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데뷔탕트 날이었다.
케이든은 먼저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끝마치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왔다.
무도회 준비를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 바쁘게 오간 탓에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 너머, 시녀 벨라도바가 디아나의 치장을 도와주며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직까지 딱히 특별한 점을 찾지는 못…….”
“디아나.”
똑똑.
케이든이 예의상 방문을 두드리며 기척을 내자 벨라도바가 움찔 말을 멈췄다.
디아나는 케이든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그를 보며 반갑게 웃어 보였다.
“오셨어요?”
“준비는 끝났어?”
“거의 다요.”
케이든이 디아나에게로 다가오자, 벨라도바는 빗을 화장대 위에 내려 두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케이든은 화장대 위에 놓인 빗과 머리 장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해 줄까?”
“전하께서요?”
“응.”
“하실 줄 아세요?”
“글쎄. 그런데 난 워낙 뭐든 잘하는 사람이라.”
“세상에, 재수 없어라.”
“그래도 그대는 나를 좋아하잖아. 아니야?”
케이든이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빗을 집어 들었다.
디아나는 그의 너스레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케이든은 허리까지 늘어지는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조심히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웃었다.
“머릿결 좋네. 예쁘고.”
“그 머릿결을 위해서 오늘 새벽부터 얼마나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는지 아신다면 그리 예뻐 보이지 않으실걸요…….”
“하긴,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해.”
디아나는 한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거울 너머로 케이든을 살피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점점 말의 수위가 올라가는 것 같단 말이지.’
그녀는 조금 분한 마음에 입술을 작게 삐죽였다.
“그렇게까지 입에 발린 소리 안 하셔도 돼요.”
“진심인데.”
“전하께서 장난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어요. 이제 안 넘어가요.”
디아나는 케이든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세뇌하듯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그는 빗을 내려놓고 머리 장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묶은 디아나의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고정했다.
“다 됐어. 잘 어울리네.”
케이든은 그리 말하며 디아나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그녀는 당황과 간지러움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그를 불렀다.
“저, 케이든?”
“응, 디아나.”
“벨라도 나갔고, 보는 눈도 없는데 왜…….”
[그러니 그대도 나를 밀어내지 마.]
디아나는 케이든이 발작을 일으켰던 날 이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스킨십과 애정 어린 말들에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쉽사리 싱숭생숭해졌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든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색할 뿐이지 싫은 건 아니라며?”
“그건 그렇지만…….”
“그냥. 언제 어디서 필요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익숙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흠.”
디아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케이든을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케이든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정작 자신만 이렇듯 묘한 기분을 느끼는 듯해 조금 억울해졌다.
디아나는 시선을 떨군 채 무릎 위에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케이든이 디아나의 정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나저나, 내 모습은 어때?”
디아나는 케이든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를 보며 녹아내릴 듯한 미소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디아나는 조금 생소한 기분으로 케이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썹을 덮는 길이의 검은 생머리는 새벽부터 고군분투한 그녀만큼이나 윤기 있고 아름다웠다.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단정한 눈썹, 그 아래로 자리한 깊은 눈매. 높고 곧은 콧날과 초승달 같은 입매.
조각 같은 얼굴을 지나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화려한 예복에 둘러싸인, 완벽한 비율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굉장한…… 미남이구나.’
디아나는 케이든이 이따금 가십지에 제국 최고의 미남으로 손꼽힌다는 것을 새삼 상기했다.
그녀가 ‘흠잡을 곳 없이 멋지다’라고 말해 주기 위해 입술을 열던 차였다.
“아, 그러고 보니.”
케이든이 돌연 크라바트를 한 손으로 풀어 헤치고 셔츠의 단추를 툭 풀었다.
“그대 취향에 맞추려면 단추 한두 개 정도는 더 풀어야겠네. 더 풀까?”
“콜록.”
디아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잘못 들이켜 콜록거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케이든의 손은 착실히 단추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더 풀까?”
점점 드러나는 속살에 디아나가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급하게 양손으로 그의 셔츠를 여미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케이든이 요망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은 순진무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뻔뻔했다.
“아, 이 정도면 됐어? 난 또 말이 없길래 좀 더 풀어 헤쳐야 하나 싶었지.”
“제가 언제 풀어 헤친 걸 좋아한다고 했어요!”
“내 몸이 취향이라며.”
“그건……!”
[맞아요, 저 전하 몸이 취향이에요.]
[그러니까 자꾸 부추기지 마세요. 그러다가 제가 이혼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그랬네요, 제가.”
무어라 항의하려던 디아나는 자신이 찰나 심술을 참지 못해 그에게 장난쳤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며 손을 올렸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 볼 빨개졌네.”
커다란 손이 디아나의 볼을 감쌌다.
굳은살이 박인 엄지가 흰 볼을 스치듯이 쓸자 한순간 등줄기에 오싹한 감각이 일었다.
“…….”
케이든은 디아나의 볼을 한 손으로 감싼 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무색하게도 쥐죽은 듯한 고요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점차 묘해졌다.
디아나는 그제야 케이든과 자신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서둘러 손을 떼어 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양손을 등 뒤로 감추며 주춤 뒷걸음질 쳤다.
“왜?”
케이든이 언뜻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
디아나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그……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늦지 않을까요?”
“……그렇겠네.”
잠시 침묵하던 케이든은 다행히 그녀의 말에 선선히 긍정해 주었다.
그러자 숨 막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져 그녀는 안심했다.
디아나는 케이든의 손을 잡고 데뷔탕트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내내 속으로 되뇌었다.
‘원래 다정한 사람이잖아.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그러나 한번 달아오른 열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아 그녀를 곤란하게 했다.
* * *
데뷔탕트 무도회는 건국 기념 무도회만큼이나 중요한 행사였다.
그렇기에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치르는 무도회장은 유달리 화려했다.
“이렇게 화려한 곳은 처음이에요.”
“시, 실수하면 어떡하죠?”
“괜찮을 거예요.”
“너무 떨려…….”
올해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식과 영애들은 무도회장 한쪽에 위치한 파티션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황제의 보좌를 맡는 시종장이 파티션 너머에서 나타났다.
그는 데뷔탕트를 치르는 당사자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흰 꽃을 가슴에 달고 있는 영식과 영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대기하시다가, 제가 호명하는 순서대로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시종장은 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사라졌다.
곧 무도회가 시작된다는 사실에, 남겨진 이들은 잔뜩 긴장한 채 마지막으로 자신의 매무새를 점검했다.
개중에서 유독 희게 질린 얼굴의 소녀가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숨을 못 쉬겠어…….’
그녀는 옐링 공작의 하나뿐인 딸이자 옐링 소공작, 피오나 옐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