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늦은 오후, 제4연대의 전용 연무장.
안타르는 연무장 구석진 곳에서 묵묵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마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흘러내렸다.
그의 앞에 있는 목제 허수아비는 진즉 부러진 상태였지만 그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지켜 드리지 못했어.’
그는 방어전 이후로 내내 자괴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방어전 당시.
안타르는 제1연대 기사들의 접근을 막는 데 정신이 팔려 디아나가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은 그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비타스에서 매 경기마다 살아남으며 키운 기감이 쓸모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알았다고 해도 막지 못했겠지.’
만약 베제트가 디아나를 공격하기 직전, 그 사실을 눈치챘다고 한들.
모래벽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마력을 움직여 디아나를 보호하기 전 불꽃이 그녀를 덮쳤을 것이다.
안타르는 절망스럽게도 그 누구보다 제 부족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케이든은 그와 달리, 정령사를 둘이나 상대하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보다 먼저 디아나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제 몸을 던져 그녀를 지켜 냈다.
그 사실이 안타르의 자괴감과 열등감을 부추겼다.
디아나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개인의 능력도 결코 케이든을 넘어설 수 없다고 누군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안타르는 손목이 욱신거리며 저리는데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길게 검을 내리그었다.
후웅―
“……?”
그러나 그때.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던 안타르는 낯선 차림새의 인영이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3황자비 전하의 시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디아나의 전속 시녀인 벨라도바였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지?’
벨라도바는 연무장을 쭉 가로질러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기사 몇의 자세를 살펴 주던 케이든의 앞이었다.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 레제타 영애. 무슨 일이지?”
벨라도바가 케이든의 앞에서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케이든은 살짝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벨라도바는 안타르가 서 있는 쪽을 찰나 일별하고는 태연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3황자비 전하께서 언제쯤 돌아오시느냐 여쭤보라 하셔서요. 괜찮으시다면 일찍 와 주실 수 있겠느냐는 말씀 전하셨습니다.”
“디아나가? 나를?”
“예.”
케이든은 조금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디아나가 자신을 먼저 찾는다는 사실이 꽤 기분 좋았는지 이내 씩 미소 짓고는 기사들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지금 가지. 남은 훈련은 알아서 해. 이만하면 많이 봐 줬다.”
“예에, 아무렴요.”
“빨리 가 버리십쇼.”
기사들 역시 그의 들뜬 기분을 눈치채고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케이든은 그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벨라도바를 지나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벨라도바는 케이든이 연무장 밖으로 사라지자 다시 안타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그는 티 나지 않게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싸, 오늘은 자유다! 혹시 돌아오실지도 모르니까 빨리 튀자.”
“옳으신 말씀.”
기사들은 케이든이 사라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사이, 안타르는 목검을 벽에 기대어 세워 놓는 척 슬쩍 벨라도바의 뒤에 섰다.
그러자 벨라도바가 재빠르게 그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다.
“확인하고 바로 없애세요.”
벨라도바는 그 속삭임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안타르는 벨라도바가 건넨 쪽지를 주먹 안에 잘 감추고 있다가, 제 방에 돌아온 후에 펼쳐 보았다.
<오늘 자정, 윙즈 본부에서 잠시 보지.
다만 감시를 따돌리고 와야 해. 방어전 이후로 자네에게도 감시가 붙었을 테니까.
윙즈 지도는 하단에 그려져 있어. 앞으로 오갈 일이 또 있을 테니까 잘 외워 둬.
―D. 옵스큐르>
단정한 글씨를 눈에 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안타르는 쪽지를 몇 번이나 뇌에 새기듯 읽은 후, 지도를 외우고 쪽지를 씹어 삼켰다.
‘D. 옵스큐르로서 나를 찾으신다는 건 무언가 필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디아나의 마음에 담긴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무엇인가라도 필요한 도움이 되는 존재라면.
안타르는 그것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
* * *
한편, 디아나의 부름을 듣고 3황자궁으로 돌아간 케이든은 조금 황당한 상황에 직면했다.
“……디아나, 이게 다 뭐야?”
케이든은 디아나의 방문 앞에 선 채로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방 안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아,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보기만으로도 아주 독해 보이는 술병이 세 개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케이든이 밤에 나를 찾으면 곤란하니까.’
디아나는 피오나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윙즈 본부에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케이든과 디아나는 평소 각방을 쓰되, 며칠에 한 번씩은 동침하는 듯 보이기 위해서 같은 방에서 잠들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 말은 곧, 케이든이 언제 동침을 하자며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럴 때 보통은 벨라도바에게 문 앞을 지키게 하지만, 동침을 이유로 찾아오는 케이든을 쫓아내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그래서 디아나는 안전하게, 케이든을 확실히 잠재우고 윙즈 본부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디아나는 그러한 속내를 감춘 채 제 맞은편으로 와 앉는 케이든을 보며 무구하게 웃어 보였다.
“아까 플뢰르가 좋은 술이 선물로 들어왔다며 몇 병 주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저희는 한 번도 술을 같이 마셔 본 적이 없잖아요.”
플뢰르가 낮에 디아나에게 술을 선물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물받았던 술이 지금 테이블 위에 올라 있는 술은 아니었다.
[디아나, 받아요.]
[이건…… 술이네요?]
[맞아요. 이번에 어머니께서 아는 분을 통해 구해 주신 건데, 부부 사이에 도움을 주는 술이래요.]
[콜록. ……네?]
차마 플뢰르의 선물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져오긴 했지만. 디아나는 케이든에게 이 술이 어떤 술인지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술의 종류를 바꿔치기하고, 그 대신 플뢰르의 선물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케이든을 잠재울 수 있는 상황을 마련했다.
케이든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테이블 위의 술병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디아나.”
“네?”
“그대…… 이 술이 상당히 독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 거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니까요.”
디아나는 애초에 자신이 있었기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회귀 전. 디아나는 레베카를 통해 처음으로 술을 배웠고, 그녀는 레베카보다 주량이 훨씬 셌다.
[디안…… 술을 잘 마시는구나.]
어지간한 일에서는 패배를 시인하는 법 없던 레베카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정도이니, 아마 별 무리 없이 케이든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디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생글 웃었다.
그 천진한 얼굴에 케이든은 피식 웃어 버렸다.
‘나쁜 기분은 아니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디아나가 이렇듯 그에게 무언가를 함께하자며 먼저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기뻤다.
케이든이 웃는 낯으로 제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말하니 궁금해지는걸? 나도 나름 술이 세기로 유명해서 말이야.”
“에이, 그래도 제가 더 셀걸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장담하는 건지. 누구랑 마셔 봤는데?”
“……자작 저에서 제게 호의적이던 사용인 몇이요.”
“흐음. 대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설마 남자야?”
“기억이 잘……. 아무튼, 건배할까요?”
“여기서 내가 또 말꼬리를 잡으면 잔을 뺏길 것 같으니 그만할게.”
케이든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주홍빛 술이 담긴 유리잔 두 개가 쨍,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 * *
그리고 한 시간 후.
케이든은 한 손에 잔을 든 채, 웃지도, 울지도 않는 오묘한 표정으로 디아나를 응시했다.
‘……어떻게 정확히 두 잔 만에 저렇게 취할 수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