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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145)

58화

“아…….”

한편, 안타르는 시곗바늘이 열 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난처한 신음을 흘렸다.

‘이러다가 늦으면 어떡하지.’

안타르는 초조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걸쳤다.

방 안에는 한 번 입었다가 벗은 흔적이 역력한 옷들이 난잡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래 봤자 훈련복이긴 하지만…….’

안타르는 미련이 남은 손길로 훈련복의 깃을 매만졌다.

단지 명령을 받으러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나들이 가는 것처럼 조금 들떴다.

결국 안타르는 옷을 한 번 더 갈아입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그는 대지의 하급 정령 노움의 도움을 받아 감시를 따돌린 후 길드 윙즈의 본부로 향했다.

똑똑.

안타르가 본부의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곧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열어 준 것은 어쩐지 당황한 얼굴의 뮈젤이었다.

“아…… 안타르. 일찍 왔네요.”

“예. 명을 받는 입장에서 늦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안타르는 뮈젤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뮈젤의 자리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안타르는 체구와 기척 등으로 그 여인이 벨라도바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정작 그가 찾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 아니, 옵스큐르 씨께서는 잠시 어딜 가신 겁니까?”

안타르는 이곳이 황궁이 아님을 상기하고 급하게 말을 바꿨다.

이미 이 자리의 모두가 디아나 블루벨이 D. 옵스큐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입에 올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안타르의 물음에 뮈젤과 벨라도바가 잠시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심장 부근을 스쳐 갔다.

그가 불안감에 입술을 달싹이는 것과 동시에, 벨라도바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 요소를 재워 놓고 오시겠다고 술을 달라 하셨는데, 조금 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걸 보면 함께 잠드신 것 같더군요.”

“…….”

안타르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 옆으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위험 요소.’

그것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디아나가 그와 함께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그사이 벨라도바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급한 사안이고, 경께 설명하려 했던 것들 전부 제가 전해 들었으니까요.”

벨라도바는 그렇게 말하며 안타르에게 피오나 옐링과 세드릭 하이에른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타르는 더더욱 심란해졌다.

‘피오나 옐링…….’

벨라도바는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안타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덧붙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경의 뜻에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굳이 이성적인 관계까지 발전하지 않아도, 친구라는 명목으로 옐링 소공작의 곁에 머물며 하이에른 영식을 자극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확실히 민감한 문제였다.

피오나는 본인의 목숨이 노려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세드릭 하이에른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심증은 명확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의 삶은 강박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의 선행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디아나 또한 주저하며 안타르에게 선택을 맡긴 것이었다.

디아나로서는 피오나를 케이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이긴 했지만, 사실 레베카가 옐링 공작가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서, 안타르는 필연적으로 피오나를 기만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니까.

후일 피오나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안타르를 원망하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뮈젤이 눈치를 보다가 말을 더했다.

“그래도 옐링 가문은 대대로 대지 속성 정령사를 배출하는 가문이었고, 당신은 현 공작과 같은 속성의 중급 정령사이니 친구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만해요. 옵스큐르 씨께서 선택은 오롯이 안타르 경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설득도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잖습니까.”

“뮈젤!”

뮈젤에게는 안타르보다 디아나가 훨씬 중요했기에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안타르가 이 일을 맡아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벨라도바는 그런 뮈젤을 질책했다.

그동안 안타르는 주먹을 풀지 않은 채 생각을 거듭했다.

그는 디아나가 자신을 이성으로조차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방어전에서는 제 손으로 그녀를 3황자에게 보내 주지 않았는가.

그래, 분명 알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

비록 연기일지라도, 디아나가 제 감정을 추호도 모른 채, 다른 여인과 친해져 달라 부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디아나는 안타르에게 연정의 대상이기 이전에 은인이었고, 주군이었다.

주군의 명을 따르지 않는 신하는 ‘신하’가 아니다.

안타르는 어떤 방식이든 디아나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하겠습니다.”

안타르의 대답에 뮈젤과 벨라도바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뮈젤은 웃었고, 벨라도바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경?”

벨라도바는 뛸 듯이 기뻐하는 뮈젤을 옆으로 밀어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안타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대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 *

“……나.”

디아나는 무의식중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꾸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미미한 짜증을 느꼈다.

“……아나.”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디아나는 목소리를 떨치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젓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디아나는 현재 굉장히 편안한 상태였다. 피부에 와 닿는 이불의 감촉, 창을 통해 흘러드는 부드러운 바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내내 지니고 있던 긴장을 사르르 녹였다.

그런데 이불이 왜 이렇게 딱딱…….

“디아나.”

반짝.

디아나는 불현듯 선명해진 부름에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 떴다.

“헉.”

눈을 끔벅이던 그녀는 다음 순간, 자신이 케이든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리고 케이든이 앞섶을 다 풀어 헤친 셔츠 한 장 차림이라는 데에 두 번째로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든은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디아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왜 이렇게 파고들어. 그냥 오늘 나가지 말고 종일 이러고 있을까?”

“아니요! 아니요!”

디아나가 기겁하며 같은 답을 두 번 반복했다.

재빨리 팔을 풀고 몸을 뺀 그녀가 황급히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자세가 마치 결혼식 다음 날 아침의 케이든 같았다.

“그, 케이든.”

“응, 디아나.”

“제가 혹시…… 싫다는데 계속 손을 대고 있었던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디아나는 머리가 띵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두 번째 잔을 기울인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두 잔으로 취할……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이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케이든을 멋대로 희롱한 것은 아닐까 싶어 주눅 들어 있었다.

케이든은 고개를 숙인 채 간간이 눈을 들어 제 반응을 힐긋힐긋 살피는 디아나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비스듬한 각도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디아나.”

“네…….”

“나는 그대가 이러는 게 싫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아.”

“네?”

“그러니까 허튼짓하고 싶으면 일일이 내 허락 구하지 않고 해도 괜찮아. 자, 마음대로 해.”

케이든은 그리 말하며 팔을 벌리고 침대에 완전히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벌어져 있던 셔츠 자락이 옆으로 흘러내리며 탄탄한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에 디아나가 비명을 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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