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한 시간 후.
케이든은 한 손에 잔을 든 채, 웃지도, 울지도 않는 오묘한 표정으로 디아나를 응시했다.
‘……어떻게 정확히 두 잔 만에 저렇게 취할 수가 있지.’
디아나는 그의 맞은편에서 음이 맞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디아나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레베카는 독한 술을 기준으로 술을 반 잔 이상 마시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런 레베카보다 딱 한 잔을 더 마실 수 있는 몸이었다.
그녀는 회귀 전에는 이만큼 독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간과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노래 못 하는구나…….’
케이든은 뜻하지 않게 디아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술이 약하다는 것. 둘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것.
그 외에도 평소의 조용하던 모습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엉뚱한 행동들.
“으…… 써…….”
디아나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술을 한번 홀짝였다가 인상을 찡그리고.
“으…… 차가워…….”
다시 물을 홀짝이며 배시시 웃기를 반복했다.
케이든은 한 손으로 잔을 쥔 채 턱을 괴고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는 새에 미소가 떠올랐다.
음이 맞지 않는 노래도, 새 모이만큼 술을 홀짝이자마자 일그러지는 얼굴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사이, 또다시 물을 홀짝이던 디아나는 케이든이 술을 마시지 않고 자신을 구경하고 있자 눈을 부릅떴다. 그래 봤자 술기운으로 인해 눈이 풀려 있는지라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왜…… 안 마셔요? 빨리 마셔요.”
“그렇지만 그대가 너무 취했잖아.”
“줘 안 취했는데.”
“발음이 멀쩡하질 않잖아. 그리고 혼자 마시는 술은 즐겁지도 않고.”
케이든은 그 말을 하며 디아나의 손에서 술잔을 뺏어 들었다.
더 마시게 두었다가는 내일 숙취로 고생할 것이 눈에 훤해서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잔을 뺏기자 잠시간 칭얼거리던 디아나는 이내 잠잠해졌다.
그보다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는 표현이 맞았다.
디아나는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고서 중얼거렸다.
“아닌데, 마셔야 하는데…….”
“그대는 더 마시면 안 돼.”
“아니, 저 말고…… 케이든이요.”
“나?”
케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그러자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어라 웅얼거렸다.
하지만 발음이 잔뜩 뭉개져 있었고, 목소리도 작았기에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디아나?”
케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되물었다. 테이블을 돌아간 그가 디아나의 입 가까이 귀를 가져갔다.
그러자 디아나가 대단히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듯 손을 동그랗게 모아 제 입가에 대었다.
그녀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 그 상태로 케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케이든이 술을 마셔야…….”
“응.”
“침대로 데려갈 수 있잖아효…….”
“쿨럭.”
케이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남김없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누군가 속에서 불을 확 당긴 기분이었다. 그 누군가는 디아나였고.
그러나 그런 그의 상태를 모르는 것인지, 디아나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케이든을 보며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 무구한 웃음을 보자 약간이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케이든은 진심이 그득히 담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대 취했어. 이제 그만 마시자.”
“아닌데, 아뇨?”
“말도 꼬였고.”
“정말요? 제가요?”
“…….”
생각해 보니 술에 취한 사람과 무슨 대화가 통한다고 이러고 있었던 것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케이든이 팔을 뻗어 디아나의 무릎 아래와 등을 받쳐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같이 자요…….”
디아나는 케이든의 가슴팍에 고개를 툭 기대고 볼을 비비적댔다. 그는 품 안에 있는 말랑한 몸에 점점 욕정이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케이든은 빠른 걸음으로 방 한쪽에 놓인 침대로 향했다.
그가 술에 취한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얼른 자. 나는 소파에서 자든가, 방으로…….”
케이든이 디아나를 내려놓고 몸을 바로 세우려던 찰나.
“……!”
디아나가 돌연 팔을 뻗어 케이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케이든은 디아나를 덮치듯 그녀와 몸을 겹치게 되었다.
반사적으로 팔로 침대를 짚은 탓에 얼굴이 부딪치는 참사는 막았지만, 그 대신 나른하게 풀린 청보랏빛 눈을 코앞에서 마주했다.
술에 취한 사람의 눈빛이라는 것을 알지만, 명료하던 눈이 저렇듯 풀려 있으니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디아나처럼 취하지는 않았다지만, 케이든 역시 꽤 독한 술을 마신 참이었다. 진정하려 애써 보아도 점차 몸이 달아올랐다.
‘보지 말자.’
케이든은 이성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귓가로 탁한 숨결이 쏟아져 내렸다. 나직한 속삭임이 숨에 섞여 들었다.
“가지 마세요.”
“디아나.”
“여기서, 같이…… 자요.”
케이든은 결국 앓는 듯한 신음을 냈다. 인내심과 도덕성을 시험받는 것도 아니고, 미칠 노릇이었다.
“디아나, 제발…….”
케이든은 본능적으로 디아나에게 더욱 밀착하려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며 신음했다.
바로 그때.
“자장…….”
“…….”
“자장…… 자장……. 이상하다, 왜 안 잠들지……?”
디아나가 한 손으로 케이든의 등을 토닥이며 음이 맞지 않는 자장가를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온몸을 달구던 긴장이 한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잠시 제 귀를 의심하던 그는 허물어지듯 웃음을 터트렸다. 불가항력이었다.
“큽.”
“자장…… 자장…….”
“아, 그대는 정말이지…….”
케이든은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꿋꿋이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을 웃던 케이든은 항복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잠깐 팔에 힘 좀 풀어 봐. 제대로 누울게.”
“정말……?”
“응, 정말.”
케이든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간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슬쩍 팔에 힘을 풀었다.
케이든은 제 목을 감싸던 디아나의 팔이 사라지자 침대를 돌아 그녀의 옆자리로 올라갔다.
그는 디아나의 머리 뒤로 베개를 넣어 주고, 그녀를 제대로 눕힌 후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괸 그가 이불 위를 토닥였다.
“이제 편하게 자.”
“…….”
디아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꾸물꾸물 몸을 돌렸다. 그녀는 케이든과 마주 보는 채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왜.”
케이든의 잇새로 다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디아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그의 미소를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알딸딸한 취기가 기분 좋았고, 달빛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성이 사라지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케이든의 얼굴을 물끄러미 눈에 담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케이든은 별안간 디아나의 발음과 목소리가 명료해진 탓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혹시 술이 깬 건가?’
케이든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디아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차분한 표정과 달리 눈은 여전히 반쯤 풀린 채였다.
‘안 깼군.’
“뭐가 고마워?”
“…….”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디아나였음에도, 그녀는 케이든이 되묻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 사실이 의아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디아나는 술에 취한 상태이니 고맙다는 말만 꺼내 놓고 그대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아나는 말을 이었다.
“친구라고…… 말해 줘서…….”
“……?”
케이든은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좁혔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디아나에게 저런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뭐지? 설마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가?’
단지 술 취한 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본능이 자꾸만 기이하다며 말을 걸었다.
“디아나, 그거…….”
케이든은 이상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직후, 그는 웃으며 울고 있는 디아나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말을 멈췄다. 숨이 턱 막혀 왔다.
디아나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 탓에 뒷말은 속에서만 맴돌았다.
‘고마워요.’
나를 ‘나’로 봐 줘서 고마워요.
모든 걸 떠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고, 그런 내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해 주었던 사람.
귀하게 아껴 주고 싶은 사람.
디아나가 천천히 손을 뻗어 케이든의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가 흠칫 굳었다.
“따뜻하다…….”
디아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배시시 웃어 보이더니 곧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평온한 숨소리가 그 자리를 메꿨다.
케이든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꼼짝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본래 케이든은 디아나가 잠들면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제 얼굴에 닿아 온 온기를 떨쳐 내지 못하고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