디아나가 보였으니까.
케이든의 곁에 서 있는, 디아나가.
“…….”
안타르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계속해서 제 얼굴을 더듬거리느라 그러한 기색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디아나는 이내 양손을 떨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것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 안 되는데 말이지. 어디까지나…… 일인데.”
말을 이을수록 디아나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녀는 끝내 말을 조금 흐렸다.
그래, 케이든과 로아나 월포드는 함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케이든이 로아나 월포드에게 달리 호감을 표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자꾸만 케이든이 로아나의 곁에 서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좁아졌다.
소의 그녀가 어지간한 일에는 평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치졸한 마음이었다.
디아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본 안타르는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내뱉었다.
“그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응?”
“좋아하는…… 상대라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고, 속앓이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타르가 평소 그답지 않게 길게 말을 이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전부 그가 디아나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자기변명에 가까웠다.
그가 그녀를 마음에 담는 것도,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디아나는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눈을 깜박이다가 곧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어머. 안타르 경은 그런 감정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나?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가 짓궂은 물음을 던지며 손가락으로 안타르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쿡쿡 찔렀다.
안타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이 마음에 담은 것은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모든 걸 제 손으로 망치는 꼴이 되겠지.
‘내가 저분께 품은 감정을 제외하더라도, 저분은…… 내 은인이시니.’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소로 아픈 속내를 감추고 말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아. 저쪽의 농민들이 비 전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 * *
‘정확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처리가 굉장히 빠르시군.’
한편, 3황자비 디아나가 떠난 후. 로아나 월포드는 집무실에 남아 케이든을 힐끔거리며 속으로 감탄했다.
3황자 케이든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결혼 직후부터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수도에서 먼 이곳까지 소문이 빠르게 퍼질 정도였다.
로아나는 내심 그 소문들이 굉장히 과장되었을 것이라 여겨왔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든에 관한 소문이나 이야기는 항상 미담이라고 할만한 것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출중한 외모, 황족으로서의 위엄과 기품. 뛰어난 무예 실력과 사교성, 거기에 인품까지 갖춘 황자.
로아나는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냐며 언제나 친구들의 호들갑을 일축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전, 케이든이 마차에서 내려섰을 때부터 모조리 깨어진 상태였다.
[비, 잡으시지요.]
3황자비 디아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꿀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다디달았다.
로아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3황자 부부의 금실을 목격한 데 한번, 외려 소문이 축소되었다 여겨질 정도로 뛰어난 케이든의 외모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케이든은 이제껏 월포드 남작령을 시찰하러 왔던 2황자라던가, 2황녀라던가 하는 황족들과 다르게 진중하게 업무에 임했다.
황족이 이런 시골에서까지 진지하게 업무에 임해주는 그 태도만으로도 고마울진대, 그는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나 숙련도도 무척 뛰어났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 온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케이든의 그런 면모들은 어쩔 수 없이 로아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사실 로아나가 아니더라도, 케이든은 동년배의 여인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분홍빛 감정을 느낄 법한 남자였다.
하지만 로아나는 그러한 두근거림을 금세 가라앉히게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디아나가 사라진 후 케이든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으니.
무례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정중했고, 유쾌하고, 상냥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디아나를 바라볼 때와 유의미하게 차이가 났을 뿐이었다.
‘나는 안 되겠구나.’
로아나는 디아나가 사라진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마음을 접었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한순간 설레긴 했지만, 저렇듯 이미 누군가에게 단단히 빠져 있는 남자에게 굳이 목을 매며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케이든이 녹아내릴 듯한 눈으로 디아나를 보던 광경을 목격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괜한 희망을 품기 전에 단념하기 쉬워졌으므로.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한편, 케이든은 서류를 살피는 틈틈이 초조한 기색으로 시계를 살폈다.
체감상으로는 디아나가 자리를 비운 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아직 20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단 말이지.’
일전에 황후, 1황자 부부와 휴식을 즐겼던 날.
플뢰르와 활 연습을 끝마치고 별궁으로 돌아온 디아나는 어딘지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물론 그가 말을 걸면 대답도 잘하고, 장난을 치면 웃으며 응대해주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인 느낌이었다.
‘밀라드 서즈필드가 허튼소리라도 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케이든은 무심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그가 쥐고 있던 서류의 끄트머리가 조금 구겨졌다.
케이든은 디아나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수소문하다가 플뢰르를 통해 그날 디아나가 밀라드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생아를 경멸하고, 레베카를 옹호하는 그가 디아나에게 좋은 소리를 했을 것 같지 않아 불안함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래서 케이든은 되도록 디아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내내 옆에 붙어서 유혹해도 이혼을 간신히 면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으니까.
‘이곳에 계속 남겨두는 걸 더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보내긴 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군.’
케이든은 불안감에 쫓겨 엄청난 속도로 미친 듯이 업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부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자리를 박차고 디아나를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