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45)

91화

한편. 그 시각, 건국기념 무도회.

‘……젠장. 대체 어딜 가신 거야?’

파트라슈는 어느 정도 사람들을 상대한 후 무도회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사람들 사이로 툭 튀어나온, 정확히는 툭 튀어나와 있어야 할 검은 머리통을 찾아보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케이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파트라슈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섰다.

‘이 무도회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데.’

물론 낮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보좌관인 제게 말 한마디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행태가 참으로 얄미웠다.

그리고 짐작하기로, 케이든이 무도회장을 벗어난 것은 분명 건강이 아닌 개인적인 이유일 것이다. 틀림없었다. 그 같은 회복력 괴물이 고작 피로를 이유로 무도회장을 나섰을 리는 없을 테니까.

“하하,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파트라슈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피해 무도회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게실을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케이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가셨구먼. 빠져나가셨어.’

결국 파트라슈는 케이든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구석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가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분노를 다스릴 때였다.

“3황자 전하를 찾는 거라면, 아까 내 딸아이와 함께 사라지시는 걸 보았네.”

“풉.”

파트라슈는 불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샴페인을 뿜어버렸다. 그가 콜록거리며 옷깃에 묻은 샴페인을 털어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둥 뒤에 교묘하게 몸을 숨긴 채 웃고 있는 서즈필드 자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트라슈는 서즈필드 자작의 면면을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상대를 질책했다.

“여기 있다가 1황녀 쪽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저리 가십시오.”

“걱정하지 말게.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1황녀 전하는 아직 근신 중이시고, 1황비 전하와 카드몬드 후작 역시 건강을 핑계로 불참했지. 괜히 파티에 모습을 보였다가 3황자 전하와 더 적나라하게 비교당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함인 듯싶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사신들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염려 말게나.”

“…….”

파트라슈는 서즈필드 자작의 말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신들이 케이든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듯, 사신들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노력하는 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쯧. 벗어날 핑계가 사라졌군.’

파트라슈가 속으로 혀를 찼다.

1황녀의 측근이 무도회장에 있으면 그를 핑계로 자작의 곁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자작의 말대로 지금 연회장에는 눈에 띄게 경계할 필요가 없는 사람뿐이었다.

한편, 기어코 자작의 말을 믿지 않고 제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는 파트라슈의 행동에 서즈필드 자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는 건가? 그래도 나름 계약 관계인데 말이야.”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십시오. 그보다, 3황자 전하께서 3황자비 전하와 함께 사라지셨단 말입니까?”

“그래. 사라진 지 한 시간은 족히 넘었다네.”

“그걸 뻔히 보고 계셨으면서, 안 말리고 뭐 하셨습니까!”

파트라슈가 소리 죽여 윽박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즈필드 자작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제가 왜 말려야 합니까? 부부 사이가 끈끈한 건 좋은 일이지요.”

“아,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파트라슈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서즈필드 자작의 욕,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빠르게 벗어날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서즈필드 자작은 끈질겼다. 그는 파트라슈가 보란 듯 대화를 끊고 샴페인만 들이키는데도 그의 곁에서 연신 말을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제 딸아이라지만 참 보기 좋은 부부가 아닙니까. 저도 젊었을 적에는 저런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깥을 나돌곤 했지요.”

서즈필드 자작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 와인을 홀짝였다. 파트라슈는 조금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저걸…… 자랑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게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깥으로 뛰쳐나가 디아나라는 사생아를 만들어냈나? 뭐 저런 쓰레기가.

파트라슈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서즈필드 자작은 그 사실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은근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저렇게 부부 사이가 좋으니 아이 소식도 곧이겠군요.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귀띔해주십시오.”

그 말에 파트라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그런 건 두 분 전하께서 알아서 하시지 않을까요? 그보다 제가 대화를 중간에 끊고 자리를 피한 거라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파트라슈는 서즈필드 자작과 더 이야기를 나누다간 분통이 터져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무례하게 대화를 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서즈필드 자작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 발을 움직이면서도 불쾌함을 다 떨치지 못했다.

‘아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는데.’

파트라슈가 잔을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서즈필드 자작에게 한소리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여전히 케이든의 주요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1황녀 측에서 알아낼 수 없게 현금으로 정치자금을 대 주니 무작정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케이든이 최근 입지를 넓혀가며 서즈필드 자작을 제외하고도 케이든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늘긴 했지만, 디아나라는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는 후원과는 천지 차이였다.

‘……으으.’

파트라슈는 생각을 잇다가 문득 디아나를 떠올리고 어두운 얼굴을 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발을 멈췄다.

‘그래도 슬슬 아이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긴 했지. 자작도 그래서 말을 꺼낸 것일 테고. 문제는 전하인데.’

파트라슈가 미간을 찡그렸다.

‘전하께서는 이미 3황자비 전하께 푹 빠져서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이게 1년 후면 끝날 계약 관계라는 걸 잊어버리신 건 아닌가?’

그가 모시는 주인이 그렇게까지 머저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건국기념 무도회까지 팽개치고 디아나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무척 암담해졌다.

이 결혼은 길게 이어질수록 케이든에게 손해였다.

그가 디아나와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서즈필드 자작을 비롯한 주변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테니까.

그리고 객관적으로 서즈필드 자작은 절대로 좋은 외척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케이든이 황태자 자리에 오르기 전이니 서즈필드 자작의 도움이 필요하다지만, 케이든이 황태자가 된 후면 자작의 욕심은 그들에게 분명한 손해가 된다.

누군가는 이런 그를 두고 은혜를 모른다고 할지도 모르나 파트라슈는 본디 케이든의 보좌관이자 책사였다.

그건 곧 제 주인에게 도움이 될 행동만을 철저히, 냉정하게 계산해 조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 결혼을 1년 안으로 마무리 짓는 게 분명 옳은데. 모든 상황과 조건이 그것이 답이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레밋 경.]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던 디아나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조차도 죄책감이 들었다.

“……에이씨.”

파트라슈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애초에 이혼을 요청한 것은 디아나라지만, 제국은 이혼 여성이 살아가기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케이든이 생활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원해준다 해도, 결혼을 한번 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터.

“아, 모르겠다. 나도 전하랑 똑같이 굴고 있나? 내가 걱정할 건 3황자비 전하가 아니라 다른 쪽인데 말이지…….”

파트라슈는 자꾸만 디아나에게로 흐르려는 생각을 애써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지금 문제는 디아나가 아니라, 그런 디아나에게 빠져 계약서를 제 손으로 찢으려 드는 케이든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나사 빠진 제 주군을 찾기 위해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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