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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145)

49화

또다시 초라하게, 홀로 묵묵히 고통을 견디고 있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당신은 왜 항상 이렇게…….]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제 당신 곁에는 내가 있는데.

당신을 돕기 위해서, 당신 곁으로 온 내가 있는데.

왜 아직도 당신은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참아내려 하나.

왜 항상 이렇게…… 초라하고 외로운 모습이어야 하나.

당신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강인한 사람인데. 그리 대우받는 게 마땅한 사람인데.

케이든이 그녀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쌓여 왔던 서러움, 그가 겪는 고통에 대한 분노 등이 일순 눈물이 되어 왈칵 흘러나왔다.

케이든의 말로 인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디아나는 울 것처럼 먹먹해지는 목을 한 손으로 감싸며 시인했다.

“네.”

“…….”

“맞아요. 저였어요.”

물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직접 대답을 들으니 오히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케이든이 조금은 가쁜 호흡으로 물었다.

“왜…… 모르는 척했어?”

“전하께서 그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도대체 왜?”

“…….”

“내가 당신의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왜.”

속마음과 달리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말들은 매서운 추궁, 혹은 다그침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애원이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디아나를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밀어내 달라는 애원.

하지만 디아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작게 실소했다.

“말씀드렸잖아요.”

“…….”

“저는 당신이 홀로 고통을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고, 당신이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

“당신이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라요.”

디아나의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 냈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저 밀어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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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는 한숨처럼 속삭이며 케이든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그대는…….”

그 말을 듣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케이든은 제 손을 붙잡은 디아나의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았다. 그가 겹쳐진 손을 제 입가 가까이 당기며 탄식했다.

“그대는 나를 자꾸만 한심하고 염치없는 놈으로 만들어.”

그 말을 들은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다음 순간. 케이든이 손깍지를 끼며 디아나를 휙 끌어당기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디아나는 눈 깜짝할 사이 케이든의 위에서 상체를 바짝 밀착한 자세가 되자 숨을 흡 삼켰다.

놀란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때마다 맨 살결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숨결이 뒤섞였다.

“그대.”

“…….”

“디아나.”

“……네.”

디아나는 어쩐지 뱃속이 꽉 조여드는 듯한 기분에 간신히 대답했다.

그런 그녀와 대조적으로, 케이든은 어쩐지 평화롭기까지 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분명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해 주기 위해 노력했어.”

“……네?”

“하지만 먼저 밀어내지 말라고 나를 붙잡은 건 그대야.”

알 수 없는 말에 디아나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으나, 케이든은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손등에 진득하게 입술을 내렸다.

맞잡은 손 너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 그대도 나를 밀어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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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1년 뒤의 이혼이다.

하지만 케이든은 디아나와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디아나가 이혼을 바라지 않게 만들면 돼.’

검은 눈을 담은 눈매가 요사스럽게 휘어졌다. 흡사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미소 같았다.

* * *

한편, 케이든이 한창 디아나를 피해 다닐 즈음.

페란트는 오만상을 구긴 채로 마차에 올랐다. 황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황궁 밖에서 약속이 있다고?]

[예, 어머니.]

황궁을 벗어나기 전.

페란트는 2황비에게 황궁 밖의 약속에 참석했다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찾아갔다.

2황비는 그의 말을 듣고는 불편한 얼굴로 책을 탁 덮었다.

그녀가 목과 허리를 반듯이 편 채 물었다.

[누구를 만나기로 했기에?]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된 영식입니다. 이야기하셔도 모르실 거예요.]

페란트가 묘하게 대답을 얼버무리자 2황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작게 한숨을 삼킨 그녀가 엄한 어조로 경고했다.

[……방어전 이후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되도록 책잡힐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네 행동 하나하나가 1황녀 전하께 폐를 끼치는 일이 될 수도 있어. 명심하거라, 란트.]

[……알겠습니다.]

페란트는 자신이 꼭 무언가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 확신하는 듯한 2황비의 어조에 수치심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때문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의 기분은 상당히 저조한 상태였다.

“……?”

마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려던 페란트는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리 저편에서 그를 보며 쑥덕대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뭐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페란트는 한층 더 험악한 얼굴을 한 채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어, 왔냐?”

방음과 보안이 철저한 방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고급 술집.

그 안에서 여인의 허벅지를 베고 방탕한 자세로 누워 있던 조셉 핀들레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페란트를 맞이했다.

페란트는 그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건너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술잔을 쥐었다.

술잔을 막 입에 가져다 대려던 페란트가 멈칫했다. 그는 조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여인을 찌릿 노려보았다.

“안 나가?”

“……아, 알겠습니다.”

페란트의 사나운 눈매에 겁먹은 여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후다닥 사라졌다.

조셉은 얼굴을 구기며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고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가 페란트에게 포도 한 알을 집어 던졌다.

“왜 오자마자 신경질이야? 무슨 일 있었냐?”

페란트는 고개를 기울여 제게 날아오는 포도를 피하곤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최근, 그리고 오늘, 이곳까지 오는 내내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야.”

“뭐.”

“네가 보기에도 내가 등신 같냐?”

“풉.”

조셉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워 낄낄댔다.

“당연한 소리를 하네. 너 완전 등신이잖아. 그걸 이제 알았냐?”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진지하니까.”

“응― 너 완전 등신―.”

“닥쳐, 새끼야.”

“자기가 대답하래 놓고는?”

페란트가 울컥해 포도를 송이째 집어 던지자 조셉이 머리 위로 팔을 교차해 그것을 막으며 어이없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란트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그는 이를 으득 갈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젠장…….’

[그러면 2황자 전하께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1황녀 전하의 도구나 다름없었던 거로군요.]

[1황녀 전하께서 너무도 당연하게 2황자 전하가 전공을 세울 기회를 빼앗아 가시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는 마음에…….]

얼마 전 엿들었던 대화가 또다시 떠올랐다.

페란트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2황비가 보았다면 품위 없이 뭐 하는 짓이냐며 대번에 고함쳤을 행동이었지만 그런 것을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설마…….’

남들이 보기에도 내가 불쌍해 보이나?

줏대도 없이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황족이면서도 노예의 삶을 자처한다며.

사실은 모두가 뒤에서 그를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

“야, 뭐 때문에 지랄인지는 모르겠는데 술이나 마셔. 나 아버지 눈 피해서 겨우 빠져나온 건데 분위기 망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조셉은 종을 흔들어 술과 안주를 더 가져오라 이르고는 페란트에게 경고했다.

결국 입 안으로 욕설을 중얼거린 페란트가 잔을 들어 올렸다.

챙―!

유리잔끼리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분노가 조금이나마 밀려났다.

페란트는 입가로 잔을 가져다 대며 속으로 결심했다.

‘언제까지나 누님의 노예로 살 수는 없어.’

정확히는,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레베카를 따라야 할 의무가 없었으므로.

‘이번 사교 시즌이 기회야.’

레베카가 아닌, 오롯이 페란트 본인에게 힘을 실어 줄 이들을 찾을 기회가 머지않았다.

그렇게 세력을 쌓고 나면 어머니인 2황비 역시 그를 인정해 줄 것이다.

아무렴, 피도 이어져 있지 않은 레베카보다야 친아들이 황위에 오르는 편이 더 기꺼우시겠지.

페란트는 그렇게 생각을 굳히며 단번에 술을 비웠다. 목구멍이 불타는 듯한 파괴적인 감각이 썩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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