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45)

47화

다음날.

“으음, 역시…… 소고기는 윅스빌 영지산이 제일이지요.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요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워낙 미각이 예민해서, 늘 최상품의 재료로 만든 요리만 먹었던지라, 하하하.”

‘젠장. 이래서 이자와는 식사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케이든은 투도크 백작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느릿느릿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넓은 식당에는 케이든과 투도크 백작 둘뿐이었던지라 더더욱 고역이었다.

파트라슈라도 있었다면 나았겠지만, 그는 최근 디아나를 피하는 케이든 때문에 이리저리 굴렀던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투도크 백작과의 식사 일정을 잡고는 본인은 쏙 빠져나가 버렸다.

[제가 3개월 전부터 예약해 뒀던 레스토랑입니다! 절대! 따라오지 마시고! 도망가지도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파트라슈는 그렇게 말하고는 잡을 새도 없이 줄행랑쳤다.

케이든은 자신을 투도크 백작에게 떠넘긴 그를 따라가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투도크 백작은 꽤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했다가는 그가 간신히 얻어 낸, 귀족들 사이에서의 이미지가 모두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케이든은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지만 투도크 백작과 단둘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케이든은 썩 훌륭하게 그와의 시간을 견뎌 냈다.

‘또 뭘 사 주지.’

케이든은 식사 시간 내내 머릿속으로 디아나에게 이것저것 선물할 궁리를 했다.

일전에 파트라슈를 통해 드레스를 전달하고 나니, 어쩐지 디아나에게 부족한 듯이 보이는 물건이 자꾸만 늘어갔다.

물론 그 선물들 역시 전부 파트라슈를 통해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는 아직 먼발치에서 디아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수런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케이든은 사용인들이 디저트 접시를 차려 두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말 많고 오만한 백작과의 시간을 무사히 버텨 낸 자신을 향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픈 심정이었다.

케이든은 디저트를 빠르게 해치우고 자리를 뜰 생각으로 스푼을 들었다.

그때 힐끔거리며 케이든의 눈치를 보던 투도크 백작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그건 그렇고, 3황자 전하. 혹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의 파트너는 정하셨습니까?”

그 물음에 케이든이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묻는 백작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것을 묻지? 그야 당연히…….”

하지만 케이든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 투도크 백작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혹 3황자비 전하와 함께하기 불편하시다면, 제 여식은 어떠십니까?”

“……뭐?”

“하하! 전하께서 그런 얼굴을 하시는 건 처음 보는 듯하군요.”

투도크 백작은 케이든의 당황한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듣자 하니 최근 공적인 행사가 아니면 3황자비 전하와 함께하지 않으신다지요? 하긴, 지금쯤이면 질리실 때도 되었지요. 제게 예쁘고 참한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번 사교 시즌에 데뷔탕트를 치를 예정입니다. 한데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지나치게 황당한 소리를 듣자 외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몰라도, 데뷔탕트를 치르는 당사자들의 파트너가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중요했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 혹은 영식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약혼자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타냈으니까.

케이든은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어 있다가,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불쾌한 기색으로 식기를 탁 내려놓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백작.”

“제게는 괜히 아닌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다 이해합니다. 자고로 영웅이란 호색한인 법이지요.”

투도크 백작은 자못 너그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솔직히 현재의 3황자비 전하께서는 사생아가 아니십니까. 가문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사생아보다야 제 여식이 더 전하께 도움이 될…….”

하지만 투도크 백작은 이번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케이든이 테이블 너머로 투도크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의 다른 쪽 손에 들린 금빛 검의 끄트머리가 코앞에서 백작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컥, 캑! 지, 지금 이게 무슨 짓……!”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야, 백작.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케이든의 눈은 금방이라도 투도크 백작의 목에 검을 꽂아 넣을 것처럼 흉흉했다. 그 눈을 본 투도크 백작이 겁에 질려 목을 움츠렸다.

케이든은 백작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이를 악물었다. 문득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치받았다.

‘나 때문에…….’

괜히 내가 디아나에게 쓸데없는 마음을 품어서.

한심하게 제 마음 하나조차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나머지, 디아나를 피해 다녀서.

그래서 이따위 인간들이 감히 디아나를 티끌이나마 깎아내릴 빌미를 줬다.

케이든은 자책했다. 동시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사람들은 대체 왜, 언제나, 디아나가 사생아인 것이 그녀의 탓인 양 구는 것인가.

애초에 디아나가 ‘사생아’가 된 이유는 서즈필드 자작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생아로 태어나고자 하여 사생아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사생아’라는 이유를 들어 너무도 쉽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모진 일을 당하고도 화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 사람을.

[저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토록 한심한 자신을, 아무런 대가조차 없이 진심으로 위해 주는 그 사람을…….

이를 으득 간 케이든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투도크 백작을 거칠게 팽개쳤다.

우당탕, 소리가 나며 백작의 몸이 식당 바닥을 굴렀다.

케이든은 차디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빠르게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을 거야, 백작. 엄연히 아내가 있는 이에게 다른 여자를 들이대는 무뢰한의 지원 따위 필요 없으니까.”

“쿨럭, 허억! 아, 아, 알겠습니다.”

투도크 백작은 케이든의 기세에 눌려 턱을 덜덜 떨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머, 백작님……!”

“이게 무슨……!”

바깥에서 사용인들이 놀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백작이 식당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이내 그들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둔탁해졌다.

홀로 남은 케이든은 검을 없애고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갈무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제 어리석은 행동으로 또다시 디아나를 상처 입혔다는 생각만이 온통 머리를 지배했다.

그의 감정에 따라 마력이 심상찮게 일렁였다. 속이 거세게 울렁거리며 먹은 것을 죄 게워 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혼란한 머릿속으로 엘판드의 염려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괜찮…….>

그러나 그 순간.

케이든은 심장을 꿰뚫리는 듯한 고통에 헉 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 뻔한 비명을 막기 위해 볼 안쪽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지나친 고통에 무릎이 휘청 꺾였다.

시야가 빠르게 점멸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어느새 차가운 식당 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였다.

그사이, 투도크 백작은 케이든의 살기에서 벗어나자 이성을 되찾았는지 식당 앞으로 돌아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3황자 전하! 제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도 괜찮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백작님, 진정하세요!”

“저리 비켜라! 3황자 전하!”

투도크 백작이 식당 문을 열려고 하는지 문고리가 불안하게 덜걱거렸다. 사용인들이 필사적으로 그를 막는 듯한 기척이 연이어 들렸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케이든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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