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45)

51화

[연지곤지]

‘숨을 못 쉬겠어…….’

옐링 공작의 하나뿐인 딸이자 옐링 소공작, 피오나 옐링은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으나 긴장한 탓에 자꾸만 숨이 가빠졌다.

그때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소공작님.”

“……아, 하이에른 영식.”

“진정하시고. 손이 내려갈 때는 천천히 숨을 내쉬어 보세요.”

“이렇게……?”

“그렇죠. 그리고 손이 올라갈 때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피오나는 안정감 있는 손길을 따라 차근히 숨을 골랐고, 이내 한결 안정을 찾은 모습이 되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피오나의 파트너, 세드릭 하이에른이 담백하게 손을 물리며 웃었다.

천사 같은 그 미소에 피오나는 볼을 살짝 붉히며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파티션 너머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요한 가운데 시종장의 무게감 있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럼 지금부터 데뷔탕트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모르비스 가문의…….”

시종장의 호명에 따라, 영식과 영애들은 차례로 짝지어 손을 잡고 파티션 밖으로 나갔다.

“……다음. 옐링 가문의 피오나.”

“소공작님, 손을.”

세드릭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피오나는 그의 손에 살며시 제 손을 올리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피오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럼 갈까요?”

“……응!”

피오나는 그를 따라 활짝 웃으며 파티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하이에른 영식은 참 좋은 사람이야.’

피오나 옐링.

차기 옐링 공작이라는 그녀의 지위는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소공작님. 저는…….]

[이번에 데뷔탕트를 치르신다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제게 소공작님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차남, 혹은 삼남의 영식들은 피오나의 데뷔탕트 소식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데뷔탕트의 파트너 자리를 얻어 낸다는 것은, 그녀의 약혼자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인물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뜻과 동일했다.

그래서인지 매일매일 편지로 파트너 요청이 쏟아지는 것은 기본이었고, 밤마다 옐링 공작 저의 앞에 찾아와 느끼한 세레나데를 불러 대는 영식들도 있었다.

피오나는 그들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녀와 나이 차이가 두 배나 나는 영식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는 것 또한 그녀의 불편에 한몫을 더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라 내 지위를 좋아하는 거면서.’

피오나는 그런 마음에 차라리 파트너 없이 홀로 입장할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그러나 세드릭 하이에른을 알게 된 후로는 마음이 달라졌다.

<저는 세드릭 하이에른이라고 합니다, 옐링 소공작님.

혹시 하이에른 꽃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제 얼굴 한번 본 적 없으면서 구구절절한 사랑 시를 적어 보내는 이들 중에서 세드릭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그저 제 이름을 말하고, 하이에른 꽃에 관해 물었다. 그의 편지는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영식들의 편지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피오나는 세드릭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가벼운 어조로 꽃에 관해 물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피오나는 꽃을 좋아했다. 그녀의 이름도 꽃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래서 피오나는 데뷔탕트 소식이 알려진 이후로, 처음으로 펜을 들어 세드릭에게 답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네요. 가문의 상징화인가요?>

그것을 시작으로 세드릭과 피오나는 조금씩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점점 친구 사이의 시시콜콜한 잡담에 가까워졌고, 피오나는 고민 끝에 그에게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있느냐 물었다.

세드릭은 이미 데뷔탕트를 치른 전적이 있었기에 조금 놀라워했으나,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세드릭은 작게 속삭이고는 피오나의 허리를 조심스레 감쌌다.

피오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세드릭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 그와 손을 맞잡았다.

‘만약 결혼을 꼭 해야 한다면…….’

하이에른 영식과 결혼하고 싶다.

피오나는 수줍은 희망을 꽃피우며 발을 움직였다.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에 귀족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다들 어쩜 저리 귀여울까.”

“옛날 생각나네요.”

모두가 웃음꽃을 피우며 추억에 젖어 있는 사이.

‘……피오나 옐링.’

디아나는 케이든의 곁에 선 채,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피오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는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후라고 해도 고작 열여섯 살인데, 어쩌다가…….’

왜냐하면 회귀 전, 피오나 옐링은 열여섯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작 저의 제 방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유언장도, 타살의 흔적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에 피오나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하루아침에 아끼던 외동딸을 잃은 옐링 공작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넋을 놓아 버렸다.

[피오나, 피오나, 내 딸아…….]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공작님! 제발!]

그런 그의 곁을 지킨 것은 세드릭 하이에른이라는, 옐링 공작가의 방계 출신 귀족 영식이었다.

레베카를 통해 듣자 하니 세드릭 하이에른은 피오나 옐링의 생전 약혼자로 그녀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했다.

그 역시 피오나의 죽음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을 텐데도, 세드릭은 딸을 따라가겠다며 자진을 시도하는 공작을 온몸을 던져 막았다.

그래서일까. 옐링 공작은 딸의 죽음 이후 세드릭을 부쩍 의지하고 기대다가, 끝내는 그에게 공작위를 넘겨주고 떠나 버렸다.

이후 레베카는 새로이 옐링 공작이 된 세드릭을 포섭하면서 황위 계승을 더욱 공고히 했다.

대대로 중립을 지키는 윅스빌 공작을 제외하면, 남은 세 공작 중 두 명이 레베카를 지지하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 디아나는 어떻게 해서든 피오나의 죽음을 막고, 그 대가로 옐링 공작을 케이든 쪽으로 포섭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1황자비의 친부인 위버 공작, 그리고 옐링 공작을 따라 케이든을 지지할 귀족들이 더욱 많아질 테니까.

그래서 디아나는 뮈젤과 벨라도바를 통해 피오나 옐링에 대한 소문들을 모아 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상한 전조라든가 낌새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딱 그 나이의 평범한 귀족 영애입니다. 물론 이른 나이부터 후계자로 교육받은 만큼 조금은 영악하고 염세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요.]

[대외적인 평판도 좋은 편이에요. 일에 관련해서는 까칠하지만, 주변인들에게는 굉장히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뮈젤과 벨라도바의 보고를 들은 디아나는 고심하다가, 그녀의 주변 인물에 대한 정보까지 빠짐없이 모아 오라 일렀다.

그중에는 세드릭 하이에른의 이름도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디아나는 피오나에게 붙박여 있던 시선을 세드릭 하이에른에게로 옮겼다.

그는 다정한 시선으로 제 파트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더해지니 누구라도 쉽사리 호감을 느낄 법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세드릭 하이에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에게서 루드비히와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 역시 왕자 같은 외모와 정중하고 매너 있는 성격,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곤 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레베카의 시녀로 지내며 그가 얼마나 잔혹하고 냉정하며, 교활한 사람인지 알게 되고는 사람의 겉모습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이에른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나, 평생 형에게 밀려 뒷전으로 취급받았다고 했지. 그런데도 사람이 저렇게 모난 곳 하나 없을 수 있다고?’

이윽고 음악이 멎고, 사람들은 성공적으로 데뷔탕트를 치른 어린 영식과 영애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피오나와 세드릭 역시 춤을 멈추고 서로를 향해 가볍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꼭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디아나는 자꾸만 가슴이 선득해지는 느낌에 그들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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