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45)

93화

이윽고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움직이려던 찰나.

바스락.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케이든과 디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

고개를 돌리자 낭패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플뢰르가 보였다.

살금살금 돌아가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녀는 케이든과 디아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황급히 몸을 바로 하며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 음. 그게. 황후 폐하께서 왜 두 사람은 안 오냐고 여쭤보셔서…….”

플뢰르는 드물게도 횡설수설했다. 언제나 흰빛이던 그녀의 볼에 발그스름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디아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재빨리 케이든에게서 멀어져 플뢰르의 팔짱을 끼고 웃었다.

“저희가 너무 늦었죠. 얼른 가요! 폐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네? 하지만 두 분, 따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게…….”

“막 이야기를 마치고 따라가려던 참이었어요. 괜히 걸음 하게 만들어드린 듯해 면목이 없어요.”

디아나는 플뢰르의 말을 막고 케이든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의 그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중에.’

“…….”

‘나중에 이야기해요.’

케이든은 디아나를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안도한 디아나가 웃는 얼굴로 플뢰르를 잡아끌다시피 하며 멀어졌다.

“하아.”

홀로 남은 케이든은 손을 들어 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금방이라도 온몸을 불사를 듯했던 열기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탈력감이 느껴졌다.

그는 저 멀리 플뢰르와 나란히 웃고 있는 디아나의 옆얼굴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상하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케이든은 파트라슈가 공공연히 ‘짐승’이라고 부를 정도로 감이 뛰어났다. 그런 그의 감이, 지금이라도 디아나를 붙잡아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불안하게 외치고 있었다.

“케이든, 안 와요?”

하지만 디아나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그와의 대화를 깡그리 잊은 것처럼 차분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플뢰르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냐. 가자.”

결국 케이든은 애써 불안함을 지워내며 그들을 따랐다. 하지만 말아쥔 주먹에서는 쉽사리 힘이 풀리지 않았다.

* * * 

디아나와 케이든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황후, 엘리엇과 합류해 호숫가로 향했다.

“아, 마침 저기 사공이…….”

플뢰르가 반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가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일행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

밀라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뭍에 막 내려서던 레베카가 그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황후 일행을 바라보자 밀라드가 의아하게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전하? 왜 그러십…….”

황후 일행을 발견한 밀라드가 크게 흠칫하며 어깨를 굳혔다. 가볍게 한숨을 삼킨 레베카가 밀라드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밀라드가 한발 늦게 레베카를 따라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황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에게 화답하고는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황녀도 배를 타러 왔나?”

“예. 제 약혼자가 궁금하다고 하여서요.”

레베카의 말에 밀라드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본래 사냥제 전까지는 황족들만이 별궁에 발을 들일 수 있었지만, 밀라드는 레베카의 약혼자 자격으로 먼저 별궁에 머물고 있었다.

밀라드는 수줍은 기색으로 레베카를 보며 웃었다. 황후가 그런 그들을 보고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즐거웠나 보군. 들어가게.”

“감사합니다. 그럼…….”

레베카는 담담한 인사를 남기고 밀라드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야 황후, 엘리엇, 플뢰르는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별궁이 이렇게 넓은데 딱 마주치는 것도 신기하군요.”

“그래도 때맞춰 배가 비어서 다행이에요. 갈까요?”

플뢰르가 웃으며 일행에게 손짓했다. 다섯 사람은 이내 사공과 함께 넉넉한 크기의 조각배에 올라 호수를 가로질렀다.

“와아.”

디아나는 사공이 노를 저을 때마다 호수 표면에 반짝이가 흩뿌려지는 듯한 광경에 감탄했다.

그녀가 손끝으로 물 표면을 덧그리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다른 이들이 흐뭇한 미소를 내비쳤다.

“3황자비가 즐거워 보여 다행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황후의 말에 케이든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 긍정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디아나는 뒤늦게 자신이 너무 들떠 있었나 싶어 급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디아나, 손.”

케이든은 디아나가 손을 배 안으로 물리자마자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묻은 물기를 다정히 닦아주었다.

그러자 황후와 1황자 부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간지러워.’

디아나는 케이든의 손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치는 감각에 어깨를 움츠렸다.

케이든은 단순히 물기를 닦아주려는 듯이 보였지만, 어쩐지 자꾸만 등줄기를 타고 알 수 없는 감각이 일었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케이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손수건을 거두어들였다.

디아나는 그에 속으로 안도와 아쉬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사이 황후와 1황자 부부는 사냥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 같이 느긋하게 쉬니까 정말 좋네요. 계속 여름 휴가만 같으면 좋으련만.”

“사실 말이 휴가지, 지방 영지를 시찰하는 일정까지 포함되어있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사냥제가 곧이라 이런 날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플뢰르가 엘리엇에게 눈을 흘기며 그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사실 엘리엇의 말대로 황족의 여름 휴가는 짧디짧았다. 그 짧은 일정 사이에도 지방 영지를 시찰하고, 영주들과 만남을 가져야 하는 걸 생각하면 휴가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때 황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3황자비는 사냥제에 참가할 건가? 플뢰르는 올해 사냥제에 참가할 거라며 활을 연습하고 있다네.”

“정말이요?”

뜻밖의 사실에 디아나와 케이든이 눈을 깜박이며 플뢰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제게 시선이 쏠리자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별거 아니에요. 케이든 전하의 실력에 비하면, 그냥 참가에만 의의를 두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연습하는 것뿐인걸요. 그래도 운동은 좀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플뢰르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디아나도 같이 참가할래요?”

“저도요?”

“네. 사실 사냥제가 진행되는 동안 천막 아래에 앉아있기만 하는 건 너무 지루하잖아요. 가볍게 산책한다는 생각으로 같이 참가하면 어때요? 준비는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수준으로만 해도 괜찮은데.”

플뢰르가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꼭 조금 전 햇빛이 잘게 부서지던 호수 표면 같았다.

‘확실히 지루한 건 맞고, 사냥제에 참가하면 혹시 모를 상황이 생겼을 때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되니까…….’

디아나는 플뢰르의 그런 눈빛에 약했다.

눈을 도르륵 굴리던 디아나가 끝내 고개를 끄덕이자 플뢰르가 크게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연녹색 눈이 의욕으로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럼 지금 연습하러 가요!”

“네?”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잖아요. 저도 아직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기본기는 가르쳐줄 수 있어요!”

“어…….”

디아나는 당황했으나 플뢰르를 말리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을 두고 먼저 배에서 내려 아까의 장소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혹시 레베카나 밀라드가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겠지.’

디아나는 행여 레베카와 또다시 마주치지는 않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플뢰르가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디아나.”

“네?”

“혹시 케이든 전하랑 무슨 일 있었어요? 분위기가 좀 묘해 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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