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건국제로부터 약 일주일 후.
팍-!
“와, 또 명중이에요!”
“대단하네, 케이든.”
플뢰르와 엘리엇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케이든은 저 멀리, 과녁 정중앙에 박혀 있는 화살을 보며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운이 좋았죠. 바람이 조금만 더 거셌어도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겸손하게 굴 것 없어. 검술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궁술까지……. 나는 정말…….”
“또 우세요, 전하?”
엘리엇은 케이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진지하게 말하다가 울컥해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본 디아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놀렸다.
그들은 현재 수도로부터 남동쪽에 위치한 여름 별궁으로 휴가를 온 상태였다.
건국제가 끝나고, 사신단을 배웅하면 소란했던 사교 시즌이 끝나고 휴식 시즌이 찾아온다.
황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커다란 호수를 배경으로 지어진 별궁으로 자리를 옮겨 더위를 피하고, 사냥제를 통해 가을의 시작을 알린 후 수도로 돌아갔다.
그것이 지금 이들이 드넓은 동산에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이유였다.
케이든과 엘리엇이 활쏘기 내기를 하는 사이, 천막 아래 앉아 느긋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가 말했다.
“오늘의 연습은 그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다들 이만 뱃놀이라도 하러 가면 어때요?”
“좋은 의견인 것 같아요.”
“그렇게 하죠.”
디아나와 케이든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작게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서로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플뢰르가 일부러 황후의 손을 다정히 감싸 쥐며 소리 내어 웃었다.
“얼른 가요, 황후 폐하.”
“어머, 너도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황후는 조금 놀랐을 뿐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플뢰르가 자신을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고마운 듯이 보였다.
황후와 플뢰르가 팔짱을 끼고 모녀처럼 정다운 모습으로 먼저 걸음을 옮기고, 그들의 뒤를 엘리엇이 따랐다.
활을 내려놓은 케이든이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가자.”
“……네.”
디아나는 머뭇대다가 조용히 답했다. 그녀는 케이든에게서 세 걸음쯤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나란히, 하지만 대화 한마디 없이 어색하게 황후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러던 중, 디아나를 힐끔거리며 살피던 케이든이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걸음을 멈춘 그가 불시에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
“네, 네?”
디아나는 갑자기 케이든이 저를 부르자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그 모습에 케이든의 미간에 새겨진 골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가 소리 없이 한숨을 뱉고는 물었다.
“내 말이 그렇게까지 충격이었어? 의외네. 나는 나름대로 많이 티 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무슨 말씀이신지…….”
디아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서 대화를 회피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좋아해.]
[좋아해, 디아나.]
약 일주일 전 건국제 때, 케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웃었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디아나는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이따금 품었던 삿된 욕망이 환상이라는 형태를 통해 나타난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환상이 아닌 실제였다.
머리 위에서 터지는 색색의 불꽃도, 볼을 스치고 지나간 온기 어린 손길도, 저를 보며 웃는 케이든의 얼굴도.
하나같이 꿈만 같았으나 꿈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케이든은 고백에 대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그녀의 소매 끝을 잡았다. 나직한 목소리가 연이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대는…… 어때?]
[……저는.]
디아나는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케이든의 신경이 그녀의 입술에 쏠렸다.
[저는…….]
[여기 계셨습니까악!]
그러나 디아나가 이렇다 할 대답을 미처 내뱉기도 전.
그들이 사라진 사실을 눈치채고 달려 나온 파트라슈가 두 사람 사이에 난입했다.
파트라슈는 인파 속에서 기어코 케이든과 디아나를 찾아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늘 행사가 어떤 행사인데 이런 곳에 나와 있는 거냐, 자리를 비운 동안 누가 눈치라도 챘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결국 케이든과 디아나는 그 길로 황궁으로 돌아가 건국기념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쉼 없이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 탓에 자연히 케이든의 고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간간이 서로를 향해 웃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사실 디아나에게는 그편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는 아직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케이든이 먼저 디아나에게 고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디아나는 어떻게 해서든 ‘고백’과 관련한 대화 주제를 피하기 위해 애썼으나, 케이든은 그녀가 제게서 도망가도록 두고 보지 않았다.
케이든이 선명한 시선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혹시 그때 상황이 어수선해서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거라면 다시 말할게.”
“아,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는데…….”
“좋아해.”
“…….”
“……내가 그대를 좋아하게 됐어, 디아나.”
말끝에 케이든이 부스러질 듯 웃었다. 엷은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흩트렸다.
졸지에 고백을 두 번이나 받게 된 디아나는 그의 목소리와 웃음에서 묻어나는 마음의 무게가 버거워 떨리는 호흡을 뱉어냈다.
그녀는 시야 한가득 빛이 들이차는 듯한 느낌에 잠시 눈을 감아버렸다.
‘……아.’
디아나는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항복하듯이 인정했다.
그녀는 케이든의 말에 명백히 기뻐하고 있었다.
‘내가, 나도…….’
케이든을 좋아하는구나.
그것을 자각한 순간 심장이 맞다고 외치듯 소리 내어 뛰었다. 그 감각이 절망스러운 한편 조금은 설레었다.
디아나는 가슴께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케이든은 대체 언제부터 나를, 왜……?’
디아나는 회귀 전, 케이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없던 일이 되었고, 당사자인 케이든 역시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처형장 바닥을 구르던 케이든의 머리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고 있자면 도저히 케이든의 고백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가지 기억과 감정이 뒤섞여 속이 온통 혼란했다.
그때 케이든이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디아나와 거리를 좁혔다. 그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감쌌다.
상체를 숙여 디아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기댄 케이든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조용히 물었다.
“그대는 내가…… 싫은가?”
“아니요.”
“그럼 좋아?”
“그건…….”
디아나가 난처하게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그녀는 케이든을 싫어하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히 ‘아니다’라는 답을 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케이든을 좋아한다는 말은. 그건…….
디아나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두 사람의 호흡이 점차 나란히 가빠지며 숨에 열기가 섞였다.
“……그건.”
디아나는 생각을 모두 잊고 코앞에서 저를 집어삼키듯 응시하고 있는 검은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케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움직이려던 찰나.
바스락.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케이든과 디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