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한편, 비슷한 시각.
최근 수도의 거리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의상실 ‘에스딜의 화원’.
그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비밀 응접실.
그곳에는 클로크를 두른 디아나와 뮈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뮈젤은 디아나의 앞에 서류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수장님의 드레스에서 티 나지 않게 떼어 낸 보석들을 팔아 알려 주신 업체의 매입과 투자를 마쳤습니다. 여기는 그 업체 중 한 곳이고요.”
“고마워.”
디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후 신중한 눈길로 서류를 검토했다.
뮈젤은 아무리 봐도 길거리 노점에서 사 온 듯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일하는 그녀를 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3황자 전하와 식사하지 않으신 겁니까?”
“음……. 약속이 있다고 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겐 내가 낮잠을 잔다고 둘러대 달라고 벨라에게 부탁하고 나왔지. 요즘 한창 바쁘시잖아.”
디아나는 샌드위치를 씹어 삼킨 후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본 뮈젤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며칠째 식사 한번 함께하지 못할 만큼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을…….”
뮈젤은 케이든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그녀가 말을 이을수록 디아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듯해서였다.
샌드위치를 든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디아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라고 했으면서.’
사실 디아나 역시 케이든이 자신을 피한다는 사실에 적잖은 심란함과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영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쁜 인상은 아니었어. 오히려…….]
[좋았지. 친구 하고 싶었을 정도로.]
물론 지금의 케이든에게는 회귀 전의 기억이 없다지만, 그가 자신을 ‘친구’라고 칭했던 것을 기억하는 디아나에게는 케이든이 무척이나 각별했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가지게 된 친구였으니까.
디아나는 심장 한구석이 저릿한 느낌에 가슴께를 꾹 움켜쥐었다.
‘왜 이렇게…… 서운하지.’
회귀 전과 회귀 후를 통틀어, 디아나 스스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케이든뿐이었다.
그래서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이 섭섭함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딸랑―
그때 누군가 찾아온 것인지 바깥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입구와 멀리 떨어진, 가게 안쪽에 있는 응접실이라 방 안의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은 없었지만, 뮈젤과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의상실의 주인, 에스딜이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기척이 문틈으로 흘러들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남성분께서 여긴 어쩐 일로…….”
“아, 그게…… 옷을 선물하려고 하는데, 이곳이 괜찮다고 추천을 받았……습니다.”
디아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저 목소리…….’
어쩐지 케이든이 떠오르는 목소리인데?
디아나는 그런 생각에 뮈젤을 돌아보았다.
뮈젤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딜 님께서는 가십지에 관심이 없으시니, 황족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긴 한데. 확인해 볼까요?”
뮈젤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디아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뮈젤은 조심스럽게 움직여 응접실의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대화 소리와 기척이 한층 커다랗게 들렸다.
디아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직후 청보랏빛 눈이 둥글게 부풀었다.
“우선 이쪽에 앉으시겠어요? 카탈로그를 보여 드릴게요.”
“고맙, 아니 감사합니다.”
‘손님’, 케이든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의상실에 직접 방문한 것이 처음이었던지라 괜히 무릎을 다소곳이 모으고 소파에 앉았다.
케이든은 조금 신기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찾느라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아 보이네.’
케이든은 디아나의 옷을 사러 황궁을 나서기 전, 플뢰르에게 들러 괜찮은 의상실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플뢰르가 곧장 대답했다.
[의상실이라면…… 역시 마담 드슈의 가게가 가장 유명하죠, 아무래도. 디아나의 결혼식 드레스도 마담 드슈의 작품일 거예요.]
마담 드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디아나의 결혼식 드레스를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하니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 케이든은 황궁을 나서자마자 마담 드슈의 가게를 찾아갔다.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닌지, 행인 한 사람을 다짜고짜 붙잡고 길을 물었는데도 손쉽게 마담 드슈의 의상실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담 드슈는 황족에게도 예외 없이 단호한 여인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제 의상실의 예약은 이미 가득 찬 상황이어서요. 예약하셨나요?]
케이든은 상당히 충동적으로 의상실을 찾은 것이었기 때문에 예약을 했을 리가 없었다.
잠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마담 드슈가 차선을 제시했다.
[대신 괜찮으시다면 제 제자의 의상실에라도 가 보시겠어요? 선물을 받으실 분을 생각해서 특별히 알려 드리는 거랍니다.]
마담 드슈는 케이든이 디아나에게 옷을 선물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의 제자가 운영하는 의상실을 알려 주었다.
그곳이 바로 ‘에스딜의 화원’이었다. 다소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훌륭한 의상실이었다.
케이든은 마음을 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에스딜이 테이블 위에 카탈로그와 함께 간단한 다과를 차리며 물었다.
“누구에게 선물하시려고요?”
“아내에게 선물하려 합니다.”
케이든은 에스딜의 물음에 답하며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평소 옷을 제외한 모든 것에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에스딜조차 순간적으로 “어머.”라고 하며 놀랐을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응접실에 숨어 있던 뮈젤과 디아나 역시 그의 웃음을 목격했다.
뮈젤은 음흉하게 웃으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검지로 그녀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콕콕 찔렀다.
“수장님.”
“……왜?”
“수장님을 열심히 피해 다니신다는 분치고는 굉장히 로맨틱하시네요? 깜짝 선물이라니. ‘아내에게 선물하려 합니다’라니. 캬.”
“케이든 따라 하지 마, 뮈젤.”
뮈젤이 케이든의 말을 흉내 내자 디아나가 민망함을 감추며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밀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은 미미하게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조금 전 서운함을 느꼈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기분이 이상해.’
이것도 ‘친구’라서 느끼는 감정일까? 혹은 죄책감?
“이건 어떠세요?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을 기본으로 만들어 본 것인데…….”
“아, 괜찮군요.”
디아나는 햇살을 등진 채, 꼭 봄 새싹처럼 쑥스러운 얼굴로 카탈로그를 넘기는 케이든의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 * *
그러나 그런 기분은 채 반나절을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레밋 경?”
디아나는 황궁으로 돌아온 후, 케이든이 저를 찾아와 선물을 건네리라 생각하며 그를 기다렸다.
디아나는 선물을 받으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그가 지금껏 그녀를 피했던 사실에 섭섭함을 느꼈다고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저녁이 되자 나타난 것은 케이든이 아닌 파트라슈였다.
“허우, 많기도 하지.”
파트라슈는 양팔에 그득한 상자들을 침대 위에 내려 두고는 어깨를 빙빙 돌렸다.
그의 등 뒤로 시종들이 제각기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와 방에 차곡차곡 쌓았다.
파트라슈는 어쩐지 망연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디아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짜잔―!”
“…….”
“주군께서 보내신 깜짝 선물입니다, 비 전하!”
파트라슈가 발랄하게 외쳤다.
디아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케이든은요?”
“음, 그게. 요즘 후원을 희망하는 귀족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으신지 몸이 굳는 느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연무장에 계실 겁니다. ……아마도.”
그 물음에 파트라슈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횡설수설했다.
그가 망설이며 덧붙인 ‘아마도’라는 말에, 끝내 디아나의 이마에 힘줄이 빠직 돋아났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스산하게 다짐했다.
‘역시 물어봐야겠어.’
대체 왜 자신을 피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들어야겠다고.